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존감이란 주제를 말할 때 '자존감은 내면의 자아를 존중하는 정도'이라고 하면서도, '몸'에 대한 주제를 논할 때면 자존감과 몸이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고,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은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고들 얘기하지 않는가. 자존감은 내면의 자기의식의 총체이지만 자존감을 자라게 하는 시작과 끝에 '몸'이 자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서양사람들이 우리보다 자존감이 높다는 근거로 '그들은 우리와 달리좀처럼 얼굴을 성형하지 않는다'는 통계를 종종 끌어다 쓰지 않는가.
태어나서부터 외모 품평을 듣고 자라는 우리는 좋든싫든 외모가 자아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아이가 예쁘게 태어나면 공주병, 왕자병에 걸릴까봐 예쁘다는 말을 자제하는 부모들도 있고, 혹시나 아이가 못생겼다면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질까봐 못났다는 말을 절대 금기시하기도 한다. 사실 내 경우에는 나의 내면의 인격이나 능력보다 내 얼굴과 몸이 자아인식과 더 가깝다. 매일 보는 거울에서 '나'를 인지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내 얼굴과 몸이지 않은가.
하지만 혼돈스럽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일부인 몸도 함께 사랑하겠지. 특히 서양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캐치프레이즈가 한창 유행이다. 무리한 다이어트를 경계하고 몰아내기 위해서다. 뚱뚱한 몸 또한 자신의 일부이니, 이를 부정하거나 변형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몸을 사랑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비단 이목구비의 성형 뿐만 아니라 몸매와 털, 살의 색깔, 눈썹의 길이와 숱, 피부의 결과 각질까지도 모두 관리대상이다. 처음에는 분명 더 예뻐질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했던 갖가지 미용기법들이 이제는 '관리'라는 이름으로 판매, 유통되고 있다. 피부관리, 두피관리, 체중관리, 치아미백관리, 주기적 제모, 탈모관리, 노화관리, 네일관리, 각질관리 등 끝없이 새로 탄생하는 갖가지 '관리 시리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주기적으로 관리하여 내 몸에 꼭 드는 상태로 유지해야만' 할 것 같은 심리를 형성하게 한다.
외모는 자존감을 구성하는 명분 중 가장 관여도가 낮아야 도덕적으로 옳은 것 같은데, 실상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내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 수 있을만큼 관리를 해주어야 자존감이 높아진다고들 한다. 이상세계에서는 도통 맥을 못추는 '외모'가 현실세계에서는 그 무엇보다 가장 강도높은 자존감의 구성요소로 자리하니 우습고도 슬프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잘한다는 자각은 단순히 인지세계에만 머물지만 외모는 나의 시간과 생활, 정서와 정신세계 모두를 지배한다. 나의 기호와 선호, 능력은 가치중립적이지만 외모는 상당히 가치상대적이다. 나의 외모는 타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무살의 나와 평생을 경쟁한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진 나의 외모는 '다양성'이란 가치로 미화시킬 수 있지만 스무살의 나와의 경쟁에서 진 나의 외모는 순순히 예뻐해주기 어렵다. 스무살의 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관리'이며,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스무살의 외모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의 외모는 '잘못된 상태'이며, 그 소유주인 나 역시 잘못된 사람이다. 미디어와 의료계, 미용계에서는 '신체나이'와 '생물학적나이', '피부나이'의 개념을 구분하며 이러한 경향을 더더욱 부추긴다.
그러면서 나이 60쯤되면 갑자기 '자연스러움'을 찬양한다. 노인이 되었는데 여전히 처녀같이 입고 다니거나 지나치게 얼굴이 팽팽하거나 몸매가 탱탱하면 아름답게 늙지 못했다, 부자연스럽다며 그동안 부단히 자신을 관리해온 사람의 자존감까지 싸잡아 비판한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 몸 관리와 자연스러운 노화.
내가 늙는 만큼 너도 늙으면 서로 괜찮음을 느끼고 안도한다. 하지만 나는 늙는데 너는 늙지 않으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지가 형성된다. 세월을 거스르려는 노력, 청결과 건강의 목적을 넘어선 지나친 몸관리, 끊임없이 의심스럽고 못마땅한 내 몸. 내 몸은 잘못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