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네 살, 이 시기에 누구나 겪는 육아 난제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가 네다섯 살이 되면 아이와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네다섯이 되는 시기에 자율성과 주도성이라는 과제를 획득해야 한다. 뭐든지 스스로 하려 들고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다. 건강하게 크고 있는 증거이지만 그에 따른 감정 조절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민주주의적 부모가 될 거야!”
하지만 민주주의적 부모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가 클수록 선택권을 줘야 하는 상황이 늘었다. 사실 아이가 두세 살 이전에는 모든 주도권을 부모가 가지고 있어서 아이 키우기 편했다. 아이와 어르고 달래기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가 자의식이 자라고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하나둘 주도권을 줘야 하는 상황에 지켜보고 기다려야 했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아이 입장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타협과 협상을 해야 했다. 성격 급하고 통제 욕구가 강한 나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 양치질시키는 것이 어렵다. 밥을 먹고 양치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아이들은 관심 없다. 분명 어린이집에서는 양치질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것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집과 어린이집은 뭐가 다른 걸까. 벌써부터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질 때인가 싶어 얄밉다.
몇 번 쓱쓱 닦아내고 치약 거품을 뱉어버리는 아들. 깨끗하게 양치질하면 좋겠는데 그냥 장난치는 것 같다. 출근길에 아이 유치원까지 데려다줘야 해서 심난하다. 정작 양치질하는 시간보다 시키기까지가 오래 걸린다. 칫솔을 입에 물고 이리저리 다닌다. 양치질하다 말고 칫솔을 아무 데나 놓는데 하루에도 몇 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아들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듯 화를 돋운다.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뒷감당이 더 힘들다. 아이들은 자기가 잘못한 행동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단지 혼낸 것에 서운해하고 되레 화낸다. 더 큰 어깃장과 감정 소모만 있을 뿐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 아니었다. 숨을 고르면서 아이를 기다려 주는 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게 아니면 차라리 그 자리를 잠시 피하고 실수해도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화를 내고 혼낸다고 해서 아이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더라. 심호흡을 하자. 숨을 고르면서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된다. 아들에게 퍼붓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꾹꾹 눌러 담는다. 최대한 아이에게 맞는 표현으로 순화하려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문다. 분노의 감정이 아들을 향하지 않도록 참을 인을 세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감정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잊는다. 아이들에게 실수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은 머리로 이해하지만 실천하기 참 어려운 것 같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 필요 없는데 말이다. 솔직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들의 등짝을 때리고 칫솔을 당장이라도 빼앗아 대신 닦아주고 싶은 심정지만 돌아오지 못할 강은 건너고 싶지 않아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