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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22. 2024

그리고, 행복했답니다.

선물작가의 서른네 번째 편지

단 한 번의 황홀함이, 단 한 번의 떨림이 삶을 바꾸기도 하죠. 정말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나무님. 

영혼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무님의 발자국과 몸의 유영을 따라가면서 저도 조금은 그 리듬을,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참 고마워요.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고,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흔든 적이 있어요. 어깨랑 등이 너무 아파서 스트레칭 좀 할 요량으로 콩콩 뛰다가 나중엔 좀 더 막 흔들었었죠. 그것만으로도 신났어요. 아이처럼.

그런데 나무님은 얼마나 신났을까요? 다양한 음악, 다양한 사람, 분명한 목적, 자유로운 움직임. 춤의 축제로 인해 나무님의 영혼이 참 아이처럼 신났겠구나, 싶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어요. 영혼의 답장은 그래서 길게 쓸 게 없더라고요.      


‘그날 그 순간을 잊지 않길. 그래서 네가 언제든 몸이 무겁거나 마음이 무거운 날, 가만히 꺼내어 네 자신에게 틀어주길. 그리고 아주 잠깐이라도 춤추길. 아이처럼. 아주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춤추고 웃을 수 있도록 영혼이 춤추던 날이 네 안에 죽는 날까지 담겨있길 바라. 진심으로.’     



가슴 떨리는 사랑을 해 본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고들 하더군요. 그러니 가슴 떨리는 사랑을 해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아냐고요. 누구나 당연히 가슴 떨리는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프로포즈 하고, 결혼하는 줄 알았어요. 결혼의 ‘Happily ever after….’를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의 신화는 믿었던 것 같아요. 아니 믿고 싶었나봐요. 부모의 내리 사랑, 연인 간의 에로스적 사랑 같은 거요. 아동학대나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과 추행, 이젠 결혼식장 들어가도 모르고, 살아봐야 아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설레는 사랑을 당연시했는데, 그건 아마 한 번은 느껴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아주 오래 지나도 ‘사랑’에 특별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 사랑이 아무리 별로고, 이상한 사람을 만나거나 문제가 있어도 사랑이란 꽤나 낭만적이라고, 어쩌면 그 눈부신 순간이 있었기에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눈부신 순간, 잊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빌어요.     

그런 것처럼 한 번의 경험, 한 번의 떨림, 한 줄의 문장, 한 곡의 노래, 전 그런 것들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로 살고 싶어요. 나아가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믿죠.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서로를 아끼는, 조금 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조금 더 인간답게 사는 그런 세상이요. 그래서 물었었어요. 각자에게 그 유일한 하나를 고르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단 하나를 기억한다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했어요.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니, 우리와 함께 이 편지를 읽는 누군가도 나에게 그 좋았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외우고 싶은 시 한 편, 이런 것들을 떠올려서 삶이 지치는 날, 펼쳐보기를 바랐던 질문이었어요. 나무님의, 혹은 저의 것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누군가도 함께 그 시간에 자신만의 것을 펼쳐보기를 바라서였죠. 그래서 대답을 거부당할 줄 예상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와 나무가 나무에게 쓴 춤의 축제를 즐긴 영혼의 편지는 충분한 답장이 된 것 같아요. 저도 그 노래 가사, 참 좋아해요. 살아가는 방법, 사랑. 그 키워드가 참 지혜롭다 생각했어요. 희한하게 위로가 되고 포근하고 바람에 몸을 맡기듯 정말 삶을 살아가게 되는 노래 같더라고요. 거기에 춤이라뇨. 영혼을 내맡기는 자유로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춤의 경험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꽉 찬 느낌입니다. 나무님이 어느 날 제게 힘들다고 얘기하면, 춤의 축제를 얘기할 것 같아요.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다!’고 소리쳤던 나무님의 이야기를 할 테고, 아마 나무님은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지으실지 모르지만, 아마 마음 어딘가에서 순수한 미소가 떠오를 거라고 믿습니다.


전 지금 대학로 예술가의 집 라운지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어요. 실내는 에어컨으로 시원하고, 창밖으로 햇빛이 습도를 잔뜩 머금고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나무에 기대어 신문지로 부채질하시다가 힘없이 신문지를 내려놓으셨어요. 에어컨 사용량이 늘고 세상이 오염되면서 온난화가 더 심해졌는데, 그럴수록 에어컨을 더 세게 트는 안과 더 더워지는 밖. 


어제 워크숍이 끝나고 무료로 나눠준 아이스커피 컵을 그래도 누군가는 ‘어디에 버릴까요?’ 물었고, 관계자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이 안 되어 결국 제 걸 포함해 쓰레기통을 뒤져 정리하고, 제 뒤에 나가는 분들 걸 받아서 분리수거를 했어요. 아이스커피와 샌드위치 그릇을 종이, 플라스틱, 일반쓰레기로 나누었어요. 그렇게 쌓아두니 끝에 나오신 분들은 이미 분리된 걸 보고 알아서 분리하시더라고요.

사소한 게 아닐까 싶어요. 먼저 시작한다는 건요. 그저 작은 호기심, 용기, 의지 같은 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건지도 몰라요. 


저는 전화나 카카오톡을 좋아하지 않아요. 연락이 하나도 없으면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나보다 싶기도 하지만, 대신 자유롭고, 무엇보다 글을 쓰는데 끊기지가 않아요. 요즘엔 짧고 긴 통화가 하루에 평균 10통 내외인데, 저는 그게 참 힘들어요. 아예 카톡이나 문자는 제가 원할 때 답을 하면 되는데, 전화로 인해 쓰는 글의 흐름이 끊기면, 다시 그 흐름을 잡기가 어려워요. 100m 달리기 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차 때문에 멈춰서 다시 빨라지려면 시간이 걸린달까요? 문제는 다시 빨라질 의욕이 뚝 떨어진다는 거예요.


오늘도 아침 일찍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침부터 오기 시작한 전화에 글 쓰는 게 좀 어렵던 차에 나무님의 편지를 받았어요. 덕분에 다시 글자를 타자 치고,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준비운동이 된달까요? 고마워요. 적절한 때에 편지를 써 줘서.

나무가 나무에게 쓴 영혼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너무 짧아서 실망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쓴 영혼의 편지에 함께 순수하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는 것 말고는, 위의 짧은 편지로 정말 충분할 것 같아요. 다른 말들은 결국 사족이 될 것 같아요.

또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해요. 좀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有名’에 대해 자책하고 굽신거리면서 전화로 ‘네, 네’ 하는 허리 구부린 저는 저 멀리 파랑새를 그리워하고 있고, 내적인 파랑새와 함께 즐겁게 춤을 춘 순간을 가진 나무님은 순수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순간을 갖게 된 것 같아 부럽고,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심신의학처럼 제 몸의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제 어쩌나, 어휘력도 체력도 떨어지는데, 내 글은 산으로 가나? 나는 어디로 가나? 자유롭게 훨훨 나는 파랑새가 아니라 꼬깃꼬깃 접어서 상자에 넣은 종이처럼 저는 요즘 한량없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구의 바다 저 깊이도 무서운데, 목성은 지구보다 더 깊은 바다를 가졌다죠? 그리고 아마 마음의 바다는 더 깊은 것 같아요. 잴 수 없으니까요.


나무님이 오늘 받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일상으로 돌아온 나무님이 하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7월의 마지막 날. 영월에 사는 선물작가가 서울 예술가의 집 아트라운지에 앉아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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