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게, 느리게 괜찮아지기 2
‘모든 게 나 때문이다. 내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다. 나의 타고난 성향 때문에 마음의 병은 더 깊어졌다. 나의 26살이 이렇게 ‘불행’해진 것은 필연적이다. 난 그런 사람인 것이다.’
1년 간의 심리상담을 받으며 매일 되뇌었던 말이다.
자책하는 행위를 그만하고 싶어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한 건데, 역설적이게도 상담을 받으며 자책을 다시 하고 있었다. 악순환이었다. 자책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꼬여버린 목걸이 줄을 풀어내길 포기한 사람 마냥 내 감정을 외면했다.
상담을 받으면서 종종 나를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라는 작은 프레임 안에 가둔 채 내던졌다.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몇 개월 간 사라지지 않는 자책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했다. 유년기 얘기와 가족 얘기를 자연스레 꺼냈다. 불현듯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기억 하나가 떠올라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선생님, 초등학생 때 갑자기 소파에 누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갑자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친구들을 내가 죽이면 어떡하지?’ 그 생각을 한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매일 밤 울었어요.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하며 자책했던 기억이 나요. 죄책감이 들어 엄마한테 말을 했지만, 엄마는 사춘기라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어요.”
그렇다.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극도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 실행에 옮기지도 않을 일을 혼자 상상하며 공포와 불안에 얽매였다.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게 불안했고, 일종의 강박처럼 작용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생각을 너무 깊게 하는 성향과 선천적인 불안을 앓고 있는 듯한 나의 불완전한 자아를 포용하는 게 버거웠다. 완전해지고 싶었고 완벽을 늘 갈구했다. 그러나 무의식은 늘 나의 행복을 파괴하려는 듯했다. 그렇게 완벽한 ‘나’로부터 멀어졌다. 그런 끔찍한 생각들을 하는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결국 불안과 자책의 길을 스스로 택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그리고 축적돼 온 불안이 마음의 병으로 번졌다.
“저기 울고 있는 자신을 왜 보지를 못해요. 저기 힘들다고 웅크리고 울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전에 스스로를 보듬어주세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저기 힘들다고 울고 있는 내 자아를 상상하니 내가 측은해졌다.
불완전한 타인을 바라보는 편견 없는 시선, 날 향할 땐 유독 가혹해지고 냉철해진다. 남이 아닌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줄 줄 알았어야 했는데 늘 서툴렀다.
숱한 심리상담을 거쳤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선천적인 불안, 우울’이라는 프레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진 못했다. 남 탓을 할 바에 내 탓을 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자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야 행복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불안정해진 현재가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할수록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내 탓이 아니다, 난 늘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잠들기 전, 조심스럽게 읊으며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