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서른두 번째 편지
너무나 당연한 제목을 썼어요. 칠만 원이나 주고 예쁜 질문 카드를 샀어요. 열어보곤 예쁜 쓰레기를 돈 주고 샀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우리가 주고받은 질문들 외에 새로운 게 없더라고요. 참나. 오랫동안 연구해서 만든 질문이라길래 컨닝해서 나무님에게 새로운 질문 좀 해 보려고 했더니 정말 우리가 이 연구팀에 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요.
춤 명상을 떠나셨다고요. 종종 명상을 떠나는 걸 보면, 길게 과거를 바꾸진 못하지만, 현재를 조금씩 잘라서 바꾸고 계신 것 같아요. 성심당 크레페 케이크를 맛있게 오래 먹으려면 한 겹씩 돌돌 말아서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의외로 진짜 잘라 먹을 때보다 맛있는 거예요. 나무님은 일 년씩 이십 대에 그런 센터에 머물진 못하셨지만, 지금 그렇게 돌돌 말아서 한 겹씩, 한 곳씩 다니시는 게 아닐까... 그래서 먼 훗날, 와 다 해 봤다! 하실 것 같아요!
전 요 며칠 정말 절 못 믿고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자’를 쓰고 있단 나무님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어요. 찌르찌르의 파랑새처럼 밖에서 파랑새를 찾아다니고 있나 봐요. 아직도.
하루 동안 있던 일이에요. 안경 코 받침 하나가 빠졌어요. 안경이 약간 기울어졌죠. 생리가 코 앞이기도 해요. 생리 전 증후군으로 좀 예민해있기도 해요. 누군가 학술지 윤문을 해달라고 했는데, 윤문 정도가 아니라 내용을 많이 손 봐줘야 했어요. 전공 분야가 아닌데, 그리고 다시 정리해줘야 했고요. 성인용 동화 각색 극작을 제가 다시 각색했고, 합의가 끝났는데, 한 번 더 본다길래 그냥 지문이나 좀 만진 줄 알았는데 제본 나온 걸 보니 합의 끝난 내용을 다시 만져놓았더라고요. 중요한 주인공 성격으로 오래 토의했던 부분인데. 게다가 노래 가사도 합의했던 건데 바꿔 놓은 게 있고 작곡가는 악보 수정을 안 한 대로 넘겨서 예쁜 쓰레기 질문 카드 만큼의 돈을 제본비로 날렸더라고요. 그리고 첫 연출을 맡기기로 했는데, 연출님이 잊어버리셨더라고요. 제본에는 제가 연출한다고 적어놨는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제가 협동조합을 같이 하는 영월 예술가팀이 있는데, 같이 전시하게 되었어요. 제가 작년에 공황장애가 심해서 같이 그림책을 쓰기로 했다가 글을 못 넘긴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이 혼자 그림책을 냈어요. 글을 못 넘길 당시 공황장애가 절정일 때라 어렵다고 얘길 했었고, 지금은 약은 계속 먹지만 그림책 글 창작 외엔 한 번도 일을 펑크낸 적이 없어요. 공황장애가 제일 심할 때 그게 마감이어서 도저히 안 써지더라고요. 1차로 쓴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는데, 다시 쓸 정신이 아니었거든요. 물론 한 번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이번에 전시 회의를 하는데 여전히 하다 그만 두면 안 된다고 하거나 할 수 있냐고 재차 확인하거나 계속 의심을 하더라고요. 계속할 수 있냐고 의심받는 게, 사실 공황장애를 겪은 걸 솔직히 말해두었었는데, 장애라는 게 이렇게 편견 속에 산다는 걸 다시 느꼈어요. 그리고 극단에서 하는 상설 공연이 아무리 좋아도 ‘명예와 권력 있는 외부인’이 극을 칭찬해야 군수님이 ‘좋다’고 생각하셔서 지원하신다는 말을 듣고 뭔가 허무한 마음도 들었어요. 돈이 없으니 도슨트 아르바이트 하는 건데, 다들 돈 많이 벌어서 뭐하냐, 왜 돈을 그렇게 버냐, 대표인데 왜 돈 버냐고도 묻더라고요. 돈이 있으면, 요즘처럼 뮤즈가 찾아와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겠죠. 왜 아르바이트를 다니겠어요. 에어컨 틀고 집에서 글을 쓰겠죠. 전 이번처럼 더운 여름에 아직 집에서 에어컨을 한 번도 안 틀었어요. 월세도 비싼데, 전기세까지 나오는 게 겁나서요.
‘유명’이란 게 뭘까요?
어제 하루 정말 속상하더라고요. 만약 제가 이름있는 작가였다면, 아마 저 중 어떤 일도 안 겪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유명’하지 않죠. 당장 국내외 작가 이름을 대 보라고 하면 생각보다 소설가 이름을 열 명, 스무 명.... 국내 작가는 정말 적고요. 그게 비단 소설가만 그러냐면, 성악가, 발레리나, 뮤지컬 배우, 다 그래요.
어느 특정 분야에서 ‘유명’해진다는 건, 호랑이가 죽어서 흙이 되지 않고 ‘가죽’을 남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7만원짜리 예쁜 쓰레기 질문 카드를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고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면 고1때 원태연 시집을 안 읽을 거예요. 그때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란 시집이 엄청 유행했거든요. 하상욱이란 사람이 있어요. 요즘 유명한 ‘서울시’란 시집을 낸 사람인데, 20년 전 그런 사람이에요. 원태연은. 그 사람 때문에 제 문학이 망했어요. 시인이 아니에요. 작사가, 카피라이터, 뭐, 지금 같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고등학교 감성엔 그렇지 못했어요. 백석은 월북 시인이라 배우지 못했지만, 윤동주, 김소월, 김수영, 그러니까 도서관도, 책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 교과서 있는 시를 몽땅 외우고 시 한 구절이 아쉬워 시를 써 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글쓰기를 놓지 않을래요. 원태연 시집을 읽어버리고, 시어를 망치고, 시를 망쳐 고등학교 1학년 때 시를 엉망으로 쓰게 되면서 출판사에 보냈던 시를 퇴짜 맞았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공모전이 흔할 때가 아니라서 무작정 원본 원고를 우편으로 보냈고, 영영 잃어버렸죠. 그리고는 접었어요. 그 뒤로는 읽기만 했는데, 그것도 책이 많지도 않았고, 번역도 엉망이었고, 그랬어요.
계속 뭔가를 쓰고 싶었는지, 교내 독후감대회 같은 데 나가면 상을 타곤 했어요. 그런 거 외엔 글 쓸 기회가 없었어요. 그리고 글과 멀어졌다가, 나중에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을 땐, ‘문청(문학청년)’이라기엔 나이를 좀 먹었더라고요. 그러나저러나, 어차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전 결국 ‘글’을 썼을 것 같아요. 그러니 원태연, 하상욱(최소한 하상욱은 양심이라도 있어서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긴 하죠. 원태연은 자신을 시인이라고 아직도 말해요) 같은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문학을 계속 붙들고 있었을 것 같아요.
지금도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경계가 흐려지고, 대중에게 외면받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면서도, 계속 순문학에 서 있고 싶은 게 그때의 ‘恨’이 맺힌 것 같아요. 한을 풀고 나면, 독자가 원하는, 독자가 읽어주는 소설을 쓰는, 팔리는 소설을 쓰는 게 작가죠. 아니면 일기를 써야겠죠.
그러니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나무님이나 저는 과거에 매여있지 않되 그렇다고 현재에 도전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뭐라도 해보고 있잖아요.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서 현재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미래는 여전히 같겠지만 뭐라도 현재에 하면 미래도 바뀌겠죠.
우리의 ‘해봄’이 인생의 ‘봄’을 가져오길 기다려봅니다. 나무님이 춤 명상을 하며 ‘영혼의 호흡’을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저는 오늘 밤 다이어트 춤을 추면서 ‘몸의 호흡’을 좀 해야겠어요. ‘유명’하지 않아서 생긴 서러움쯤 탈탈 털고, 내 안의 파랑새에게 말해봅니다.
‘야, 좀 커져 봐라. 괜찮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대충 위로하지 말고, 행복은 내 안에 있다고 잠시 자위하면서 슬쩍 넘어가지 말고, 불혹의 나이니까 이제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 상태 그대로 안주하면서 사는 걸 당연히 여기지 말고, 이제라도 날아보자! 인생, 한 번 아닌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한 번인데, 날자, 시원하게 저 굽이굽이 산도 넘고, 넘실넘실 저 강물도 타고, 훌렁이는 파도도 지나, 날자, 이 녀석아!’
요즘 마음이 허해서 그런지 자꾸 책을 사요. 읽는 속도에 비해,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에 비해 많은 책을 삽니다. 나무님은 누군가에게 딱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무슨 책을 추천하시겠어요? 딱 한 곡의 노래를 추천한다면, 그리고 딱 하나의 시를 추천한다면, 딱 하나의 연극이나 뮤지컬은요? 딱 하나의 그림 작품은요? 와. 이렇게 묻고 나니 물밀 듯이 여러 노래와 그림과 책들이 떠오릅니다.
240726. 영월에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나무님이 있어 참 고마운 선물작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