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지만 자극은 필요하니까, 외국어

새로운 것에 목마른 사람을 위한 쉽고 빠른 처방전

by 김바리


"좋아요, 뭐든지 좋을 대로 가져가요"하고 장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값을 "뭉텅뭉텅" 깎아주는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132p


"뭉텅뭉텅"


ばっさりばっさり(と).


잇따라 제법 크게 잘리거나 끊어지는 모양. ‘뭉떵뭉떵’보다 거센 느낌을 준다.


평소에 잘 들어보지 않은 단어, 그리고 그 단어가 외국 작가의 글에서 발견되면 잠시 눈알을 굴리며 ‘원래 언어로 쓰면 어떤 단어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독서의 흐름이 끊기곤 하는데, 이때의 느낌은 무언가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가 그 사이 알림 온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원래 뭘 하려고 했는지 잠시 멍하니 생각하게 되는,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


오늘은 이렇게 조금은 비선형적이고 주의 산만한, 나의 세 번째 뇌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두 번째 뇌에 대해서는 언젠가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이야기해보기로).


요즘은 저녁에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스페인어 기초를 공부하고 있다. 기간으로 따지면 작년 12월부터 조금씩 시작했으니 엄연히 3개월 차에 접어든 셈인데 딱 프랑스어 처음 공부했을 때 헤매는 만큼 헤매고 있는 중이다. 의도(목표)를 가지고 전략적으로 공부를 해야 확 늘 텐데 그렇질 않으니 제자리걸음인 듯하다(알면 개선을 합니다).


외국어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고3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과생이었고, 제2외국어는 중국어였던 내가 일본 문화에 심취해 기숙사 컴퓨터로 다음 카페에 올라오는 일본 예능을 눈이 빨개질 때까지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일본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 갔다.


(인생 흑역사 중략)


신기한 일이 생겼다. 한국에 돌아와 다른 친구들보다 느지막이 대학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는데, 언어영역과 외국어 영역이 갑자기 1등급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수험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유형 공부도 하고 문법 공부, 연습 문제도 풀었었지만 아무리 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부 시간에 비해 특히 이 두 영역의 점수가 잘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덕분에 당시 소위 ‘OO전형’이라 불리는 전형으로 원하는 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히려 좋아)


이후로 일본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거쳐 지금 나는 스페인어로서 한국어 포함 6 개째 국어를 도전하고 있다.


왜 나는 언어 공부를 좋아하게 된 걸까?


첫째는 ‘확실한 보상’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 다른 과목에 비해 언어 공부는 공부하는 만큼, 아니 때때로 공부했던 것보다 점수가 잘 나오는 과목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학습법을 탐구하고, 외국어적 사고를 몸에 익힘으로써 그 시스템을 다른 언어를 학습할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임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외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일이 년마다 외국어 자격증을 갱신한다. 새로 얻은 점수를 보며 사회생활 이후에 좀처럼 얻기 어려운 학습을 통한 성취감을 얻는다.


둘째는 ‘세상과 나와의 놀이’이다. 길을 걷다가 동행하는 사람은 모르는데 나는 알아채는 언어로 된 한국어 간판을 발견한다든지, 맘에 드는 책을 골라보니 출판사 이름이 불어에서 가져온 이름(’ 클레 마지크: 마술의 열쇠’)이라든지, 정통 일본 요리점에 가서 메뉴를 보는데 다들 모르는 재료의 이름을 알아차린다든지, 이런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경험들이 나에게는 놀이와 같다. 잘 모르는 단어를 마주쳤을 때 사전을 찾아본 뒤 눈에 보이는 대상과 개념을 매치시켜 ‘아하!’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런 찰나의 순간이 나에게는 세상을 놀이터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장치들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덕질의 촉매제’ 로서 언어 공부이다. 일본 배우 스다 마사키가 진행하는 올나잇 일본이라는 심야 라디오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무료한 집콕 생활에 한줄기 빛이 되어준 존재이다. 만일 내가 일본어를 몰랐다면 누군가가 편집해준 마사키의 근황만을 접하고 해석된 콘텐츠만을 소비했을 것이다. 고군분투 중이지만 감명 깊게 본 드라마 <노멀 피플>을 원서로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작가 샐리 루니를 덕질하는 데 물리적으로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닿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런 외국어 공부 여정에도 난항이 있긴 한데, 그것이 바로 이 덕질에서 비롯된 공부 때문이다. 영화나 책, 음악 등으로 익숙한 문화권의 언어는 공부하는 데도 재밌고 실력도 금세 성장하는 듯한데 문화 덕질을 잘 못 하고 있는 중국어나 스페인어는 확연히 실력이 제자리라는 것이다. 올 상반기 동안에는 스페인어 공부를 계속하게 될 텐데, 어떤 장치로 언어 공부에 덕력을 불어넣어야 할지 고민인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좋아서 러시아어, 와인이 좋아서 이태리어도 배우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그 나라의 이것이 좋으니 그 나라 언어를 배울래!’라는 사고가 굉장히 일차원적이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나에게 ‘조건 없는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내 정체성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 번째 뇌인 것을. 앞으로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 외국어를 냠냠 씹어 먹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어야. 제발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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