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가 현재의 너에게 하고픈 이야기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특히 좋은 감정이 들 때는 상대에게 바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이것도 예전부터 잘 되었던 건 아니고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경험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경험에 의한 저만의 약속? 이랄까요.
더 어렸을 때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 떨리고 쑥스러워서, 또 거절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담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를 들어가기 위해 방정리를 했을 때 발견한 서랍 속 편지 뭉치를 보고 저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편지'라는 건,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또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 정제된 형태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고 나서 카톡처럼 실시간으로 감정을 공유하는 게 편해진 지금은 편지라는 것을 전만큼 많이 안 쓰게 되었지만 오롯이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손으로 꾹꾹 눌러 적은 제 마음을 받게 될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것이, 가끔은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 된답니다.
최근에 글쓰기 모임에서 ‘편지 쓰기’를 했어요. 조금 독특했던 건, ‘과거의 여행지에서 현재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콘셉트이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금 나는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글을 적어 내려 갔습니다.
OO아, 안녕!
몇 년이 흐르고 나면 분명 내가 느낀 것들을 거의 다 까먹을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로 기록으로 남기려 해. 이 기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너와 나, 그리고 그때의 우리들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지금 시부야 외곽 한 민박집에 머물고 있어.
호텔스닷컴인지 에어비앤비인지 어디서 예약했는지도 까먹은 데다가 왜 하필 다른 동네도 아니고 인파로 넘쳐나는 시부야역 인근에 숙소를 잡아뒀는지 나조차도 살짝 오리무중 해. 아마 혼자 묵기에 안전하고 저렴한 숙소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겠지?
아, 이번 여행의 목적은 ‘힐링’이야!
보통 힐링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여행을 할까?
나는 혼자서 버스 타고 훌쩍 떠나듯 가볍게 내 추억이 쌓인 공간을 산책하는 게 힐링 여행 같아. 추억이란 게 꼭 후회가 담긴 공간과 시간에 더 애틋함을 갖게 되더라.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래도 공간만큼은 대체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잖아. 그래서 공간에 대한 추억은 내가 그곳으로 발길 하면 어느 정도 보상? 을 받는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 같아.
‘다음엔 더 잘해야지’하고 마음먹으면서도 결국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려 아쉬움만 남긴 공간들이 몇 군데 있는데, 도쿄가 나에겐 그런 곳이야.
‘뷔도 프랑스의 그 빵도 먹어봤어야 하는데!’, ‘쯔케멘을 더 자주 먹었어야 했는데!’, 그때 나한테 고백했던 걔랑 만났어야 했는데!’, ‘어리석게 집에 박혀있지 말고 학교를 더 꾸준히 나갔어야 했는데!’ 등등,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했어야 하는데’가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
이렇게 미련과 후회가 많은 공간을 나는 왜 다시 찾게 된 걸까?
여기 와 있는 동안 시모마루코(下丸子)에 다녀왔어. 내가 살았던 빌라 앞에도 가보고, 우리가 종종 산책하던 타마가와 하천 주변도 거닐어보고,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편의점 건물도 가봤다?
살던 동네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정말 고요했어. 하천도 이전과 같이 타마가와선 전철 밑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달라진 건 편의점이었는데, 이후로 장사가 잘 안 된 건지 다른 사무실 같은 곳으로 바뀌어 있더라. 여기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참 착하고 점장님도 진짜 좋았는데. 그래서 학교는 안 가도 알바는 갔더랬지, 하하.
아 맞다. 우리 같이 살았던 이케부쿠로도 갔었어! 동네 그대로더라. 그런데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동네가 굉장히 좁고, 풀들로 건물이 둘러싸여 있어서 집을 찾는 데 조금 애를 먹었어. 분명 살던 당시에는 좀 더 역에서 가깝고 찾기도 쉬운 집이었던 거 같은데 말이야.
이케부쿠로에 대한 추억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역에서 살던 동네까지 가는 길에 꼭 그 아이 생각을 하곤 했어. 오늘도 그랬고. 그 아이가 자주 나를 집에 바래다줬던 기억. 그러고 보면 그 친구 집은 서울로 치자면 남양주? 철원? 암튼 도쿄에서도 전철을 타고 위쪽으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을 더 가야 하는 ‘치바’라는 곳이었는데, 무슨 열정으로 그렇게 매번 나를 바래다줬는지 몰라.
끝이 너무 안 좋아서 결국에 ‘똥차’ 스티커를 붙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그 길을 걸을 때 그 친구를 떠올린 걸 보면 생각보다 그 당시에 그 친구로부터 얻은 위로가 좀 큰가 봐. 만날 때 잘해줄 걸 (최선을 다할 걸) 그랬나? 싶고.
암튼 우리가 스무 살 즈음에 누렸던 일상들을 지금 다시 한번 되짚어 걸으며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담아보고 있어. ‘추억’이라는 걸 오감의 영역으로 다시 소환하는 이 의식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한다면, 크게 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
하나는 '현실 자각'. 막상 경험해보면 내가 기억했던 것만큼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 예를 들면, 정말 맛있게 먹었던 맛집에 가서 다시 먹어보니 생각만큼 대단한 맛이 아니었다든지, 아름답게 기억하던 동네 공원이 그저 그렇고 그런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곳이라든지.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잊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앞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더 잘 기록해야지 하는, '설렘'이랄까? 또 빵 이야기지만 우리 다이어트할 때 한 번씩 가던 그 타르트 집! 을 이번에 지나쳤거든. 한 달에 한 번 먹는 치팅데이 보상 그런 거였는데, 진짜 그땐 목 빠지게 그날만을 기다렸던 거 같아. 이 기억도 이번 여행 때 우연히 그 가게 앞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네가 궁금해할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렇지? 하하. 너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넹.
잘 지내고 있지? 우리의 15년 전이 그립다! 그리고 지금의 너도 그리워!
이번 여행은, 공간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시간을 추억했다면, 다음엔 너가 있는 부산으로 가서 너와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더 열심히 기억해야겠다. 벌써 생각만 해도 신난다.
그리고 내 장소로 돌아오게 되면 추억의 서랍에 너와 함께한 기억들을 고이고이 넣어야지!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다시 꺼내보는 설렘을 경험하기 위해 말이야!
곧 만나자! 사랑해!
-시부야 숙소에서 미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