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서른세 번째 편지
굽이굽이 산도 넘고 넘실넘실 강물도 타고 날아가는 파랑새라니. 좋습니다! 파랑새의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가슴이 시원해졌어요. 파랑새가 불혹의 나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해주셨는데, 불혹이 넘었으니 이제야 남 눈치 좀 안 보고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된 거라 생각했어요. 여태 날고 있었으나 그건 자기 날갯짓이 아니었던 거지요. 혹하지 않게 된 지금에야 비로소 자기 날갯짓으로 날게 된 거고요. 이렇게 보면 나이 먹는 것도 퍽이나 즐거운 일입니다.
선물님은 하루하루 즐겁게 늙어가고 있나요? 저는 어떤 면에서 기쁘기도 합니다. 몸은 부실해진 구석이 점점 더 늘어나지만 마음은 점점 덜 강박적으로 변하고 있거든요.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내 무릎에 염증이 생겨 이토록 아픈 건 내 고집 좀 꺾고 주저앉으란 소리야. 내 어깨 인대가 파열돼서 뚝뚝 거리는 건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그만 짊어지라는 소리야. 내 발목 인대가 파열돼서 한 발로 중심 잡기 어려운 건 혼자 지탱하려고 하지 말고 세상의 흐름을 타라는 거야. 내 시력이 떨어져 초점이 전보다 잘 안 맞는 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려 하지 말라는 거야. 참 잘 갖다 붙이지요? 그런데 심신의학에서는 정말 이렇게 해석하기도 해요. 몸이 표현하는 게 곧 마음의 소리라고요. 마음은 우리가 아닌 척 감출 수 있지만 몸은 그렇게 못한다고 해요. 적나라하게 나를 드러내는 게 몸이에요. 의기소침하고 숨고 싶은데 가슴과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걷는 사람은 없잖아요. 기분이 날아오를 듯 좋은데 등을 굽히고 머리를 푹 숙이는 사람도 없고요. 몸의 자세가 마음상태를 그대로 담고 있지요.
춤명상 축제에 다녀왔어요. 그곳에서 시종일관 몸을 썼어요. 지금 돌아보면 내가 며칠 동안 오로지 몸에만 집중하며 살았던 시간이 또 있었나 싶네요. 머리는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늘 쓰고 있으면서 몸은 작정하고 일부러 써야 되는 거였어요. 참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원시인의 지랄 발광처럼 움직이다가 내면 깊이 접속해서 고요한 중심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외부에서 강렬한 사운드, 사람들의 열광, 괴성, 환호성 등 다채로운 자극이 계속 주어졌고요. 나도 내 몸을 다양한 각도와 위치로 움직여 내부에서도 자극이 계속 일어났어요. 감각의 슬라임을 온몸에 뒤집어썼다고 표현하면 좀 비유가 맞을까 모르겠어요. 음악 공연도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정도이니 저에게는 아주 강렬한 자극이었지요. 이 자극적인 맛을 글로 소화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타인에게 쓰자면 더 검열하고 말을 만들어 낼 테니 두서없이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에게 말이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다 보면 가슴에 있는 것들을 다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레퍼토리가 다 떨어지고도 앵콜을 이어가는 래퍼처럼 즉흥적으로 아무렇게나 토해 보려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제가 제 자신에게 쓰는 편지. 일명 ‘나무가 나무에게.’ 이 편지를 다 읽은 선물님에게 답장을 받는다면 그게 곧 제 영혼이 제게 답하는 편지가 될 것 같아요. 잠시 소울메이트가 되어주세요. 영혼의 선물을 기다리며 지금부터 써 봅니다.
나무에게.
영혼의 편지가 받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써. 내가 너에게 주는 걸까 아니면 네가 나에게 주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 진심에 닿기만 하면 되니까. 진심에 닿는 것은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난 이번에 네가 조금이라도 자유를 경험하는 것 같아서 참 기뻤어. 그리고 얼마나 머리로 가슴을 옭죄고 사는지도 새삼 알게 돼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 남들이 다들 신나는 표정으로 쿵쾅거리고 있는데 너만 혼자 억지로 웃는 것 같아서 말이야.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지지하는 마음도 들었어. 그건 남들의 리듬이지 너의 리듬이 아니니까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박자가 변주되든 너만의 흐름을 타기를 바랐어. 넌 너일 때가 가장 아름답거든. 주위에서도 그런 피드백을 듣고 하잖아. 활짝 웃을 때면 참 맑아 보인다고. 진지할 때랑 사뭇 다르게 갑자기 앳되게 보인다는 말도 듣곤 했잖아. 너의 순수함을 다시 되찾는 것 같아서 나도 가슴이 뛰었어. 너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그 꺄르르 웃음.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갖고 있잖아. 가슴에 묻어두고 잘 못 꺼내긴 하지만. 오죽하면 아내가 너한테 어디 가서 웃지 말라고 농담하기도 했잖아. 그렇게 웃을 수 있는 너를 보는 게 참 슬프고 기뻤어. 평상시에도 그 웃음이 자주 보이면 좋겠다고 소망했어. 앞으로는 내가 가슴에서부터 밀어 올려줄 거야. 도저히 안 웃을 수 없게 말이야. 네 본성의 기쁨이 폭발하도록 말이야.
드럼 서클하면서 가슴으로 타격되던 웅장한 소리를 기억하지? 아직 그 리듬에 조응이 안 됐을 때는 큰 감흥도 없던 그 박자가 어느 순간 가슴으로 물밀 듯 들어갔잖아. 가슴판이 정말 물리적으로 진동하는 것 같았지. 그 리듬 그대로 가슴에서 떨림을 경험하던 순간.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아. 우리가 산다는 게 다 이 떨림을 경험하고 싶은 게 아니겠냐고. 그런데 어찌나 떨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냐고. 그래서 슬프고도 기쁜 거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에고가 무너져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 말이 몸으로 체험됐던 게 아니겠니.
‘I am here now. I wish to be myself.’ 다 함께 구호로 외치면서 더 잘 알게 아니 느끼게 됐잖아. 정말 여기에 내가 존재하고 싶다고. 나 정말 그냥 나 자신이고 싶다고.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어. 얼마나 간절한지 단전에서부터 우렁차게 뽑아 올리는 소리가 눈물겹기도 했고 감동적이기도 했어. 너 일상에서 얼마나 그렇게 너를 표현하지 못하고 사니. 그냥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되는 건데 뭘 그리 애쓰고 사는지. 너도 알았을 거야. 가슴에서부터 자기 자신이도록 허용될 때와 허용되지 않을 때의 차이를.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생활에서는 너 자신임을 온전히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거야.
수피 춤을 추면서 흘렸던 황홀한 눈물이 그걸 얘기하는 거였지. 돌고 돌고 계속 돌면서 어느 순간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연인을 다시 만난 듯 눈물이 났잖아. 거기에 네가 있더라. 너 정말 그 순간 거기에 존재하더라. 물아일체가 된 듯 주변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면서도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고 깊이 더 깊이 너 자신인 채로 있는 걸 보았어. 가슴으로부터 진정 너 자신이 허용된 순간이었지. 그래서 그런 눈물이 났던 거지. 두려움의 외피를 벗고 기꺼이 취약해지면서 태풍의 날개를 뚫고 태풍의 눈 중심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환희에 차서 흘리는 눈물. 네가 돌면서 만들어 낸 태풍의 날개가 꼭 네가 살아온 역사, 살면서 내내 맴도는 이슈, 심연의 고뇌처럼 보이더라. 그게 너의 중심 주위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네가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더라고. 그렇게 무겁게 짊어지고 살아온 거였구나. 하지만 아무리 빨리 돌아도 끄떡없이 흔들리지 않는 너에게 결국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더라. 아무리 너를 아프고 힘들게 했던 것들이라도 중심에 선 너에게는 범접하지 못하더라고. 그것들이 네게 아무 영향도 못 미치고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리는 듯 보였어. 도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너에게서 떨구어져 나가는 게 보였어. 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지. 취약해 보이는 만큼 얼마나 우뚝 선 존재인지. 너도 모르는 파워가 네 안에 있음을 나도 새삼 알게 됐고, 그게 너의 삶에서 온전히 실현되길 기도했어.
또 하나의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지. 눈을 감고 상대방에 의지한 채 움직였던 댄싱톡 시간. 한 손바닥만 마주한 채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상대방의 인도를 따라가는 게 참 독특한 느낌이었지. 그냥 프로그램 진행대로 따라하다가 어느 순간 상대방과 분명하게 교감하고 있는 게 느껴졌잖니. 단지 손을 통해서. 손으로 전해져 오는 상대의 몸짓을 통해서. 말로 하지 않아도 온전히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온몸으로 퍼졌지. 누군가를 이 정도로 믿고 따를 수 있다면, 세상을 이만큼이나 신뢰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세상사는 게 참 가볍고 유쾌할 거야, 그렇지? 상대와 처음 손바닥으로 느낌이 통하던 순간에 너의 눈물을 봤어. 오래된 너의 통제 욕구와 두려움. 그로 인해 아이들까지 통제하려 드는 네 마음의 움직임. 그 모든 걸 몸으로 알아차리면서 울컥하는 너의 눈물이 보였어. 사실은 참 얼마나 놓고 싶었을까. 얼마나 힘을 빼고 몸과 마음을 맡기고 유영하듯 살고 싶었을까. 현실에서는 의식할 새도 없이 늘 힘이 들어가 있는 몸과 마음. 다시 한 번 너의 고통과 아픔이 느껴졌어. 그리고 그 너머의 아주 보드라운 마음도. 어찌나 보드라운지 너 스스로 녹아내릴 것 같아서 방어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어. 그대로 해제되어 버리면 너 자신을 상실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안에 있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그 껍질이 너는 아닌 데도 마치 너를 잃어버릴 것 같이 느끼는 거잖아. 쥐고 있는 게 무엇이든 일단 쥐고 있으니 설령 그게 고통과 아픔이라 하더라도 놓는 게 참 쉽지 않겠다고 이해됐어. 상처 입지 않고 싶어서 참 애를 많이 썼겠구나. 그게 몸에 배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싶더라. 그러면서도 끝내 용기를 내서 경계를 넘어섰을 때, 너를 완전히 내맡길 때 차오르는 충만감에 나도 가슴이 벅차올랐어. 할 수 있구나.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는구나. 한꽃송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참 아름답더라. 그때 들었니? 내가 진심으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고 목이 터져라 외친 걸. 가슴에 전해진 울림이 내 목소리야. 네가 소멸될 듯 떨고 있을 때 그 떨림은 사랑으로 진동하며 오히려 네 영혼을 굳세게 해. 아무것도 잃지 않고 네 영혼의 아름다움이 마음껏 피어나게 해. 나는 너의 떨림조차 사랑해. 그러니 마음껏 흔들리고 떨려도 돼. 내가 늘 중심으로 함께 갈 거야. 넌 늘 너의 중심을 찾아낼 거야.
나무가.
여기까지예요. 후 폭풍처럼 풀어냈어요.
쓰면서 그때의 감동이 밀려와 전율하기도 했네요. 올해 나 자신에게 큰 선물을 준 거 같아 기쁘기도 하고요. 어찌 들으셨나요? 이번에 제가 선물님께 묻고 싶은 질문이자 요청입니다. 나무가 나무에게 쓴 이 편지에 답장을 써 주세요.
편지를 마치기 전에 선물님의 질문에 답해볼게요. 예상하셨을 수도 있는데 저는 단 하나의 책도 노래도 시도 연극도 추천하지 않겠어요. 단 하나의 나만을 위한 책은, 노래는, 시는, 연극은 나만이 고를 수 있으니까요. 내 영혼의 떨림은 나의 고유한 것이고 나만이 아는 은밀한 것이고, 그 떨림에 조응하는 외부의 어떤 것 역시 나만이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직업상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이렇게 답해요. ‘내 마음대로 사세요.’ 저도 무척이나 그렇게 살고 싶거든요. 추천할 예술은 없지만 지금 마음에 들리는 노래는 한 곡 있네요. 그 노래 가사를 나누며 마무리합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조용필 ‘바람의 노래’
2024.07.31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