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서른일곱 번째 편지
더운 여름을 햇빛 잘 드는 방에서 선풍기로만 버텼을 선물님을 생각하니 괜히 송구스러운데요. 저는 아이들 핑계로, 내담자 핑계로 거의 에어컨 아래에서 지냈거든요. 밖에 많이 나가지도 않고 여름이 그렇게나 더운 줄도 모르고 살아서 선물님이 얘기한 ‘뜨거운 사막’은 저에게 없었어요. 글부터 써야 하는 작가 신세가 아니라서 글이나 써야지, 하고 싱겁게 한글 프로그램을 띄워놓았는데 선물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글을 쓰고 싶었는지를 생각하면 좀 미안하기도 하네요. 좀 전까지 새벽 온라인 스터디를 하려고 대기 중이었는데 상대가 깜깜 무소식이네요. 고요한 새벽 여유시간이 생겨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요새 저는 싱잉볼을 치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커다란 좌종 하나를 상담실에 모셨거든요. 보통 싱잉볼이라고 하면 휴대가 가능한 사이즈의 느낌이잖아요. 이 분은 그런 싱잉볼이 아니라 아주 육중한 금빛 지체를 지니고 계세요. 한손으로 들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앉아서 칠 수밖에 없는 종이에요. 그래서 좌종이라고 부른대요. 이 분은 울림이 크고 길어서 그냥 듣고만 있어도 머릿속에 잡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요. 상담을 하고 나면 방금 한 상담 과정과 내담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돌기 쉽거든요. 그런데 좌종을 치고 나면 그 생각들이 좌종의 깊은 울림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마치 블랙홀처럼 다 빨아들여서 다시 텅 비고 고요해지는 것 같아요. 앞서 좌종을 두고 ‘이 분, 모셨다’라는 식으로 표현한 건 그런 이유예요. 제 머릿속도, 상담이 끝난 상담실도 다시 고요하고 거룩하게 만드니까요. 일이 끝났으면 머리가 비어야 할 터이고, 사람이 떠났으면 공간도 비어야 할 터인데 우린 정신 속에 계속해서 뭔가 끈적이게 남기고 살잖아요. 이미 떠나갔는데도 남은 것들까지 좌종의 깊은 소리와 잔향 끝의 침묵이 말끔하게 흘러가게 해줘요. 덕분에 텅 비었으나 충만하다는 게 어떤 말인지 매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 제가 이 귀한 분을 정성스럽게 모실 수밖에요.
어떤 때는 좌종을 처음 치는 순간부터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져요. 어떤 때는 마치 아직 잠에서 안 깬 듯 울림이 찌뿌둥한 게 탁 트이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그럴 때는 여러 번 여기저기를 두드리면서 좌종을 깨워요. ‘나 왔어. 오늘은 어때? 일어났니? 준비됐어?’ 이래저래 자주 두드리다 보니 좌종의 소리와 울림이 제 마음의 일기(日氣)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좌종이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면 내 마음도 맑고 고운 듯, 좌종이 탁하고 답답한 소리를 내면 내 마음도 탁하고 답답한 구석이 있는 듯.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좌종과 마음의 대화를 주고받아요.
그러다보면 오래됐지만 늘 새로운 깨달음이 순간순간 찾아와요. ‘모든 것은 함께 공명하고 있다.’ 연기법이 불교 진리의 핵심이라고 들었어요.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법은 요새처럼 분절되고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지요. 일상에서는 하루하루 일과에 쫓기며 살다 보니 그 감각을 거의 잊고 살지만요.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가느다란 존재의 실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기에 우리가 오늘도 숨 쉬고 살아있는 것이겠지요. 오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서 생생하게 포착되는 진리는 아니지만 아스라이 사라지는 좌종의 소리 끝자락처럼 이 말씀의 뜻은 깊은 여운을 남겨요.
제 상담센터 이름이 ‘나무 둘 울림’이잖아요. 지어놓고 나중에 마케팅의 관점에서는 실패한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다섯 글자나 되는데다가 발음도 쉽지 않아서 상대방에게 한번에 명확하게 알려주기 어려운 이름이어서요. 하지만 그만큼 제가 전달하고 싶은 뜻은 곧이곧대로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 뜻은 이렇답니다.
‘나무 두 그루가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 있지만 그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명이 있다. 두 그루에서 시작한 울림이 가득 차고 점차 퍼져나가면서 숲을 이룰 것이다. 고요히 공명하는 나무 둘처럼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도 은은한 울림이 있길.’
‘나무 둘 울림’은 이런 기원을 담아서 지은 이름이에요. 그런데 처음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대번 이렇게 묻더라고요. ‘나무 둘이니까 상담사님과 서점지기님 두 분을 이야기하는 거죠?’ 독립서점과 함께 상담센터를 꾸리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묻는 것이었어요. 처음에 그런 생각으로 지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자꾸 듣다 보니 그거야말로 사람 냄새 나고 정감 있다 싶어서 원래부터 그런 뜻이었던 걸로 승복해버리고 말았어요. 고객께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정리하면 ‘울림’은 어디서 의미를 끌어올지 애매하잖아요. 나무 둘이 서로 눈물 나게 울린다는 것도 아니고. 물론 상담 중에 본의 아니게 앞에 앉은 분을 수시로 울리긴 하지만요. 이러던 찰나에 어느 날 좌종을 치는데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나무 둘 울림을 완성했네!’ 묵직한 좌종이 저와 서점지기 사이에 울리고 있으니 말 그대로 ‘나무 둘 울림.’ 다시 한 번 ‘이 분’께서 화룡점정을 찍으셨지요. 용이 드디어 눈까지 얻었으니 훨훨 날아오르길, 나무 둘을 넘어 드디어 숲을 이루길 기대해봅니다.
그렇게나 바쁜 와중에 영월에 온 저를 만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 왔던 선물님.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우리 사이에도 그 울림이 있었던 거예요. 비슷한 결이 있는 우리 사이에는 늘 울림이 있는 거겠지요. 수도자는 아니지만 수도자 같은, 가지 않은 수도자의 길과 비슷한 무엇. 저는 그걸 ‘존재를 향한 치열함’이라고 과대 포장하고 싶은데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도 되는데 그렇게 못사는 저를 보면 그 표현이 딱 맞는 것도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선물님도 그렇고요. 쉬운 길 내버려두고 촌구석에서 고군은 아니지만 분투하고 있는 그대. 어쩜 우린 쓸데없이 그런 걸 닮았는지요.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뚜렷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않나 싶어요.
존재를 향한 치열함과 존재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 이 두 가지를 병렬로 놓고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르네요. 두 가지가 잠시 교차했다가 N극과 S극처럼 멀어지면서 ‘존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머리가 지어냅니다. 나는 존재를 찾으려 안으로 자꾸 파고드는데 그게 오히려 존재를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닌가. 그 길에 치열할수록 나는 길을 잃는 게 아닌가. 존재하지 않는 걸 찾으려는 치열함은 자기를 신경증에 가두겠구나 싶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애를 쓰면 쓸수록 자기를 고갈시키기만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이 존재는 정작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이 ‘존재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머리 굴리지 않고 아무 셈 없이 서로를 알아볼 때 존재하지 않을까. 존재라는 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계가 형성될 때에만 탄생되는 게 아닐까. 나와 상대가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게 서로를 허용할 때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존재하려는 치열함을 버려야 관계의 넉넉함 안에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존재하려 하지 않으면 절로 존재하게 되나니. 나를 들볶는 치열함은 좀 줄여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난데없이 철학적 생각으로 빠져들었는데요. 결론은 나무 둘 울림. 고요히 서로를 감각하는 나무 두 그루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 공명하고 울림이 있는 자리에 우리가 비로소 존재합니다.
오늘도 좌종을 치면서 내 마음에 어떤 울림이 있는지 들어봐야겠어요. 존재하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 사물, 현상이 생생하게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길. 제가 하나의 좌종처럼 깊은 울림을 내길 기도합니다.
예술가라는 그릇을 단단하게 다듬어 가고 있는 선물님. 오늘은 무엇에 우나요? 무엇이 선물님을 울리나요? 목 놓아 울어도 좋고, 가슴에 울림이어도 좋습니다. 선물님의 울림을 듣고 싶네요.
24.09.08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