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서른다섯 번째 편지
5박 6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네요. 영월의 산과 물은 참 좋더군요. 그리고 선물님도. 번개처럼 나타나 잠시 만나고 우린 헤어졌지요. 같은 영월이니 제가 캠핑하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했는데 선물님 사는 곳에서는 장장 60km나 떨어진 곳이었네요. 그 거리를 쏜살같이 달려와서 잠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순식간에 사라진 선물님. 작가라면서 며칠 새 수차례 공연하느라 목이 다 쉬었다는 선물님. 분명 본인이 더 고생스러워 보이는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게 관심을 쏟는 선물님. 그날 날씨처럼 놀랍고 꿈같이 아득해졌어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 선물님을 만나긴 했지.’하면서요. 선물님이 온 날,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캠핑 첫 날은 천둥과 번개가 수시로 성난 파도처럼 으르렁 번쩍였어요. 선물님의 등장도 그 자체로 천둥 번개 같았답니다. 그 자체로 화들짝 놀라게 한 선물이었어요. 누군가에게 내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된다는 건 참 기쁜 일이더군요. 선물을 받은 입장에서 보니 나도 선물을 주는 입장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이렇게 순환된다면 산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쁘고 황홀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 보았어요. 참 아름답지요?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든다니. 기쁨에 얼싸 안고 춤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 기쁨을 하늘도 알았는지 선물님이 떠나고 불과 한두 시간 뒤에 폭우가 쏟아졌어요. 엄청난 비 세례를 맞으며 앞으로의 캠핑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했어요. 그냥 인생길 같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일이 늘 펼쳐지는 인생길. 5박 6일 휴가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나는 앞으로 남은 날 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궁금해졌어요. 100세 시대라고 하니 6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당 대략 16~17년이 돼요.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진 초년기를 지나고 나면 그보다는 나은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가 생겼어요. 어차피 맞을 매는 일찍 맞는 게 좋겠지. 다시 말간 해가 뜨고 축축한 대지가 마르고 공기가 보송보송해지면 그게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재미있게 타프를 보수했답니다. 타프 천장에는 금세 빗물이 한가득 고이고 땅에 박은 핀은 뽑혀서 난리법석이었거든요. 비가 퍼붓는 와중에 그걸 보수하겠다고 망치 들고 여기저기 오가면서 당연히 비를 흠뻑 맞았어요. 그랬더니 살아있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순간 생각했지요. 의자에 앉아있지 않은 인간은 얼마나 인간다운가. 몇 시간씩 의자에 앉아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하다 보니 얼마나 몸을 쓰지 않고 사는지요. 몸의 온갖 군데에 잠금 설정해놓은 것을 일시에 해제하고 움직이는데 그 맛이 아주 생생하더라고요. 인간의 몸은 의자에 앉아있기에 참 적절하지 않아요. 생생하게 살아있고 싶다면 의자를 걷어차야 합니다. 어디 잠시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천둥 번개만큼 야단스럽고 재빠르게 비를 맞으며 움직이고 있자니 아주 아주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의 초년은 고생스러워도 제대로 살아있는 맛이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사는 건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살아있는 느낌이 들고 재미도 있는 것 같아요. 유대인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어요. ‘인간이 계획하면 신은 웃는다.’ 어떻게든 내 생각대로 살아보겠다고 용쓰는 게 신이 보기에 얼마나 웃길까요. 요놈아 그게 그렇게 될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머리에 꿀밤 한 대 먹이는 게 우리가 인생길에서 경험하는 난관들이 아닐까 싶어요.
다행히 폭우는 그날이 끝이었어요. 이튿날부터는 점점 해가 더 잘 들고 물놀이하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었어요. 마지막 이틀 동안은 해가 아주 쨍쨍했어요. 날마다 더 좋아지는 인생. 앞으로 인생길도 그렇게 펼쳐지리라 기분 좋게 믿어보아요. 캠핑 중에 매일 물놀이를 했는데 물놀이를 하면서도 인생을 배웠어요.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이튿날까지는 겉보기보다 물속에서 느껴지는 유속이 꽤 빠르더라고요. 그렇게 빨라 보이지 않는 물살인데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하면 계속 제자리에 있게 되더라고요. 조금 나아간 듯해도 금세 오십보백보 제자리. 인생은 나아가는 게, 나아지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 게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흐르도록 두는 게 인생의 묘수 같아요. 그래도 물살을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고 약간 비스듬히 지그재그 헤엄을 치면 조금씩 상류로 갈 수 있었어요. 인생도 내 계획을 고수하고 정면 돌파하려고 하면 제자리에 머물 뿐. 정신줄 반쯤 놓고 내 계획도 반쯤 틀고 약간은 휘청거리게 살아야 그나마 원하는 곳으로 가는구나. 그날 물썰매타듯 강물에 이리저리 흔들려 떠내려가면서 인생을 배웠답니다.
이렇게 적다 보니 인생이 나에게 가르친 것들, 내 인생을 이만큼 만들어 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지난번 선물님 질문에 대한 답도 성실히 할 겸해서요. 지금부터, 추천은 아니고 제 취향을 소개합니다.
살면서 가장 여러 번 읽은 책 중에 하나가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책이에요. 누군가 심리 관련 책을 소개시켜달라고 하면 차라리 이것부터 먼저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판타지 소설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실 깊이 들어가면 자기 자신과 잘 못 지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잖아요. 나의 생각, 감정, 욕구, 충동, 신념 등을 포괄해서 나 자신과 잘 지내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나를 속이고 휘두르더라도 내 중심을 잡고 나만의 인생길을 계속 갈 수 있겠지요. 굳이 심리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걸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재미와 감동으로 풀어나간 이야기가 이 세상에 있으니. 나의 그림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말았네요.) 저는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여전히 또 읽고 싶은 책이랍니다.
살면서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 이 책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요. 워낙 유명해서 마음공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책,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예요.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저는 이렇게 표현해요. ‘어젯밤에는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쳤다. 오늘은 세상이 다 씻겨 푸르고 투명한 하늘이 보인다.’ 내 정신적 심리적 구조물이 무너지는 장엄함이 느껴지는 책이지요.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나를 얽매던 온갖 생각과 개념의 쇠사슬이 일시에 풀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감흥이 일상생활에 잘 녹아나지 않는 게 문제긴 하지만. 여하튼 말로 풀기에는 선문답 같은 책이라 이쯤하고 넘어갈게요.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은 뽑기가 어려워요. 한 시절 한때 그 감성에 꽂혀서 한 곡만 낮이고 밤이고 듣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보다는 내 마음속에 가장 오래 장수하고 있는 곡을 하나 뽑자면 애니메이션 라이온킹에 나왔던 ‘Circle of life’예요. 가슴을 웅장하게 하는 노래이지요. 아옹다옹 거리는 내 일상의 번뇌를 일거에 먼지 같이 사소하게 만드는 노래예요.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디작은 티끌 같은 나. 지구 전체 생태계 안에서 아주 작은 고리일 뿐인 나. 온 우주 온 생명과 연결된 심사를 그려내는 이 노래는 도입부터 강렬한 원시적 함성으로 시작하잖아요. 가슴을 직접 두드리는 듯 고조되는 사운드를 들을 때면 혼자 중얼거리곤 했어요. ‘그래,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성을 크게 부여하고 사는지 원. 누구에게나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일생일대의 화두일 수밖에 없어요. 일평생 내가 ‘나’를 데리고 사는 이 묘함이란.
이 우주적 감성을 이어받아서 제가 좋아하는 시가 떠오르네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제목부터 참 맛있지 않나요? 제목이 말을 다한 시라 시 구절은 소개도 필요 없는 시예요. 제목에서 이미 끝난 시인데 시 구절 또한 맛깔스럽게 뿌린 고명이 되었으니 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했어요. 시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우린 풍경이 될 수 있을까요? 배경에 머무르고도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나의 삶이 그렇게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유연하고 풍요롭길 소망해요.
적다 보니 더 많은 것들을 소개하고 그게 왜 제 취향인지 더 말해주고 싶네요. 쓰면서 스스로 정리되는 것도 있고, 선물님이 저를 더 잘 헤아려주길 바라는 마음도 들고, 제가 느낀 좋은 걸 더 나누고 싶기도 하고요. 이런 의도로 선물님이 질문했던 걸까요? 그렇다면 참 기특한 질문이었어요. 짝짝짝. 허나 박수칠 때 떠나라고 하듯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여기에서 편지를 끊어야겠어요. 나머지 못 다한 이야기는 다른 편지의 글감으로 남겨둘게요.
요새 한량없이 가라앉는다는 선물님, 더 가라앉을 때는 우리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꺼내 읽어보세요. 이것만큼은 강력하게 추천드릴 수 있어요. 두둥실 다시 선물님의 마음이 떠오를 거예요. 나무가 지나간 질문에도 이렇게 충실하게 답을 해드리잖아요. 늘 마음 한편에 기억하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주세요.
(바로 여기에서 행갈이를 하고 선물님께 다음 편지의 글감이 될 질문을 적다가 방금 지웠어요. 한량없이 가라앉는 사람에게 행복이니 삶의 의미니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게 가당치 않은 것 같아서요. 질문 대신 이렇게 마무리할게요. 그냥, 행복하세요 오늘, 아무 이유 없이.)
2024.08.13. 존재 자체가 선물인 선물님께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