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지만 자극은 필요하니까, 하루키

오래오래 많이 버시고 건강하세요, 햅삐벌쓰데이 투 유 앤 미

by 김바리

21년 11월호 특집이었나봅니다. 일본의 <BRUTUS>(브루타스)라는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무라카미 하루키 특별호가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습니다. 덕분에 최근 그의 모교인 게이오 대학에 그의 이름을 딴 세련된 도서관이 생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도서관 내부 계단에 서서 한쪽 벽에 살며시 기대어 책을 펼치고 서있는 아담한 중년의 남성, 무라카미 하루키가 잡지의 표지 모델입니다 (어쩌면 노년의 남성일지도 모릅니다. 1949년 생으로 올해로 72세니까요).


dddd.jpg 일본 잡지 <BRUTUS> 하루키 특집호 上 '읽다' 편 표지


지금 제 식탁 위에는 잡지 세 권이 놓여있습니다. 한 권은 두 권을 사러 갔다가 도저히 이끌림에 못 이겨 충동구매해버린 클래식 특집호 (물론 이것도 브루타스의 잡지입니다만), 그리고 나머지 두 권은 하루키 특집의 월간지 상, 하권.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걸까요. 보통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밥 먹을 때 이런 말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는 지금 하루키의 잡지 두 권을 내려다보며 (감히)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엄청 불타는 사랑이라기보다 차츰차츰 스며들어 익숙한 애정이 되는 그런 우정 같은 사랑을 아시나요. 저에게 하루키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처음 시작은 분명 대학 시절, 도서관 사서로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반납한 책의 제목을 눈여겨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읽지도 않았는데 보고 들은 게 많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일본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기억에 남는 경험이라면 신입시절 받았던 부장님의 생일 축하 메일입니다. 팀원의 생일마다 그 팀원과 생일이 같은 유명인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서는 유명인과 같은 날에 태어남을 축하해주시던 부장님은 제 생일 첫 줄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생일이 같은 바리 씨,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에 내용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유독 이 문장이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 추후 그의 존재(부장님이 아니라 하루키)가 제 인생에 있어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을 암시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재밌게 읽었던 에세이의 작가, 소설가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그들이 종종 하루키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동시성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하고 의미부여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다루기엔 '하루키'라는 이름은 사실 '김해에 가면 가야밀면이지'와 같은, 소설가와 에세이스트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대중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임에 분명합니다(일본 작가 하면 하루키지 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1월 12일 생에 MBTI는 INFJ (추정)이며, 별자리는 염소자리에 (당연한 것) A형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저와 꽤나 인연이 깊은 게 아닐까요?(어떻게든 엮고픈 마음)


불꽃 튀는 정열의 사랑이 아닌, 구매한 지 이틀째가 된 손난로와 같은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로 유지 중인 이 사랑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문득 그분의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걱정의 말풍선은 대충 이런 문장이지요. '벌써 72살이시면, 앞으로 몇 편이나 더 에세이를 내주실까?', '아직도 매일 달리시고 수영을 하시려나? 건강에 갑자기 무리가 오는 건 아닐까?'와 같은 식이죠. 써놓고 보니 정말 그의 건강을 염려하기보다’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해 그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에 관한 지극히 이기적인 걱정 같아서 조금 민망한 마음이 듭니다만.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빠르고 강한 유대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든, 현실세계에서든 누군가를 만나 취향 이야기를 하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호감도가 급속도로 빠르게 올라가거든요. 괜히 속으로 '이 사람은 인생을 좀 아는군.' 식의 판단을 내리며,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달까요. 딱히 저와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우연히 낯선 사람의 피드를 구경하다가 하루키의 작품을 담은 사진을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댓글로 주접을 떨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맹목적인 친밀감을 불러오는 치트키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이게 분명 장점이 맞겠지요?)


또 다른 장점은 마음이 건강하지 않을 때 어디서든 하루키로 긴급 처방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국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덕택에 중고서점이든 교보문고든 일단 들어가서 검색만 하면 어딘가엔 하나쯤은 그의 에세이가 반드시 꽂혀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된 데에는 물론 다른 작가들에 비해 다작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덕분에 조금만 걸어가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잠시 이동하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행운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때때로 급하게 다른 세계로 도망치고 싶을 때, 아무래도 온라인 세계도 아닌 하루키의 세계로 떠나고 싶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 그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되는 부분입니다.


C06CA69F-FAB6-4519-A40A-DA012BDA2CE4.jpg 알라딘에 가도 항상 있는 하루키의 책


한 번은 훌쩍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유명한 밀면집에서 밀면을 사 먹고 근처 오래된 서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별생각 없이 소설 코너를 스윽 지나가다가 책장의 한편 전체에 비치된 하루키 도서들을 보면서 입이 쩍 벌어지게 감탄했습니다. 분명 이 정도의 컬렉션이라면, 이곳에서 일하는 점원이 하루키의 찐 팬이거나 아니면 이 서점의 사장님이 하루키의 찐 팬이 분명하다 -!라고 생각할 만한 수준의, '하루키, 작은 전시회'와 같이 책장 위부터 아래까지 책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으니까요. 2박 3일 목적 없이 마음과 발이 이끄는 대로 부산을 누빈 여정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입니다.

IMG_0360.JPG <영광도서> 책장 한편을 빼곡하게 채운 하루키의 책들


문득 한참 읽다 보니 '예민하지만 자극이 필요해'시리즈에 왜 하루키를 넣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 팬입니다. 말인즉슨, 하루키의 소설은 제대로 읽은 게 한 편도 없다는 이야기이지요(단편 소설은 몇 개인가 읽었습니다만, 기억에 남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저에게는 너무 큰 자극입니다. 세세한 내용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상실의 시대> 나 <노르웨이 숲>을 읽고 나서 느낀 생각은 '간접으로도 별로 겪고 싶지 않은, 그런 경험들이 화자를 통해 너무나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하루키 팬이세요? 그럼 이것도 읽고 저것도 읽으셨나요?'라고 물어오면, '아, 저는 에세이 팬입니다.'라고 딱 잘라 대답하곤 반쪽짜리 사랑을 들키지 않기 위해 철벽방어를 치곤 했지요.


<감정이 아니라고 말할 때>라는 책 속에서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자극 요소 (호르몬) 네 가지를 구분하였는데, 아마도 하루키는 도파민과 세로토닌 사이 어딘가에서 재미를 찾는 사람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본인의 판타지를 도파민으로 채우고 에세이에선 세로토닌을 채우는 식으로 말이죠(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반면, 저는 굳이 4 가지 중 어느 쪽이냐 하면 세로토닌과 옥시토신계의 재미를 느끼는 사람인데요. 말인즉슨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 읽는 집순이에다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먹고 산다는 의미겠지요.


저는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을 동경하기보다는 그 소설을 쓰는 하루키의 삶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에세이에서 넌지시 내비치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또 그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에세이 속에서 드러내는 그의 확고한 취향들이 좋습니다. 그의 수집가이자 탐험가로서의 면모가 진정 제가 추구하는, 이루고 싶은 꿈과 같은 삶이랄까요. 완벽한 모방은 하기 어렵더라도 조금이라도 따라라도 해보고 싶어서 최근에는 새벽 기상과 달리기, 아침 글쓰기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새벽 여섯 시 기상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루키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저녁 아홉 시면 잠든다니, 절대적 수면량만은 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7시간 자는 것도 저와 그의 공통점에 추가할까 봅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리고 그의 가치관은 일시정지 상태의 뇌와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처럼 <달리기를 말할 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도록, 내일 아침에는 꼭 달리기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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