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의 성장고점에서 태어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질적 삶’의 추구를 강제 받는 21세기의 선진국에서 중년을 맞이해야 하는 나. 삶의 순간순간이 가치관 충돌의 향연인 이유는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적응하고 살아내야 하는 20세기형 인간들의 공통된 숙명 때문이다.
절약과 검소, 애국심, 성공과 성실의 가치관을 20여 년간 주입받고 자라왔던 아날로그적 인간인 나는 경계 없는 국경과 문화, 격의 없는 세대 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술의 일상화와 강요된 소비를 삶의 질이라고 추종하는 독특한 정신세계를 편의대로 주입하며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모아서 많이 가지는 것은 이제 쓸모없다고들 한다. 먹고, 사고, 쓰는 삶이 '질 높은 삶'이라고들 한다. 허나 이런 21세기적 삶의 질에 적응 못하는 나는 모아야 안심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의 이데올로기가 아직 편안하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삶의 질을 흉내 내려면 필연적으로 아이는 적게 낳고, 부부는 각자 돈 벌러 밖에 나가야 하니, 가족끼리 온전히 모이는 시간은 연중행사인 여행기간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효도는 금전으로 대체되고, 계량될 수 있게 되었으며,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얻는 친밀함보다 돈을 써서 과시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더 높이 쳐주는 사회가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의 질’인가?
사실은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극단의 삶과 다를 바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질’이라고 굳게 믿고 신봉한다. 심지어 그러한 삶이 ‘가치 중심적인 삶’이라고도 말한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 맺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한 시간 안에서 손과 발을 움직여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성’이란 상위적 가치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데, 21세기 식 정성이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이 손수 밥을 지어주고, 공부를 봐주는 노동집약적인 구체적 행위에서 소비를 지원해주고, 경험을 사서 던져 주는 후원자적 삶으로 변질되어 버리니 부모의 존재감이 '수저'라고 이름 붙여진 계급주의화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적 삶에서는 불안과 불만이 필연적 동반자다. 언제 돈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남들보다 더 갖지 못했다는 불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선진국화된 사회에선 25%가 정신과 전문의를 인생의 동반자쯤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탈자본주의적 삶이 가능할까.
2019년의 한국에서 시간과 노동과 노동이면에 내재된 정성이란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삶이 가능할까. 인간의 삶이 추상적이고 정신적이고 계산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조금 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으로 내려올 수는 없을까.
논리와 편의의 탈을 쓴 인생 계산기는 비혼과 딩크를 합리화하고 동성애를 지지해야만 하며, 불편한 혼종의 문화들을 오롯이 열린 마음으로 소화해내야만 한다고 말한다. 뭐든지 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 모든 다른 것들은 무조건 공존해낼 수 있는 것일까. 사실은 자본주의적 필요에 의한 말단적 강요가 아닐까.
느리게 걷고, 덜 누리고, 덜 경험하는 대신, 다소 미련하게, 다소 불편하게, 다소 구식으로 사는 삶. 그것이 탈자본주의적 삶이고, 그러한 삶이 불안과 불만을 초월할 수 있게 해준다면 인생의 중년 이후 한번쯤 거쳐 가는 과정으로 누려볼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