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51
나는 내가 기록해 둔 흔적이 남은 것들은 잘 버리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게 다 써버린 노트다. 전 회사에서 모서리가 닳고 닳게 썼던 다이어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할 때 까맣게 필기했던 공책, 학생 때 노래 가사를 받아 적었던 스프링노트까지.
나는 지금까지 3번의 퇴사를 했고, 그때마다 촉촉한 감성으로 반복했던 일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썼던 메모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것이다. 나는 일할 때 꼭 한권의 노트와 세워 쓰는 위클리 플래너만을 쓰고, 그날 출근하면 노트의 시작 부분에 그날 날짜를 쓴다. 회의실에 들어가서도 날짜부터 적는다. 노트가 여러 권이 되면 메모를 어디 적었는지 찾기 힘들어서였다. 나는 무의식 중에 메모를 많이 하는데 그렇다고 분류를 잘하지도 못하는 편이라 그랬다. 그러다 보면 그 노트를 쭉 훑어보다 내 회사생활이 다 그려진다.
입사 첫날엔 점심시간이나 사업자등록번호, 회사 전화번호 같은 게 적혀있다. 회의 일정이나 계정 정보 같은 것도 있다. 본격적인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제법 고민이 가득한 노트가 되고, 회의시간에 뭘 열심히 적게 된다. 내가 시도해 봤던 것들과 제법 신이 난 채로 진행했던 프로젝트, 작고 따뜻한 다른 이들의 메모도 섞여있다. 생각 없이 했던 낙서가 꽤 마음에 들 때도 있었다. 그걸 보면 그 기간 동안의 내 삶이 보여서 난 그 노트를 쉬이 버릴 수가 없다. 줄공책이지만 줄에 맞추어 쓰지 않고, 정돈되지 않고 분류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인 노트라서 그때 나의 전부가 담겨 있다.
날것 그대로의 기록은 너무 솔직하고 허심탄회하다. 그때 나는 이런 것들을 좇고 이런 일들에 도전했다는, 세상에 그게 전부였던 기록들은 꼭 내가 그렇게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존재 같았다. 월급이 얼마 안 되더라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어도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고민했전 날들이 아주 소용없는 몇 년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안심이다.
노트는 쌓여만 간다. 앞으로는 또 어떤 노트를 쓰고 어떤 페이지에 머물렀다가 다음장의 첫 줄엔 또 어떤 메모를 적고 있을지. 새삼스레 새 노트를 펼치고 싶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