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회생활
다음날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면 종종 약간의 회피성 자기 파괴 욕구가 생기는데, 이 날 역시 굉장히 늦은 귀가 후 다음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얼른 침대로 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딴짓을 하다 오히려 더 늦게 잠들어버린, 그런 금요일 밤이었다. 그 중요한 일정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트레바리에서 진행하는 독서 모임이다.
독서 모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략 8년 전쯤 취준생 시절에 계속되는 인턴 낙방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쯤 작가와 책을 통해 1:1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당시 내가 속해있던 커뮤니티에서는 보드게임, 독서, 등산 등 다양한 소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임을 시작하기까지 허들이 그리 높진 않았다. 독서 모임은 세네 달 지속했던 것 같고 중간에 그만둔 이유는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가 없어서였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크게 공감받고 서로를 위로하며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소위 말하는 '딥토크'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모임에서 선정한 도서 중에는 <두 도시 이야기> 같은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야 더 즐길 수 있는 소설이나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처럼 자가진단 심리학 도서를 다루곤 했다. 나로서는 당장 일상의 처세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기대했었기 때문에 조금 아쉬웠던 면이 있었다(이때도 굉장히 성격이 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속한 모임만 그랬을지 몰라도 모임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의 다소 노골적인 태도들이 불편했기 때문에 도중에 그만둬 버렸던 이유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이번에 독서모임을 다시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실 나 또한 다소 노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사회인이 되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수록 새로운 사람을 마주칠 기회가 부쩍 줄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매번 만나던 사람만 만나게 되고, 하던 이야기만 하게 되는 마치 일상생활의 빅데이터 안에서 정해진 회로 안을 반복해서 오가는 부품이 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 스스로에게 도끼질을 하고 싶은 순간들이 오는데, 그나마 그중에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경험이 무엇인고 했을 때 나오는 몇 가지 대안 중에 하나가 바로 독서모임이다.
일단, 모임이라는 것이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고 독서라는 것이 책에 관심이 있고 굳이 사람들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적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며 책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니 크게 충돌하거나 불편할 여지도 줄어든다. 상대적으로 아무 매개가 없는 나와 당신 사이의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를 첫 만남에서부터 한다는 것은, 내 입장으로서는 민나시에 반바지를 입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엉덩이로 이름 쓰기 벌칙을 받는 것과 같은, 굉장히 불편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쑥스러운 일인 것이다.
책을 통해서라면 어렴풋하게나마 상대방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음, 이 사람은 나와 참 결이 맞군.’, ‘음, 이 사람은 정치적 성향이 조금 극단적인 걸?’등의 분석을 해낼 수 있어 참 편하다. 이것은 비단 독서 모임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영화 모임이나 체육 모임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심지어 모임 후에 뒤풀이 에서라면 좀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 서로의 예민한 지점을 건드리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독서모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독서모임의 장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에 비해 모임 경험이 길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나의 기질적인 면이 한 몫하는 것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책 읽는 것은 좋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 특히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에 꽤나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정말 ‘대단한’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움직여지지 않는 부분이 '모임'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나날이 만나는 사람의 수가 적어지고, 새로운 자극을 얻을 기회도 적어지다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의 ‘뭐’의 리스트 중 우선순위 8번째쯤에 독서모임이 있었고, 마침 트레바리에서 ‘기획자를 위한’ 독서 모임이 있다고 해서 덜컥 지원해버렸다.
모임 선택에 있어서도 나의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의 노골함이 드러나지 않게 궁리를 하였다. 사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는데 뭐 이런 것 까지 신경 쓰고 있나 싶겠지만은, 꽤나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나중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럴 걸, 저럴 걸’ 하는 생각 리스트에 사람을 못 얻었어도 모임으로 자기 계발이라도 얻을 걸 하며 후회하는 본인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에 선택한 최선책이기도 하다.
8년 만에 다시 시작한 5분 늦은 독서 첫 모임. 역시나 첫 만남은 이성이 되었든 동성이 되었든 떨리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모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고 사람들은 호의적 일지, 토론 내용은 어렵지 않을지 걱정이 많았는데, 트레바리에서 잘 마련해준 가이드 덕분에 자기소개부터 쉬는 시간 운용까지 세 시간의 시간이 불편하지 않게 쇼로록 흘러가 버렸다.
긴 평일 끝에 기대하는 주말은 침대 위에 누워 뒹굴거리는 상상만 하는 내가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유현준 교수의 <공간의 미래>라는 낯선 장르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영감' 때문이다. 업무를 하다 보면 주변 사람이나 매체를 통한 경험만으로는 다소 피상적이고 고정적이고 주관적인 판단만이 켜켜이 쌓여가는 것 같고 만드는 콘텐츠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들도 결국 사람에게 향하는 일인데 막상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도 잘 모르겠고 비슷한 분야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방향감각을 찾는지 궁금했다.
미술품 전시 홍보, IT 서비스, 출판, 컨설팅 등 다양한 분야의 기획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 세 시간. 모르는 브랜드 이름도 나왔고, 모르는 동네 이름도 나왔다. 이렇게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런 자극을 얻으려고 나는 집에서 미리 '사회화 배터리'를 충전한다. 그리고 영감을 얻기 위해 이번 주말도 배터리를 쓰러 나갈 것이다. (이 배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뭐라고 지어주면 좀 더 사랑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