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31
대학교 때, 부전공 수업을 들으려면 서울 캠퍼스를 가야 했다. 캠퍼스는 충정로역과 서대문역 사이에 있었고, 오전 수업만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수업이 끝나면 내 길고 긴 산책이 시작되곤 했다. 나는 서대문역에서 시작해 경희궁을 지나 광화문에서 교보문고를 구경하고 보신각을 지나 을지로와 종로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다 지치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어폰을 끼고 오래오래 걷는 걸 좋아했다. 산책 중에 누군가 뭐 하냐고 연락이 오면 그냥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십 대 초반은 그래도 되는 나이였다. 학교 외엔 별 약속이 없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라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써야 했는데,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상상으로 그려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뭘 하고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떨 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볼 수 있는 최대한 많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붙은 많은 글자들을 읽었고 모르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면서 아무 전철역 근처에 내렸다. 점심에 수업이 끝나도 집에는 초저녁에 들어갔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시간낭비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주 많은 걸 충전했다. 지금의 나를 채우고 있는 건 대부분 고등학교 때 매일같이 들었던 라디오와 대학교 때 일주일에 두 권씩 읽던 책, 그렇게 목적 없이 걸으며 보았던 한낮의 풍경들로 이루어진다. 모두 다른 사정과 표정을 가진 사람들을 품은 채 어두워지는 하늘, 사사로운 싸움과 대화, 몇 백 년의 시간을 안고 그 시간을 배경 삼아 머무르는 서울의 아주 오래된 궁과 능.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을 한 겹의 유리막 뒤에서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요즘도 아주 가끔이지만 혼자 산책을 나와 걸을 때가 있다. 보통 집 근처에서 물길을 따라 걷는다. 산책 나온 강아지나 길고양이를 구경하고 그때그때 철마다 들판에 흩어진 꽃이나 풀을 보고, 새로 문 연 가게를 구경하고 문 닫는 가게를 본다. 편의점에나 마트에 들어가 새로 나온 맛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꽃가게를 지나며 꽃송이와 화분을 구경한다. 그렇게 세상을 보고 다니면 나는 채워진 느낌이 든다. 조금 걷는 것으로 채워지는 사람이라면 제법 연비가 좋다고 느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목적 없고 이유 없는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해야 할 일들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아마 앞으로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의 아주 많은 것들을 구경시켜주고 싶다. 그 여린 마음을 책임이 가득 채우기 전에, 해야 할 것이 하나라도 적을 때. 그리고 나도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