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말차림법 7강
수업내내 떠오른 이미지는 늑대다. 달빛아래 벼랑 끝에 서서 "아호~~~"우는 늑대이다. 윤리와 존재 그리고 인식의 끝에 홀로 선 늑대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향해 울부 짓는다. 늑대의 울부짐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늑대의 의도는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이것은 "늑대가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서양철학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이다. 지난시간까지 말차림법에 곁들여 종종 한국말 속에 들어있는 윤리적 잣대를 소개해 주셨다. 나를 규범화시키는 '나랏사람', 한국사람의 바탕이 되는 '바흐(바람흐름, 풍류)', 이쪽 저쪽이 함께 풀어가는 '함께성' 등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섬세한 윤리 의식을 살펴보았다.
이번시간에는 작정하고 '논리' 문제를 다루었다. 선생님은 한국말을 금광에 비유하신다. 만약 세운상가 아래 금광이 있다면 사람들은 열일 제쳐두고 세운상가 아래를 파려할 것이다. 설령 금광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금광이 있다고 믿으면 무조건 파고 본다. 선생님은 한국말을 일종의 금광이라 믿는데, 그 이유는 신라의 이두를 살피면서 한국말 속에 들어있는 엄청난 논리구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국말 금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기면서부터 선생님은 한국말을 파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말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심지어 일상에서 늘 한국말로 소통하는 사람들조차.
서양의 논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처럼 생각은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생각의 바탕이 인식이기에 인식론과 존재론은 반드시 함께 다루어진다. 한국말에서도 역시 둘의 관계가 밀접하다. 먼저 인식론부터 살펴보자.
서양말 인식론
인식론은 크게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분된다. 합리론은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추론하는 것이기에 '주어진 정보'보다 '추론'에 무게 중심이 있다. 경험론은 경험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하기에 '경험하는 정보'에 무게 중심이 있다. 합리론에서 '추론'은 굳이 경험이 없어도 된다. 그래서 경험이전의 문제도 함께 다룰 수 있게 되는데 이를 '선험'이라 말한다. 선험이란 "경험에 앞선다" 그러니까 "경험하기 이전에 정보들이 주어진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유전적 요인이다. 이를 독일의 관념론자 칸트는 '순수이성'이라 말했다. 그는 합리론적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불린다.
칸트 또한 말을 다룬다. 그의 말을 사람들은 '명제'라 부른다. 한자로는 命題이고 영어로는 Proposition이다. 명제란 일종의 판단의 기준으로 포지션이나 주어진 문제를 선택하기 앞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져보기 위한 기호다. 대부분 말이나 글에 해당된다. 즉, 말이 되냐, 안되냐를 따져보는 것이다.
서양 논리학에서 명제는 다발말(문장)을 기준으로 삼는다. 다발말은 곧이말(주부)과 맞이말(술부)로 구분된다. 주부란 subject이고, 술부란 verb 이하이다. 이를 주술관계라고 하는데 주부와 술부가 일치되면 참이고, 일치되지 않으면 거짓이다. 이를 간단하게 A와 B로 표현한다. 그래서 A=B이고 B=C인 경우 A=C가 된다. 가령,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에서 '총각'은 A이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B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미혼이다"에서 '미혼'은 C이다. 이 두 다발말을 근거로 "총각은 미혼이다"는 참이 된다. 즉 총각(A)=미혼(C)가 성립된다.
칸트는 이렇게 참으로 분석 가능한 명제를 '분석명제'라 말하고, 참인지 거짓인지 분석할 수 없는 명제를 '종합명제'라 말한다. 가령 "총각은 불행하다"라는 말은 총각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기에 합리적 분석과 검증이 불가능하다. '불행'처럼 합리적 추론이 아닌 경험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명제가 '종합명제'이다. 칸트는 선험과 경험, 분석과 종합을 다시 조합해 분석적 선험명제, 종합적 선험명제, 분석적 경험명제, 종합적 경험명제를 구분한다. 분석적 선험명제는 너무 뻔하다. 종합적 경험명제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분석적 경험명제는 '경험'을 '분석'할 수 없기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칸트는 '종합적 선험명제'를 즉, 나의 경험을 뛰어 넘어 여러 경험들을 종합해 경험 이전의 선험적으로 주어진 상황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칸트의 명제들은 현대 철학과 언어학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영미권 철학을 분석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다. 분석철학이란 말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말의 대응관계를 면밀히 따지는 철학이다. 쉽게말해 언어학이다. 초기 언어학은 칸트처럼 대응관계를 면밀히 따져 말의 논리적 구조를 밝혀내려 했다. 분석철학자들은 말도 수학처럼 엄격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콰인과 같은 언어학자는 '분석명제'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계집'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자. 분석명제가 되려면 '계집'이라는 말 안에 모두가 동의하는 술부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한국말 사전에서 계집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최봉영 샘은 '계집'이란 본래 "집에 계속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신다. 그럼 우린 "계집"의 사전적 의미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본래 의도의 "계집" 의미를 취할 것인가. 이렇듯 단어의 개념 자체가 논란이 될때 분석명제는 바탕근거가 불분명해진다. 즉 '분석명제'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소련의 발달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아이가 '말'을 배워가는 과정을 살피면서 단어의 성장 과정을 발견한다. 아이는 처음 배웠던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갖고 있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 단어의 의미가 성장한다. 이는 발달과정에 따라 혼합체, 복합체, 개념화라는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단어의 개념은 결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명제의 합리적 추론은 결코 경험과 분리되어 따질 수 있는 없다는 의미다. 언어에 있어 합리론과 경험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합리론은 모든 언어적 기호가 아닌 오로지 '숫자' '음표' 같은 시그널(인덱스) 기호에서만 가능하다. 즉 합리론은 수학과 음악에 국한되어 따져야만 한다.
은유언어학자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에서 칸트, 콰인, 촘스키까지 모두 언어를 수학처럼 생각했다고 지적한다. 경험이 결부된 언어는 수학이 될 수 없다. 언어학이 제대로 연구되기 위해서 수학적 은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언어는 경험과 더불어 구성되기 때문에 언어는 몸의 신경패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2세대 인지과학에 의해 검증되었다. 즉 은유언어학이 과학적 사실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1세대 인지과학는 순진하게도 언어의 수학적 접근을 믿었다가 크게 상심한바 있다. 이후 철학적 인문학과 과학적 신경학은 분열되었다가 은유언어학의 등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언어학과 신경과학은 하나의 학문이 되었다. 이를 신경 언어학이라 부른다.
한국말 인식론
1세대 인지과학은 언어를 합리적 인식으로 보았다. 이것이 기존 언어학의 한계였다. 2세대 인지과학은 경험을 수용함으로서 언어의 '생각하기'를 인정한 것이다. 디자인학교 철학교사 이성민 샘은 정신을 "지성과 이성"으로 구분한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공지능이 대체할 정신력은 '이성'이 아닌 '지성'이라고 말한다. 아렌트도 지성은 '인식하기'이고 이성은 '생각하기'로 구분로 구분하는데, 종합하면 인공지능이 사람의 정신을 대체하는 것은 '지성=인식하기'이지 '이성=생각하기'는 아니란 말이다.
이 구분과 더불어 최봉영 샘의 한국말 통찰이 빛난다. 최봉영 선생님은 고려시대 한국말 고어를 넘어 신라시대 이두를 살피다가 "이다" "안이다"를 발견하셨다. 이 두 말 덕분에 선생님은 한국말 속에 담겨진 한국사람의 논리적 잣대를 발견하셨다고 하신다. 한국말에서 논리는 크게 3가지 말로 구분된다. "이다" "아니다" "바뀌다"이다. 이를 신라의 한국사람들은 "이다" "안이다" "밖이다"라고 표기했다. 이미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다" "아니다" "바뀌다"라는 논리는 결국 "안과 밖"의 문제이다.
"이것은 책이다"라는 다발말(문장)이 있다. 이때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실체를 의미한다. '책'은 내 머리 속에 있는 관념이다. "이것은 책이다"라는 말은 눈앞의 실체와 머리 속 관념의 일치한다는 뜻이다. 실체와 관념 대응이 일치할때 한국사람들은 "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럼 일치하지 않으면, 가령 눈앞에 '돌'이 놓여 있으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이때 "아니다"는 "안이다"이다. 이때 "안이다"란 실체인 '이것'은 돌이기 때문에 관념인 '책'은 내 머리 속 안에 있다는 의미다. 즉 한국말에서 논리는 다발말(문장) 내의 대응관계가 아닌 말하는 사람의 관념과 실체의 대응관계로 "이다, 안이다"라는 논리를 따진다는 의미다. 이것은 단순한 합리적 추론이 아닌 경험까지 모두 고려된 추론이다.
이번엔 "이것은 책이 돌로 바뀌었네"라는 다발말을 보자. 가끔은 '돌'을 생략하고 "이것은 책이 바뀌었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바뀌었다'는 '밖이었네'이다. 이렇듯 한국사람은 밖에서 무언가가 일어난 상황을 "밖이다"라고 말한다. 다발말은 좀 더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것'은 눈앞에 있는 실체다. '책'은 말하는 사람의 관념이다. 밖에 있는 실체 '이것'이 바뀌게 되면서 관념 안의 '책'이 밖과 어긋나게 된 상황이다. 그래서 "책이 바뀌었네=밖이었네"라고 말한다. 이렇듯 한국사람은 몸 바깥쪽에서 일어난 실체 변화로 관념이 어긋난 상황에서 "밖이다"라고 말한다. "이다-안이다"는 대응이 안쪽에서 어긋난 상황이라면, "이다-밖이다"는 대응이 바깥쪽에서 어긋난 상황이다.
한국사람은 대응을 다발말 안에서만 판단하지 않는다. 반드시 말하는 사람의 '안'과 경험하는 실체인 '밖'의 관계를 고려한다. 최봉영 샘은 이를 '여김의 논리'라고 말한다. '여기다'는 본래 '녀기다'로 이 말의 '앛씨말(명사형)'은 '넋'이다. "넋이 빠졌다" "넋이 나갔다"는 말은 넋 안에 너무 함몰되어 있거나, 넋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넋이 없으면 여김도 없다. 즉 경험은 하되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상황이다. 인식이 빈약하니 당연히 생각도 어설프다.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신 차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방향을 안다는 것이다. '방향'은 한자어이다. 한국말로 방향은 '녁'이다. 동녁, 서녁 등에 '녁'이 쓰인다. '넋'과 '녁'은 바탕을 함께 하는 말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기에 앞뒤라는 방향이 중요하다. 방향을 모르면 불안하다. 방향을 알아야 비로소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알게 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의 방향을 알기 위함이다. 역사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경로를 아는 것이다. 이 경로를 알면 미래의 방향을 다소 짐작할 수 있다. 이 방향이 바로 '녁'이고 '넋'이고 '여김'이다. 사람이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루려면 반드시 '여김=넋=녁=방향'을 알아야 한다.
한국사람은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겉과 속'이다. 겉과 속의 논리가 우리가 흔히 아는 논리학이다. 이 논리학은 "참이다" "속이다"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참이다"는 '(속이) 차 있다'는 의미이다. 한자로어 '참 진眞'에서 '眞'의 바탕은 '곧을 직直'으로 대나무 같은 곧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신다. (사실 나는 眞이 숟가락으로 솥 안의 밥을 먹는 그림이라 여기기에 곧음 보다는 채움으로 보았는데... 확실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최봉영 샘의 말에 따르면 한국사람은 이 '곧음'을 '채움'으로 번역한 것이다.
참기름 병이 있다고 해보자. 겉에 참기름이 써있고 그 안에 참기름이 있으면 이것은 참이다. 그런데 참기름이 아니라 물이 들어 있으면 '속이다' 혹은 '거짓이다'이다.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을때 한국사람은 '속이다' 혹은 '거짓이다'라고 말을 한다. '속이다'는 겉을 잣대(기준)으로 삼아 판단할때 하는 말이다. '거짓이다'는 속을 잣대로 삼아 판단할때 하는 말이다. '거짓'은 '겉짓'을 의미한다. 속과 달리 겉은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하기 때문이다. 속에 물이 있으면 '물'이라고 써야 하는데 이를 속이기 위해 '참기름'이고 쓴다. 이런 행위가 바로 '거짓=겉짓이다'
작다 크다
'겉'과 '것'은 바탕을 함께 한다. 한국말에서 '것'은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것'을 바탕치기하면 한국사람이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것이란 무엇일까" 바로 "그어진거"다. '것'은 '긋다'로 무언가 그어졌을때 비로소 것이란 존재가 생긴다. 우리는 주로 선으로 긋는다. 선을 그으면서 그려진 '금'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 생긴다. 겉과 속도 생긴다. 금의 겉과 속의 경계가 '끝'이다. '겉'과 '것' '금'은 모두 '끝'과 바탕을 함께한다. '끝'도 '긋다'와 소리가 유사하다. '긋다'는 원초적인 행위다. 그어진 선은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 인식요소이다. 서양미술에서는 소묘이고, 중국미술에서는 '서예', 현대인문학에선 '쓰기'이다. 사람의 망막에는 간상체와 추상체라는 원추세포가 있어 전경과 배경을 분리할때 선으로 경계를 짓 긋는다. 이 선들은 신경세포의 패턴으로 활성화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크다'의 '크'도 '긋다'과 바탕을 함께 한다. '크다'도 '끝'과 마찬가지로 금의 끝에 이른다는 말이다. '너무'는 '너머'를 의미하기에 '너무 크다'는 금의 한계를 넘었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너무 많다'가 있는데, 이때 '만'은 다 채워진 상태, 금에 다다른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너무 많다'는 만을 넘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만'을 들으면서 한자어 '찰 만滿'이 떠올랐다. '많다'의 '만'이 일찍히 한자어에서 와서 토속 한국말이 된 고어인지 혹은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공유했던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작다'는 이쪽, 저쪽 할때 혹은 이짝, 저짝 할때 '쪽'과 '짝'을 의미한다. 이 말은 지난번 수업에 풀었으니 생략하겠다. '작다'는 '짝다, 쪽다'이기에 아무래도 작은 느낌이 든다. '작다'의 '이쪽'과 '저쪽'이 서로 함께하면 '크다'가 된다. 나 혼자는 하나의 쪽이나 짝으로 존재하는데, 나와 너가 함께하면 '우리'가 된다. 우리는 상대적 크기의 개념으로 나보다 '큰 나'를 의미한다. '크다'의 '크'는 둘의 한계, 끝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짝을 넘어 여러 쪽이 함께하면 그 한계가 더 커진다. 한국사람들은 '작은 나'보다 '큰 나'를 선호하기에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가 되려면 커야 한다. '큰다'는 것은 두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키가 크는 물리적 큼과 마음이 크는 정신적 큼이 있다. 물리적 키는 내가 가진 유전적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반면 마음의 크기는 무한대다. 노력하는대로 커지는 것이 마음이다.
한국 사람들은 참하고 큰 사람을 좋아한다. 작은 것은 채워봐야 별거 없다. 큰 것도 안이 비어 있다면 실속이 없다. 단순히 큰 것만이 아니라 속까지 차야 비로소 인정된다. 참하게 크기 위해서는 단단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클 이유도 채울 이유도 없다. 한국말에서 '믿음'음 '밑'을 의미한다. 내가 딛고 있는 바탕이 바로 '믿음'이다. 밑이 탄탄해야만 안심하고 딛고 커갈 수 있다. 건물 짓기를 상상해 보라. 무른 땅에 지으면 아무리 크고 멋지게 지어도 언제 무너질지 몰라 늘 불안할 것이다. 과거 제2롯데타워가 그런 논란에 휩싸였다.
중국사람에게 믿음은 '信'이다. 이 한자어의 짜임은 '人'과 '言'이다. 중국사람은 '사람의 말'을 믿음의 잣대로 삼았다. 한국사람은 자신이 딛고 있는 바탕을 믿음의 잣대로 삼았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음의 잣대로 삼을 것인가. 사람의 말? 딛고 있는 땅? 나는 왜 한국사람들이 자신이 쓰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다. 최봉영 샘이 발견한 한국말은 엄청난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믿음의 잣대를 갖고 있다. 그리고 현대 언어학과 인지과학이 이를 뒷받침한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리하면 '논리'란 말의 판단 기준, 즉 생각하기 기준이다. 생각하기(이성)을 하기 위해서는 인식하기(지성)이 요구된다. 생각하기를 요리에 은유하면 인식하기는 재료이다. 재료가 싱싱하고 풍성할때 요리의 품격이 달라진다. 요리에서 재료가 중요하듯, 생각에서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 인식은 바로 '경험'이다. 경험이 인식을 거쳐 생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여김=넋=녁=방향'이다. 우리가 말로 소통하는 것은 모두 이 여김의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이 여김의 논리는 '안과 밖' 그리고 '겉과 속'의 구분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이 구분을 잣대로 삼아 '작다'와 '크다' '참되다'를 따진다. 이것이 한국사람의 논리다. 최봉영 샘은 일찍이 한국말에서 이 섬세한 논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논리를 갖고 이제 존재론으로 가자.
서양과 불교 존재론
5~10세기까지 기후변화와 전염병, 전쟁, 바이킹 침입 등 곡절을 거듭했던 서양은 1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이때부터 약 300년간 존재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주로 신의 존재여부를 논했는데, 11세기 안셀무스는 신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실재론(실제로 있음)'을 주장한다. 13세기 오컴 출신 윌리엄은 신은 사람이 지은 말이라는 '유명론(오직 이름뿐)'을 주장한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보편적 개념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바나나'는 분명히 있다. '과일'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말일 뿐일까. 식물은? 생명은? 우주는? 신은? 이런 단어들을 언어에서 '보편적'이라고 말하기에 이를 '보편논쟁'이라고 말한다.
사실 언어는 오컴의 주장처럼 사람이 만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말이 '실재'한다고 생각했을까. 레이코프와 존슨은 '기본층위 범주'라는 개념을 갖고 실재론의 타당성을 설명한다. 생물의 범주분류는 '종-속-과-목-강-문-계'로 구분된다. 코끼리 종은 여럿이 있다. 아프리카코끼리, 인도코끼리 등. 우리는 이 종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코끼리와 토끼는 또렷하게 잘 구분한다. 이 구분이 속이다. 그런데 과로 넘어가면 또 흐릿해진다. 고양이과 동물들을 구분해 보라.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들은 생물의 '속' 범주를 잘 기억하고 구분한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 '속' 범주가 '기본층위 범주'라 말한다. 사람들은 이 '기본층위 범주'를 바탕으로 삼아 모든 말에 확대적용시키려 했다. 속 인식을 근거로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바로 이 기본층위 범주에서 비롯되어 신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에 근거해 말을 만들고 소통했다는 점에서 실재론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신'이나 '천국'처럼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말, 실재하지 않는 말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플라톤이 '실재함'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불교는 '실재하지 않음'에 촛점을 맞춘다. 불교의 유명한 격언 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란 의미다. 오컴의 모든 것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라는 주장과 맥을 함께 한다. 일체유심조의 핵심은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그래서 테레비에 나오는 스님들이 모두 가슴을 슥슥 문지르면서 마음을 다스리라고 조언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볼때마다 안타깝다. "그 사람의 상황을 모르면서 저래도 되나... 공감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라며 중얼거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을 들으면 언듯 그런듯 싶기도 하지만 언어의 경험적 바탕을 따지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체유심조'의 불교는 언어가 외부세계와 상호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 부정을 극단적으로 밀고가면 모든 것의 실체성을 부정한다. 이는 감각의 부정이다. 마음을 다스리려면 밖과 겉의 감각=실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면 오로지 '안'만 생각하게 된다. 이게 명상이다.
나아가 안과 밖, 겉과 속은 상호적이기에 밖과 겉을 부정하는 순간 안과 속도 부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경험의 감각=실체성을 부정해 "내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순간 내 마음의 실체성 또한 부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나'의 실체성과 존재성이 모두 부정되어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게 '덧없음'이다. 가끔 스님들은 이 덧없음을 근거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는 등 나쁜 짓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분들이 불교에서 항상 골치인데... 불교 교리상 존재는 허무하기에 이분들은 늘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유명론은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는 반면 실재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존재론적 절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절대주의라는 말은 미술사에도 등장하는데 러시아의 말레비치와 같은 사람들이 이 절대주의에 속한다. 검은 사각형만 덜렁 있는 그림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다. 그는 사각형을 미술요소의 절대적 요소로 여긴다.
절대주의라는 말은 정치학에도 있다. 근대 서양의 정치체제를 절대주의 왕정이라고 말한다. 이 절대주의는 17세기 수학자였던 토마스 홉스의 주장이다. 그는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늘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한다고 생각했다. 폭력적 투쟁 상황을 종결시키기 위한 해법으로 왕이 종교와 정치적 권력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는 이를 '리바이어던'이라 말하는데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괴물이름이다. 참으로 괴물같은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그는 사제들과 귀족들의 살해 위협이 시달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90세를 넘겨 살았다. '욕을 많이 먹어야 오래산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닌듯 싶다.
절대주의는 프랑스 혁명으로 부정되는듯 보였지만 실상 서양의 절대주의는 지속되었다. 서양사람들은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구분하고 우월한 강자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았다. 이를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고 말했다. 19~20세기 식민지는 우승열패의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이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 바다 건너 트럼프를 보라. 그의 안하무인한 태도가 바로 서양 존재론의 깊은 뿌리 중 하나인 절대주의 때문이다.
한국말 존재론
한국말에 있는 존재론은 약탈과 정복, 지배의 절대주의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책이다" "이것은 책이 안이다" "책이 바뀌었네"라는 한국말의 여김 인식론에서 보았듯 한국사람은 끊임없이 경험적 실체인 '이것'과 관념적 기억인 '그것'의 관계를 묻고 따진다. 말 안에서 안쪽과 바깥쪽이 늘 함께 한다. 모든 존재를 '쪽'과 '짝'으로 보면서 '큼'을 지향하기에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은 나와 이쪽과 저쪽 모두의 실체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이 실체들의 변화를 존중한다. 이 변화는 한국말에 섬세하게 반영되어 있다.
"나는 학교에 간다"는 "나" "학교"라는 실체가 함께 "간다"라는 일을 풀어간다. 이 관계는 엄청나게 많은 형태로 변주될 수 있다. "나도 학교를 간다" "나만 학교도 간다" "나는 학교만 갔다" "나만이라도 학교에 갈 것이다" 등등 '곧이말X맞이말X풀이것말'의 경우수를 따지면 수백가지 이상은 나올 것이다. '나'와 '학교'의 두 쪽이 수백가지 넘는 일을 함께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서양말 I go to school의 경우 주부와 술부의 관계는 얼마나 많을까... 나는 영어를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한국말의 섬세한 변화를 모두 담아내기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한국말은 상대적이다. 상황에 따라 상대를 고려한다. 풀이것말이 맨 마지막에 나오기에 끝까지 상대와의 긴장을 놓치 않는다. 어떤 변화가 와도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말은 아래에서 위로 말을 쌓는다. 그래서 '말씀'이다. 서양말은 위에서 아래로 말을 던진다. 그래서 'ject'다. 그래서 한국말은 상황을 살피며 말을 쌓아 올리기에 어찌될지 짐작이 안된다. 예를 들어 서양사람은 "I go"라고 말을 던지는 순간, 말하는 사람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I go to school"이라고 말하면 구체적인 의도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사람은 '나'위에 '학교'를 쌓아, "나는 학교에"라고 말하면 의도가 엿보이지만 아직 모호하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라고 말하면 다소 구체적이지만 아직 모른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이라고 말하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라며 답답해한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라고 말하면 "어휴 답답해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라며 짜증을 낸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이미 포기한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려고"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는 것도 싫고 해서 안가려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자유롭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미쳐버린다. 이것이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변화에 대처하는 요령이다. 한국말은 말하면서 생각을 계속 바꿀 수 있기에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대응한다.
서양사람들이 상대주의를 발견한 것은 물리적 현상을 통해서다. 고전물리학까지는 절대적 정합성을 추구하며 상대성을 폄하해 왔는데, 아인슈타인의 이후로는 은근 상대성을 찬양한다. 양자역학에 의해 현대과학이 찾은 상대성을 말할때보면, 이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이 맞나 싶다. 마치 동양의 노장사상, 아니 한국말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한국사람인 내가 과학책 읽기가 편했나... 하지만 인문학적 상황에서는 태도가 확 바뀐다. 이제와 보니 말 자체가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구나 싶다.
한국말 존재론은 상대주의적이다. 그래서 절대적 대응관계와 같은 정답보다는 경험에 근거한 상대적 대응관계인 적절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한자어 '중'을 '가운데 중'이라고 푼다. 한자로 중은 정확히 한가운데를 말한다. '가운데'와 '한가운데'는 다른 의미다. '한가운데'가 중심점을 의미한다면 한국말 '가운데'는 '가에서 온 데' 그러니까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한국말 자체가 이러니 이 말을 쓰는 한국사람들도 당연히 이런 태도를 갖게 된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변화에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그게 한강의 기적이다.
한국말 말차림법 ; 섬세한 매듭말
앞의 강의록을 읽어본 분은 알겠지만 풀이것 말은 또 매김마디말과 마침마디말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말 미래형 "갈 것이다"에서 "갈"은 "것이다"를 매겨주는 매김마디말이다. 이 매김마디말과 유사한 이음마디말이 또 있다. 약 14가지 종류다. 찾으면 더 나올지 모른다. 일단 '먹는다'를 갖고 나열해 보면,
01. 일이 있음 : 나는 밥을 먹고 있었다.
02. 일이 됨 : 나는 밥을 먹게 되었다.
03. 일을 겪음 : 나는 밥을 먹어 보았다.
04. 일의 흐름 : 나는 계속 밥을 먹어 왔다. 나는 밥을 다 먹어 간다.
05. 일이 되어짐 : 나는 밥이 먹어 진다.
06. 일을 해둠 : 나는 밥을 먹어 두었다.
07. 일을 해줌 : 나는 잡을 먹어 주었다.
08. 일을 해치움 : 나는 밥을 먹어 치웠다.
09. 일을 해버림 : 나는 밥을 먹어 버렸다.
10. 일을 시킴 : 나는 그에게 밥을 먹게 했다. 나는 그에게 밥을 먹도록 했다.
11. 일을 이룸 : 나는 밥을 먹고 말았다.
12. 일을 금지함 : 너는 밥을 먹지 마라.
13. 일을 않음 : 나는 밥을 먹지 않았다.
14. 일을 못함 :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곧임말X맞이말X(이음마디말+마침마디말)의 경우의 수들을 고려하면 엄청나다. 한국사람은 굉장히 섬세한 매듭말을 갖고 있기에 이쪽과 저쪽이 함께 함에 있어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이런 섬세한 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해 보라. 가장 큰 장점은 세상의 섬세한 변화를 인지하고 그것에 대응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시점에서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한국사람은 이처럼 섬세한 말이 있는데 왜 구한말 조선은 세상의 변화에 그토록 어리석게 대응했을까요?" 선생님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자어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경직된 문자를 쓰고 있으니 당연히 경직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고, 변화에 대한 대응을 잘할리 없지 않은가. 알다시피 해방 이후 기득권의 어리석은 정치는 계속 되었다. 한국의 대통령 중 탈없이 임기를 마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 많은 부정부패와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한국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한국말 덕분이 아닐까 싶다. 한국말 말차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세종께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이기다 지다
한국말로 '이기다'에서 '이'는 실체이고, '기'는 수직이다. '이기다'는 어떤 기준이 되는 지점에서 '(머리에 무언가를)이고 올라온 상태다. 지다는 기준이 되는 지점 아래로 내려간 상태다. 격투기 경기에서 파운딩을 보면 이긴 사람은 위에 있고, 진 사람은 아래에 있다. 한국말에서 '이기고 지는' 과정 역시 섬세하게 여러 갈래로 나뉘어 말해진다. 크게 4가지로 '우기다' '겨루다' '다투다' '싸우다'이다.
'우기다'에서 '우'는 '위'이고 '기'는 수직이다. 우기는 것은 서로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겨루다'의 한국말 고어는 '겻구다'로 곁에 있는 것을 서로 견주는 것이다. 곁에 있는 것은 각자 따로따로 한 것이다. 이 것들을 견주어 비교하는 것이 '겨루다'이다.
'다투다'의 한국말 고어는 '닷호다'이다. 이는 서로 누가 '다움'에 가까운지 따지는 것이다. 다투는 사람은 겨루는 사람처럼 따로따로 한 것을 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를 놓고 누가 옮고 그름을 따진다.
'싸우다'의 한국말 고어는 '사호다'이다. 이는 '사다'로 무언가를 사서 갖는 것이다. 그래서 '싸우다'는 서로 갖기 위해 겨루는 것이다. '싸움'은 한 사람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갖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이처럼 한국 사람은 이기도 지는 문제도 섬세하게 구분하다. 이 내용은 강의를 듣던 학생이 지난 주 질문한 내용을 정리해서 알려 준 것이다.
앞서 나는 이 강의를 듣는 내내 늑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근현대 문명의 인류는 결코 어질지 않았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말할 정도로 서로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100년을 보냈다. 아니 대부분은 서로 소유하려는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이 싸움을 통해 서양문명은 동양문명 위에 올라서서 마치 정복자처럼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승리를 주도란 미국은 특히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다. 세계경찰 노릇을 하며 여기저기 외교적 참견을 하고, 말을 안들으면 무력으로 짓눌렀다. 기분이 더러워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미국의 무역적자를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오해다. 달러가 기축통화였기에 그들은 원하는대로 돈을 찍어 낼 수 있었다. 돈을 찍어 사고 싶은 것을 사면 되기에 무역 적자는 당연하다. 미국은 갖고 싶으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서양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적으면서 존재론적 절대주의를 인식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강한 힘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슬람 문명은 서양보다 일찍 종이와 인쇄 기술, 숫자 기술을 도입했지만 1차 대전에서 크게 패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상실했다. 중국은 18세기 말까지 세계를 호령했지만,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서 패하며 국권을 상실했다. 우리 땅 조선도 탈아입구를 선언한 일본에 의해 유린당했다.
나는 늘 늑대를 양과 견주곤 한다. 늑대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인식하고 존재를 느낌에 있어 상당히 다르다. 늑대 신화를 가진 로마는 끊임없이 주변국가를 약탈하고 정복하고 지배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부족들 상당수가 늑대 신화를 공유한다. 얼마전까지 유행한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들은 모두 늑대 한마리씩 끼고 다니며 상대를 위협한다. 북유럽도 늑대 신화가 많다.
반면 다소 남쪽의 중국문명은 '양'을 좋아한듯 싶다. 중국의 한자 중 아름다움(美)과 의로움(義), 착함(善)을 의미하는 한자는 모두 '양' 그림을 공유한다. 중국의 한자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은 늑대보다는 양에게 끌렸던 듯 싶다. 이들은 늑대처럼 상대를 억압하기 보다는 함께함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양떼처럼.
그럼 한국사람들은 늑대와 같을까 양과 같을까. 한국의 단군신화에는 참을성 없는 호랑이와 참을성 높은 곰이 등장한다. 모두 사나운 동물들이라는 점에서 늑대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북방 초원 등 여기저기서 이주해온 한국사람들은 늑대가 아니라 양처럼 어울리려 했다. 한국은 일찍히 한자를 사용했지만 이상하게도 중국제국에 완전히 편입되거나 동화되진 않았다. 몇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끊임없이 국경을 분리해 독립된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사람들도 한국사람은 길들이기 어렵다 싶었는지 언젠가부터는 이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나는 한국사람 안에 여전히 늑대 DNA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보통의 늑대, 정복과 지배를 일삼는 서양의 늑대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늑대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성질을 스스로 누르며 살아간 사람들이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성 높은 곰을 신화로 가져온 것은 늑대적 습성과의 단절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양은 목동이 툭툭치면 함께 한다. 하지만 늑대는 쉽게 함께하지 않는다. 설득력이 있는 긴밀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늑대들이 함께 하려면 섬세한 말차림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말 말차림은 이런 상황이 반영된 것이란 생각이다. 달빛 아래 늑대인간은 섬세한 말로 간절히 호소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함께 하길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아닐까.
수업을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나는 서양의 존재론적 허무주의와 절대주의가 갖는 영원불멸성을 언급하며 그들이 왜 수학에 강점을 갖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집트의 린디 수학 파피루스를 보면 지중해 중심의 문명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학적 체계를 갖고 있었다. 반면 한국말에는 이런 수학적 기록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근현대 서양 문명이 거대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수학과 과학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한국말이 갖고 있는 인식론, 존재론적 단점이 영원불멸성보다 유연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할 수" "일 수" "될 수"처럼 "수"는 가능성을 말한다며, 한국말이 수학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을 갖기 보다는 '가능성'을 갖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대답하셨다. 과연 그렇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우리는 이래서 안돼" "나는 이래서 안돼"라는 태도가 가장 위험하다. 한국말의 섬세함은 수학적 섬세함으로 연결지어 생각 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한계에 다다른 수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한국사람들은 세계수학대회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한국역사에서 한국사람이 한국말에 주목했던 적은 몇차례 없다. 신라시대 불교를 도입할때와 조선시대 유교를 도입할때 식민지 이후 기독교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이다. 번역이 필요할때와 한국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을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한국말 그 자체보다는 외국말에 대한 관심때문이다. 외국말을 번역하려면 한국말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최봉영 샘은 한국말 그 자체에 주목한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세종이 한글을 발견했을때 외엔 없었던듯 싶다.
선생님이 한국말에서 발견한 금광은 바로 한국말 논리다 "이다" "안이다" "밖이다"라는 안과 밖의 논리와 "참이다" "속이다" "거짓이다"라는 겉과 속의 논리다. 한국말 논리학을 통해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의 존재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식론과 존재론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섬세함을 갖고 있다. 레이코프와 존슨도 '안과 밖' 기준을 판단의 기본층위 범주로 보지만 이처럼 섬세한 논리로 풀어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것을 풀어낼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가 영국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듯, 한국말도 한국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 유산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말 안에는 지금까지 논리와 차원이 다른 윤리론, 인식론, 존재론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말 바탕치기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관점들도 많다. 이 모든 것이 세계의 지성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란 생각이다. 최봉영 샘의 강의 내용이 잘 정리되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차림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말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최봉영 샘의 한국말 말차림법은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