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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22. 2024

생각 그만, 몸으로 살고파요  

나무의 서른한 번째 편지 

너무 빠릅니다. 답장이 너무 빨라 당혹스럽습니다. 또 몇 시간 만에 온 답장. 요새 각종 AI 툴이 유행하던데 그걸로 쓰신 건 아닌지.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도 타이핑하는 속도도 도저히 못 따라갈 정도로 빠르네요. 그거 아세요? 이번 편지에서 남에게 말할 기회를 많이 주고 싶어서 뒤로 빠지고 싶다고 했는데 실은 엄청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거 같아요. 이렇게 많은 단어를 이렇게 짧은 순간에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선물님 본인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비록 편지긴 하지만 이렇게 뚝딱뚝딱 이야기를 찍어내는 걸 보면 선물님은 영락없이 ‘작가’예요. 이런 우화를 이야기하곤 하잖아요. 모자를 쓴 채 모자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모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맨다고. 자기한테 있는 건 자기도 잘 모르는 법이지요. 아직 작가가 아닌 줄 착각하고 작가가 되려고 애쓸 때 내 머리 위에 버젓이 있는 모자를 놓치고 있는 거 아닐까요? 본디 ‘작가’는 자기가 작가인 줄 모르는 거예요. 진정한 작가는 이미 작가로 살고 있으니 다른 어느 시간에도 다른 어디에서도 작가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되려고 하지 마세요. 되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날 뿐이니.  


초인. 편지에서 ‘초인’이라는 단어를 보고 식초를 희석하지도 않고 마신 듯 가슴이 싸했어요. 초인처럼 살고 싶은 마음도 숨길 수 없고 초인이 아니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어요.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초인 타이틀에 욕심이 나는 걸 보면 분명 초인은 아니고 우보천리의 마음으로 오늘도 사소한 걱정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사는 중생이옵니다. 중생이라 고백은 하지만 여전히 초인이 욕심은 나서 초인은 어떤 인간일까 생각해봤어요. 적어도 나처럼 사소한 걱정과 두려움에 흔들리지는 않는 사람이겠다 싶더라고요. 초인이 일상사에 벌벌 떨면 웃기잖아요. 그건 범인(凡人)들도 쉽게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걸 초월한 사람은 아닐 것 같고요. 그런 사람은 인간답지 않으니까요. 초인은 초월했으나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 마음은 하늘 높이 드높지만 평범한 자기의 한계를 끌어안은 인간이 아닐까 싶어요. 같은 하늘 아래 평범하고 성실하게 자기 삶의 몫을 다하고 있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다 초인이라 부르고 싶어요. 


요새 크리슈나무르티의 ‘시간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마음공부 분야에서는 언제부턴가 ‘지금 여기 Here and Now’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잖아요.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너무도 당연한 소리인데 너무도 뻔히 놓치고 사는 진리지요. 우리가 웃고 울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게 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살아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누릴 수가 없지요. 이런 관점에서 지금 이 순간, 매순간이 선물이에요. 이 토대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잖아요.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일, 모든 현상, 모든 느낌이 지금 이 순간의 토대 위에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찬찬히 뜯어보면 어마어마하게 다가오는 현재가 감지되는데요. 온 우주 온 시간이 응축된 단 하나의 시간, 지금 이 순간.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요. 또 일상에서는 이 선물을 얼마나 쉽게 내팽개치는지요. 

사실상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뿐인데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바람에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걸 상상해냅니다. 아직 책의 초반부를 읽고 있어서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이해한 바로는 ‘심리적 시간’이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해요.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엮어서 사람이 머릿속에서 발명한 게 심리적 시간이에요. 과거에는 이랬고 현재는 이러고 있고 미래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인간은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요.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상상으로부터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자기의 자리에 정체성이 들어와서 나를 괴롭혀요. 넌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사는 게 좋을 걸. 그걸 따라가면 거짓 자기를 부여잡고 꼭두각시 역할극을 하게 돼요. 과거의 상처가 끝날 줄 모르게 연장되고 미래는 존재하지도 않는데도 벌써 두려움을 느끼게 되죠. 이게 심해지면 자기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헤매게 되고요. 


심리적 시간을 완전히 끝낼 수 있다면 상처도 걱정도 불안도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심리적 시간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초인 아닐까요? 과거와 미래가 절단 난 극미한 이 순간, 포착할 수 없는 시간에 사는 사람이요. 

이런 맥락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보자는 선물님의 제안을 듣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게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심리적 시간 안으로 뛰어들자는 것처럼 들였어요. 고통의 심연으로 뛰어들자고요. 아 이 놀이판에 뛰어들어야 하나요? 

그래도 초인이 아닌지라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바꾸고 싶은 과거야 참 많았지요. 그때 미국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팔았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말았더라면. 그때 그냥 속 시원하게 말했더라면. 그때 말만 하지 말고 진짜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그때 재수를 했더라면. 그때 그 문제 하나를 포기했더라면(수능 때 수리영역 한 문제를 세 번을 풀고도 결국 틀렸거든요. 덕분에 시간이 없어서 여섯 문제 넘게 찍어버렸어요). 그때 교통사고 직전에 다른 길로 갔더라면. 그때 그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무리하게 운동하다가 근골격계 다친 곳이 여럿이에요). 그때 애인에게 조금 더 부드럽게 대했더라면. 아이가 더 어렸을 때 함께 더 많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면. 그때, 그때, 그때. 지겹도록 후회하고 자책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 어느 순간 알아차렸어요. 이제 더는 불만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면서 지금 이 순간도 불만으로 물들이는구나. 


지겨울 정도로 과거의 나를 부정하려 해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지금의 나도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과거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파헤치면 여전히 바꾸고 싶은 것들이 끝없이 나오는데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나는 그냥 나이고 싶어요.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아닌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고 싶어요. 제게 가장 빛나는 순간은 지금-여기-나로 존재하는 순간이에요. ‘작가’(뭘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사람)가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어요. 사실 이 말도 어폐예요. ‘자기’는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되어가려는 과정에 있는 ‘자기’는 없지요. 자기를 찾아 나설 때 자기는 사라집니다. ‘이미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나’가 자기 자신이니까요. 찾으려는 모자는 바로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거니까요. 최선은 과거도 미래도 놓고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거겠지요. 이 순간에 드러나고 있는 나로.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나로. 


이렇게만 쓰면 선물님이 상당히 재미없어 할 테니 그래도 공상을 하나 펼쳐 볼게요. 과거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원하는 게 있어요. 미래에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태적 영적 공동체를 탐방하는 거예요. 책에서 볼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공동체들이라 일이 년 시간을 잡고 그런 공동체만 두루두루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책과 인터넷으로만 보고 들은 거라 제 머릿속에는 과하게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기도 한데요. 핀드혼, 플럼 빌리지, 오로빌, 떼제 등등. 당장 그런 곳으로 떠날 수는 없으니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어요. 20대 젊은 시절에 멋모르고 떠나서 둘러봤으면 어땠을까. 과거로 돌아가 어느 한 가지만 바꾼다면 이렇게 해보고 싶어요. 돈 없고 시간만 많던 20대로 돌아가 겉으로만 한량인 척 하지만 말고 정말 한량처럼 세계 곳곳에 뜻 있는 공동체를 돌아다니는 거예요. 20대를 그렇게 보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나에게 좀 더 솔직하게 살지 않을까요? 사회적인 역할, 체면에 덜 구속받고 삶을 더 가볍게 받아들일 거 같아요. 일상의 자잘한 것들에 대해 덜 고민하고 쉽고 단순하게 결정했을 거고요. 뭐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곧바로 행동했을 거예요. 이역만리 그런 공동체를 경험하러 실제로 뛰어든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는 몸으로 산다는 거니까요. 그러네요. 몸! 머리보다는 좀 더 몸으로 사는 인간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내 삶의 터전에서도 그런 공동체를 소소하게 만들어가고 있겠지요. 꿈꾸는 대로 사는 삶. 몸으로 사는 삶. ‘자기 자신’인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트이고 떨리고 짜릿하네요.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은 여기서 그만. 이 짜릿함으로 미래를 만들어 갈래요.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뭐라도 할 수 있는 현재를 살겠어요. 심리적 시간은 종말시키고 초인처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생각을 줄이고 가슴을 열고 몸을 더 움직이며. 

이왕 말이 나왔으니 선물님은 과거의 무엇을 바꾸고 싶나요? 저보다는 선물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한번 실컷 공상을 펼쳐봐 주세요. 그리고 제가 곧 몸을 한껏 쓸 춤명상을 갈 예정인데 이런 관점은 어떤가요.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쯤 선물님의 몸은 어떻게 다를까요? 


2024.07.26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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