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내향적인 당신에게 ‘여기 내가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의 제 이미지는 ‘변덕쟁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굉장히 빨리 무엇엔가 질리는 아이의 이미지로 낙인찍혀 있었지요. 특히 부모님의 눈에는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관심사와 직업의 전환에 꽤 극단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배드민턴 선수로 5년 정도 활동하다 슬럼프가 와서 그만뒀고, 고등학교는 이과를 나왔는데 대학은 일본 방송예술학부를 갔고, 생각보다 예술학부가 안 맞는다 느꼈는지 돌아와서 미디어학부에 들어가 디자인, 3D, 사회학, 컴퓨터 게임, 이것저것 건드리다 3학년 교환 학생 때는 미국에서 영화 수업을 듣고 오더니 돌아와서는 갑자기 HTML 프런트엔드 개발자로 취업해, S 모 기업에서 2년 정도 다니다 갑자기 영화 연출을 하겠다고 퇴사를 질러놓고, 독립 장편 영화 스탭 한 번 해보고 영화 업계는 아닌 거 같다며 갑자기 잡지 회사에 취직해 영상 편집을 하다, 지금은 광고도 만들고 글도 쓰고 때때로 사진도 찍는, 별 걸 다 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왔지만, 취미에 있어서도 꽤나 관심사가 문어발인 편입니다.
외국어 배우기에 심취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배웠고, 지금은 스페인어를 (시작한 지 2 개월째이지만 도통 늘지 않는군요) 배우고 있습니다. 나름 MBTI -J형의 면모가 여기서도 발휘되는데요. 통틀어 10개 국어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제 외국어 공부의 인생 목표입니다.
저에게는 남자 조카가 둘이 있는데요. 조카들이 점점 자라는 걸 보다 보니 그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도움이 되는 이모가 되고 싶어 재작년 겨울부터 보육교사 공부를 해왔습니다.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와 개인 과외도 할 수 있었고요. 이것저것 끄적거리고 만들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광고 제작, 상세페이지 제작, 때때로 주변인들의 비문학 글을 첨삭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저의 관심사의 다양함에 비해 한 영역에서의 전문성이 뒤떨어지는 것이 항상 고민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 십 년 후 미래를 그릴 때마다 곤란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제 완벽한 하루의 일과는 어떤 특정한 ‘한 개의 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조직 내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만 살고 싶은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크리에이터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매니저로서도 십 년 후를 그리고 있고, 저의 ‘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그것들이 적당한 비율로 나누어져 제 하루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허황된 생각일까요?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 meet me’의 뉴스 레터에서 타고난 기질에 대해 다룬 글을 보고 저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대학의 클로닌저 박사에 의하면 사람의 ‘인성’은 타고난 ‘기질’과 기질을 바탕으로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성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질 중 하나가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내가 살아오는 내내 나의 이 변덕스러운 성향에 곤란해하고 한창 질려서 떠났다가 다시 그 관심사로 고개를 돌리는 (마치 요즘 내가 SQL을 배우려고 개발 지식에 기웃거리는 것처럼) 나의 성향이 고치기가 어렵다는 게 사실이라면, 자꾸 이 기질을 억누르려고 할 게 아니라 이 ‘자극 추구 성향’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나의 일을 만들어 가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에밀리 와프닉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책, 처음이 아닙니다. 분명 이 책 표지가 참 익숙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책을 몇 년 만에 다시 우연한 기회로 찾아 읽게 된 나, 오랜 관심은 결국 한 곳으로 회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산 책이 아니라 빌린 책이었으니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도서관 대출 이력을 보는데도 최근 3년 안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 ‘꿈이 너무 많은 것’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까요?)
“이 책은 하나의 집중 대상을 선택하고 나머지 다른 관심사들은 포기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아울러 새로운 것을 배우고 창조하며 여러 정체성 사이를 오고 가는 데서 기쁨을 찾는, 별난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미 답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산성’에 목메는 이유 또한 알 것 같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지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항상 시간에 쫓겼거든요.
다능인 : 관심사와 창의적인 활동 분야가 많은 사람
‘다능인’이라고 해서 모든 분야에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는 폴리매스(polymath), 르네상스형 인간(renaissance person) 등 다양한 다른 단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다능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 에밀리 와프닉은 “흥미로운 일을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며 그 과정에서 얻은 많은 기술들이 다른 맥락에서 내게 도움이 되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본인이 음악, 미술/디자인, 영화, 그리고 법 공부를 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의 다양한 관심사가 어디로 향하는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일견 누군가가 보면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 있습니다. 에밀리 와프닉이 정의 해준 (어쩌면 이미 있던 용어지만 어둠 속에 묻혀있던 단어를 발굴해준) 덕분에 더 이상 저를 '다른' 사람으로 정의하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소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책의 가장 첫 챕터의 제목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을 읽자마자 이 책은 반드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에는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다. 즉, 당신은 무언가를 뒤집어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세상을 당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더 좋게 만들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맹목적 위로와 공감만을 제시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능인 중에서도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직업적 형태가 무엇일지 고민해볼 수 있게, 크게 네 가지 형태의 직업 형식을 제안합니다.
(1) 그룹 허그 접근법 :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완전히 (혹은 근접하게) 반영해주길 바라는 사람에게 적합한 모델. 일 하면서 여러 가지 분야를 넘나들며 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 슬래시 접근법 : 정기적으로 오고 갈 수 있는 두 개 이상의 파트타임 일이나 사업을 한다.
(3) 아인슈타인 접근법 : 생계를 완전히 지원하는 풀타임 일이나 사업을 하되, 부업으로 다른 열정을 추구할 만한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4) 피닉스 접근법 : 단일 분야에서 몇 달 혹은 몇 년간 일한 후, 방향을 바꿔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직업 형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직업 예시는 책 본문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제가 속한 커뮤니티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으로서도 활동하고 싶고, 또 다양한 형태로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동시다발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욕심이 큰 바람이긴 하지만, 슬래시 접근법과 같이 파트타임 형태로 해나간다면, 또 그게 가능하도록 환경만 조성해둔다면 오히려 지금 하나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저 다운 모습으로 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2020년 겨울에 갑자기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 한동안 작은 회사의 일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도우며, 초등학생 남자아이 과외 병행 + 이직 준비와 보육교사 수업을 같이 진행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약 6~7개월 정도 그렇게 지낸 것 같은데요.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라는 불안감 때문에 조금 힘든 점도 있었지만, 두 개의 일을 동시에 한 덕에 수입은 실제로 그만두기 전 회사만큼 만들 수 있었고, 10시 출근 7시 퇴근으로 출퇴근할 때보다 개인 시간도 훨씬 많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여가시간도 더 즐기게 되고 여가 시간이 더 생기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가 저의 직장 경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제 인생 경력에서는 꽤 큰 의미였던 시기 같아요.
앞으로 제가 생각하는 제 미래의 직업 형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여전히 두렵고 불안한 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게 나에게 더 행복한 형태의 일이 될 것이냐고 스스로 묻는다면 분명 다양한 배움이 공존하는 ‘다능인’으로서 일의 형태를 선택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능인들이 겪는 고질병에 대처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줍니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을 때의 수치심, 죄책감을 극복하는 법, 또다시 초보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 최고가 아니라는 두려움 등 관심사가 다양하고 끊임없이 배워야만 정체성을 찾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부정적 감정들을 다루는 방법을 안내해 줍니다.
이 중에 저는 ‘일기 쓰기’가 저에게 제일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진화학적으로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더욱 인지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내가 잊었던 작은 승리들을 추적하기 위해 일기를 쓰라고 합니다. 나의 공식 ‘작은 승리 일기’가 될 수 있도록요. 그래서 2022 새해부터는 아침에 쓰는 미라클 저널을 한쪽에서 한 장으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일기를 쓸 수 있도록요.
당장에 쉽게 부정적인 사고로 치우치는 성향을 낙관주의자처럼 손바닥 뒤집 듯이 바꿀 수는 없겠지만, 하루하루 배운 일들에 대한 기록과 한 일들에 대한 소회들을 잊지 않고 기록해둠으로써 한 달 뒤, 1년 뒤 분명 잊어버릴 수 있는 작은 승리 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그래도 나 지금 잘하고 있고, 꽤 잘 해왔다는, 나를 토닥이는 귀중한 처방약으로서 지켜나갈 예정입니다.
다능인으로서의 삶을 인정하고 이런 저의 미래를 긍정하는 것부터가 매일 설레며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첫 단계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른 자고 내일 일하기 위해 일어나야겠어요! 내일은 또 어떤 재미난 일이 생길까 기대가 됩니다. 조미료가 많이 채워진 결말. Fake it until you make it.
상반기에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올 하반기 즈음부터는 제가 직접 운영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커뮤니티를 개설할 계획입니다. 일본 광고 대행사 덴츠팀의 사이드 프로젝트 팀 덴츠 B 팀의 <당신의 B면은 무엇인가요> 책에서 영감을 받은 프로젝트 커뮤니티가 될 예정인데요. 본업을 더욱 멋지게 해내기 위한 사이드 프로젝트 팀을 구성해 프로젝트 팀을 운영해보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격려와 지지 부탁드립니다.
오늘 글의 마무리는 왠지 이 작품으로 하고 싶어요.
남들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에 외롭고 힘들었던 모든 분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30분짜리 풀버전도 유튜브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