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장소연, ‘하얀거탑’이 맺어준 20년 우정

by mulgae

*현생에 치여 지난 주 업로드 일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



드라마 ‘하얀거탑’은 의학드라마의 효시로 꼽힌다. 9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종합병원’의 영향으로 병원이 배경이면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가 주를 이뤘던 한국 방송계에 연애가 배제되고 ‘병원 내 사내 정치’가 주제인 드라마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주인공 장준혁 역의 김명민은 이 드라마를 통해 믿고 보는 ‘명민좌’라는 애칭을 얻었다. 연출을 맡은 안판석PD 역시 이후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졸업’ 그리고 ‘협상의 기술’까지 히트작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당시엔 지상파 방송사 시상식이 연말 최대의 이벤트였다. 출입기자들은 과연 누가 영예의 시상식 대상 주인공이 될지 취재하는 게 주요 미션이었다. (역시 기사를 미리, 빨리 써놓기 위함이다) 2007년은 '명민좌' 김명민의 흠잡을 것 없는 연기력과 '태왕사신기' 배용준의 스타성이 격돌한 해였다.


연기력만 놓고 본다면야 단연 김명민 쪽이 압도적이었지만 지상파 방송사의 시상식은 시청률, 광고주를 두루 살펴야 한다는 것도 기자가 된 후 알게 됐다. SNS도 없던 시절이라 시청자 의견은 오로지 시청자 게시판, 그리고 포털사이트 댓글 뿐이었으니 방송사는 마음대로 대상 수상자를 정할 수 있었고 당시 '한류스타'였던 배용준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심지어 그는 목발까지 짚고 참석했다) 하지만 내 마음 속 연기대상은 명민좌였다. 그만큼 '하얀거탑'은 내게도 의미있는 드라마로 남아있다.


이 드라마는 내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첫 드라마 현장이었다. 앞서 '거침없이 하이킥'편에서 언급했듯 당시엔 드라마 종영 뒤 '종방연'을 여는 게 관례였다. 잘 된 드라마일수록 성대하게 종방연을 열어 위세를 과시했고 혹여 시청률이 잘 안나온 드라마라도 종방연에서 그동안의 회포를 풀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그러나 잘안된 드라마에서는 남탓 하다 때로 고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 해 '하얀거탑' 종방연 현장을 직접 찾아 '명민좌'를 비롯해 배우들을 직접 만나 일일이 소감을 땄다.



극중 주인공 장준혁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깊었던건 외과의국장 박건하 역의 한상진이었다. 그는 다소 권위적이지만 남다른 충성심으로 장준혁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인물이다. 한상진을 종방연에서 처음 만났는지 소속사를 통해 인터뷰를 신청한건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와의 인터뷰가 한상진의 생애 첫 인터뷰였다고 한다.


요즘 '핑계고'를 통해 본격 수다 모드를 발동하고 있지만 그는 정말 '수다쟁이 초식남'이었다. 인터뷰에서 무명배우로 일하다 아내인 박정은(당시 삼성생명)선수와 만났던 러브스토리, 일이 잘 안 풀려 해외로 이민 가려다 결국 연기자로 재도전하게 된 사연, 생수협회 회장인 부친 이야기, 노사연, 현미 등 집안 연예인 친척들 이야기 등등...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들을 유쾌하게 풀어놓았다.


https://v.daum.net/v/20070320120711435


그 이후로 우리는 '수다' 친구가 됐다. 주로 연예계 동향과 업계 뒷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나도 말이 적은 편은 아니어서 한번 통화하면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수다를 떨곤 했다. 그의 친척인 가수 현미가 작고했을 때, 울먹이며 기자인 내 전화를 받은 것도 이런 인연 덕분이다. 한상진이 출연한 '핑계고'를 시청할 때 마침 홈짐을 하고 있었는데 후배들과 밤새 떠들다 못해 아내가 자는 집까지 데려가 조용히 수다를 떨었다는 이야기에 플랭크를 하다 긴장이 풀려 박장대소해버렸다. 평소 그의 '수다본능'을 알고 있었기에 예전부터 종종 예능 출연을 권하곤 했는데 최근 드라마 업계가 어려워지자 자신의 특기를 살려 예능계 진출한 게 내심 보기 좋았다.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468/0000933551



하지만 한상진은 여전히 '연기'로 인정받길 원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드라마 '이산'에서 홍국영 역할로 주목받은 그는 연이어 KBS 주말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필모를 쌓았다. '이산'도 시청률이 높았지만 '솔약국집 아들들'은 최고 시청률 44%를 기록한 인기 드라마였다. 나는 한상진의 기사를 쓸 때 '시청률의 사나이'란 미다시(표제어)를 달아줬다. 보아에게 '아시아의 별'이란 애칭을 붙여준 사람도 당시 스포츠지 기자였다는데 한상진 하면 떠오르는 '시청률의 사나이'란 미다시를 직접 만들어준 사람으로서 내심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실제 2010년대 그가 출연한 드라마들은 대체로 시청률이 높았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마의', '결혼해주세요', '육룡이나르샤'등 인기 드라마들엔 그의 이름이 있었다. 눈에 띄는 주연은 아니지만 늘 든든히 극을 받치는 역할을 맡곤 했다.



https://v.daum.net/v/20090713115712212


몇년 전부터 드라마 업계 불황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긁지 않은 로또같은 배우다. 예전에는 남자 배우는 40대부터라고 하곤 했는데 요즘은 외모도 어려지고, 평균수명도 길어졌기 때문에 남자 배우의 중후함은 50대부터 뿜어져 나온다. 조금만 기다려라"는 조언을 건네곤 했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단편 영화를 촬영해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하필 그가 감독으로 나섰을 때 내가 퇴사해 기사를 쓰기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나를 대신할 친한 후배들과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평소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한상진처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얀거탑'에는 한상진 외에도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극중 명인대병원 외과 병동 책임간호사 유미라 역의 장소연이 그 주인공이다. 장소연은 대학시절, 교회 친구였다. 본명은 서은정. 현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숙대 중문과를 다녔다. 은정이는 27년 전인 대학시절에도 지금과 똑같았다. 말수는 적고 조용했지만 개성있는 마스크처럼 다소 엉뚱한 면도 있었다. 당시 은정이와 교회 대학부에 함께 손잡고 온 하지영이란 또다른 친구는 '미스 춘향' 출신의 미녀였고 숙대 무용과에 재학 중이었다. 때문에 은정이가 '하얀거탑'에서 유미라 역할로 출연했을 때 친구들 모두 "지영이가 아닌 은정이가 배우가 됐다고?"라고 놀라워했다. 어쨌든 친구가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니 반가웠다. '하얀거탑' 종영 후에도 은정이와 배우와 기자로 만났다. 대학시절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연예계에서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니 웬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https://v.daum.net/v/20070409154017079


은정이 마스크가 독특한 편이기 때문에 배우로 롱런할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고생을 좀 한 것 같았다. 주로 안판석 감독 드라마의 조연, 혹은 영화 단역으로 출연하곤 했다. 은정이가 대중에게 각인된건 영화 '곡성'을 통해서다. 극중 귀신들린 효진의 엄마이자 주인공 종구의 아내 역을 연기했다. 정확하게는 종구 역의 곽도원과 열애를 공개하면서 대중에게 이름 석자가 각인됐다. 두 사람은 결국 결별했지만 이후 은정이는 연기자 '장소연'으로 꾸준히 활동 중이다. 단역에서 조연으로,그리고 주연까지 성큼 올라섰고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친구의 수상 소식을 단독 기사로 전하는 것 또한 나름의 쾌감이었다.


https://www.viva100.com/20180521010007274


https://www.viva100.com/article/201705023835895


20여 년 기자 생활동안 수많은 연예인을 만났지만 '분칠하는' 그들에게 성큼 마음을 주는게 쉽지 않다. 연예인들 역시 기자라고 하면 일단 긴장하고 어려워한다. 어떤 기자들은 친화력이 좋아 연예인들과 금방 언니 동생 하고, 어떤 기자는외모가 빼어나 연예인이나 관계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도 한다. 나는 성격상 누군가와 바로 친해지기 힘들고 외모도 다소 날카로운 편이다. 때문에 내가 남들에게 붙임성있게 잘 다가서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쉽게 말을 붙이지도 못한다.


저연차 때는 이런 내가 "기자로서 자질이 없나"라고 위축될 때도 있었다. 인상이 좀 순해졌으면 하는 바람에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다.(티나지 않게 해달라고 했더니 정말 쌍수한 사실을 아무도 모를 정도로 티가 안난다. ㅡㅡ) 하지만 학창 시절 친구든,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든 사회에서 좋은 벗을 만나는건 또다른 행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과 두루두루 친해지지 못했지만 한번 연을 맺으면 끝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삶, '기자'라는 타이틀을 떼도 만날 수 있는 몇 안되는 연예인 친구들, 그들과 깊이있는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지금에 만족하고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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