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 기쁨에 눈물 흘리고 싶어
저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눈치를 많이 보게 된 성격이 된 것도 '사랑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을 바랐던 집안에서 딸 넷에 막내로 자란다는 것은 집 안에서 나라는 존재 자체를 책의 '부록'의 개념으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문득 위기를 느끼거나 하면 어머니에게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곳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 관계는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했어요. 내가 그 친구에게, 그 친구가 나에게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래서인지 정말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새로운 학급에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거나 하면 과한 질투심을 느끼고 심지어 그 친구를 마음속으로 많이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어갈수록 부담을 느낀 친구는 저를 떠나갔고, 때로는 제 의존적인 모습에 힘들었는지 일부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지요.
많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마 중2 때쯤이었을 거예요. 결속력이 강한 운동선수 팀원에서 평범하게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길을 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운 좋게도 한 무리가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목사님 딸이었던 한 아이는 저의 어떤 모습에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배려해준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하루는 학교가 끝나고 교실 어디에도 친구들 무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은 시골 시내에서 중학생 친구들이 갈 곳은 뻔했기에 저는 그 친구들이 사내 한 문구점 안에 있는 모습을 유리 너머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떼놓고 시내에 놀러 나간 친구들에게 섭섭함을 진지하게 토로한다는 건 스스로를 정말 소심한 아이로 만드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날 이후 저는 변했습니다. 아니 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기 전에 의도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받을 상처를 걱정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어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오랜 기간 먼발치서 지켜보기도 했고요. 그렇게 새로운 인간관계라는 건 저에게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더 내 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감정은 흔히 말하듯 무 자르듯 잘라지지 않는가 봅니다. 소중히 여기던 누군가와 한순간에 절교를 하기도 하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소홀히 여겼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정서적으로 큰 지지를 해주는 일들을 거듭하면서 '관계란 예측 가능함 속에 예측 불가능함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건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믿어왔던(믿고 싶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등을 돌리던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인생이 이미 망해버린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절망의 시기를 걷고 있을 때에도 의외의 인물로부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어요. 나만 겪는 것 같고 내가 제일 불행한 것 같다가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그냥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이 될 때가 있잖아요.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관계라는 것을 무엇일까요. 인간에게 상처받고 인간에게 위로받는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관계에 대한 명저를 남기신 카네기 할아버지는 이 답을 알고 돌아가셨을까요? 이제 곧 삼십 후반의 인생을 맞이하는 저로서는 아직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답을 얻을 수는 있을까요? 행복한 관계라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오늘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맵니다.
관계는 어렵고 저는 또 상처를 받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또 새로운 인연을 꿈꾸고 싶습니다. 아직 얻지 못한 답의 힌트를 찾기 위해서요. 내 이 질문으로 넘치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줄 사람이 아직 더 있을까요? 누군가는 나의 이 끊임없는 질문에 학을 떼고 도망가 버리면 어쩌지요?
새로 시작한 책 모임에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언제 주로 글을 쓰냐는 발제자의 물음에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불행할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비슷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가 골똘히 천장을 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약속한 글을 제외하고는 요즘 도통 글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와의 약속, 또 모임원들과의 약속 덕분에 인스타그램에 어제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쓰고, 일요일 글 모임을 위해 주 1회 에세이를 쓰는 것 말고는 글을 쓰지 않네요.
그런가요. 저 요즘 많이 행복한 가봅니다. 불행한 일이 행복한 일 보다 9 배는 더 잘 머릿속에 남는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행복한 순간은 활자로 꾹꾹 눌러 담지 않으면 금세 휘발되어 버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2주 간 적었던 ‘어제 일기’를 열어 보았어요.
올해 들어 새로 맡게 된 일에 대한 작은 성취감, 그리고 좋았던 영화와 책에 대한 이야기 또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동생, 친구와의 시간, 이별하는 동료로부터 받은 깜짝 선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힌 2주간의 기록.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 행복해서 글을 쓸 마음이 안 들었었나 봐요. 사람에게 상처받을까 봐 거리 두며 지내는 방법을 택한 저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위로받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기쁨을 얻는, 저는 ‘사람’인가 봅니다.
‘예민하지만 자극이 필요하다’는 타이틀은 사실 여러 의미로 쉽게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을 겪기 위해 도전한다는, 아이러니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어쩌면 점점 더 저는 덜 예민해져가고 있고, 또 상처받을 일보다 사랑받는 일이 더 많다고 느끼는 요즘은 굳이 나의 예민함을 내세워 ‘이런 일을 겪었고, 저런 일을 겪었어요’라고 핑계 댈 필요가 없어진 걸지도요.
우정의 힘을 믿습니다.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믿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정해둔 행복의 울타리 안에서 무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루를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렇게 우정의 힘을 믿게 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어떤 상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겨낼 거라고 믿어요. 상처받을 각오가 되어있는 걸까요?
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 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더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때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따스한 우정의 침대 안에 내 사고(思考)를 맡겨 버리고,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어져서 마음은 이내 누그러진다. 괴로움에 울던 나는 우정이라는 기적에 의해 강력해져 무적이 된다. 동시에 모든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마르셀 푸르스트,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