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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자반 밥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03

by 노루

어릴 적 나는 뭇 어린이들이 그렇듯 밥에 든 콩을 먹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꼬맹이였다. 아빠는 항상 콩은 아빠한테 골라내면 된다고 말했고 나는 열심히 콩을 골라 아빠 밥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래서 나는 젓가락질을 참 잘한다(?). 무튼 몸에 좋다는 그 콩을 먹일 방법으로는 콩자반과 콩나물, 두부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특히 콩자반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콩자반 양념에 비빈 밥과 고명처럼 발견되던 콩을.


집에서 엄마가 콩자반을 만든 날에는 달달한 조림간장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웠다. 나는 그 냄새가 참 좋았다. 그때 우리 집에는 소파가 없었고 나는 벽 한쪽에 매트와 커다란 베개로 만들어진 아늑한 놀이공간에서 자주 놀았는데 주방에서 분주한 엄마의 소리와 함께 다 된 밥솥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냄새와 간장냄새가 더해질 쯤이면 밖에서는 두부장수 아저씨가 딸랑딸랑 종 치는 소리가 났다. 기억 속에 아주 어렴풋이 남아있는 30년이 좀 못 된 기억이다.


엄마는 콩자반을 하고 나면 꼭 요리한 웍에 새밥을 담아 묻어있는 양념과 비벼 내게 먹였는데 내가 그 달달한 밥을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간장과 물엿이 만든 그 단순하고도 어린, 기분 좋은 맛은 지금 먹어도 다를 바가 없다.


결혼한 딸에게 엄마가 주는 밑반찬은 정해져 있다. 시금치 무침, 멸치볶음, 가끔 진미채와 가끔 어묵볶음과 그리고 내가 제일 기다리는 콩자반. 껍질이 쪼글쪼글해지도록 충분히 졸여진 콩자반은 망설임 없이 수저로 떠 밥에 얹어먹어도 물론 맛있다. 하지만 내가 제일 기다리는 순간은 따로 있는데, 졸여진 콩을 거의 다 먹고 한두 수저로 끝날만한 양이 남았을 때. 그때 반찬통 바닥에는 자작한 콩자반 양념이 낙낙하게 남아 있다. 나는 갓 지은 뜨거운 밥을 반찬통에 그대로 넣고 비비는데 그 순간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따뜻한 밥과 만난 콩자반 양념에서 살아난 달달하고 기분 좋은 냄새. 아무리 편식하는 아이라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냄새. 검은 양념이 고루 묻어 촉촉하게 윤기 나는 밥을 한입 가득 넣고 씹으면 그게 내 소울푸드고, 그게 내 5층짜리 주공아파트 단지에 살던 다섯 살의 기억이다.


남편은 콩자반 밥을 먹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남은 콩자반의 양을 살피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게 그렇게 맛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도 졸인 콩을 열심히 먹어주며 자신이 콩자반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기여해 줬다는 사실에 혼자 뿌듯해한다. 내가 오늘 콩 많이 먹어줬어, 내일은 콩자반 밥 먹을 수 있겠다, 하면서. 콩자반 밥은 사실 사진 찍기에도 영 초라하고 누구한테 먹는다고 자랑하기에도 마땅치 않지만 그건 나만 아는 작은 행복 같은 거다. 월요일에 사둔 로또가 토요일을 기다리게 만들듯이 반찬통 가득 찬 콩자반은 그 마지막의 나만 아는 작은 피날레를 기대하게 만든다.


참, 콩자반 밥을 먹을 때 주의사항이 있는데 그건 아무 반찬도 없이 딱 콩자반 밥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콩자반 양념은 사실 은근히 짭짤하고 그 단맛은 은은하고 향긋해서 다른 반찬이 끼어드는 순간 콩자반 밥의 진짜 맛은 금세 자취를 감쳐버릴지도 모른다. 밖에서 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콩자반 밥이라고 대답할 수 없지만(그랬다간 아주 사연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 사실 내 마음속 최애 음식은 콩자반 밥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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