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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pr 28. 2020

‘말’이란 무엇인가

한국말 말차림법 6강

어느덧 6강째다. 강의의 약 1/3 지점을 지나면서 생소했던 용어들도 익숙해졌고 긴장도 완화되었다. 덕분에 다소 여유가 생긴듯 싶다. 선생님은 오늘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위해 오셨다면서 이제부터는 한국말 말차림법은 중간중간 간단히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한국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하셨다. 그리고 지난주에 있었던 일과 생각을 몇가지 들려주셨다. 대강 정리해보면.

선생님은 강원도 영월에 작은 집을 하나 짓고 오랫동안 나무를 심어오셨다고 한다. 땅을 고를때 중요한 것은 기후이다.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 지표가 대나무와 감나무이다. 감나무가 자라는 땅은 겨울을 날만 하다고 하셨다.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싸리나무의 바탕치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한국사람은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싸리나무라 통칭해서 부른다. 싸리나무는 본래 '사리나무'이다. 여기서 '사리'는 '살' 즉 화살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싸리나무는 화살의 재료로 쓰였던 나무다. 한국사람들은 활쏘기를 중시했다. 그래서 활과 화살의 재료가 되는 나무들이 중요했다. 추운 북쪽에서도 잘 자라는 느티나무도 '사리나무'라고 말했다고 한다. 느티나무가 새순이 돋을때 그 줄기가 화살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오랜 관습인 활쏘기 경험은 말로 연결된다. 한국말에서 '활짝'과 '살짝'은 활쏘기 경험치를 가져와 바탕치기가 된 말이다. 활과 살은 짝이다. 활을 쏘려면 활을 잡은 두 손을 최대한 벌려야 한다. 그때 엄청난 힘이 요구된다. 최대한 활을 벌려야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활을 최대한 벌리는 것이 '활짝'이다. 활을 최대한 벌릴 때 화살을 잡고 있어야 한다. 활은 힘껏 벌려야 하기에 꽉 잡지만, 살은 힘을 빼고 잡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살짝'이다. 활을 최대한 벌린 상태에서 화살을 살짝 놓아야 제대로 날아간다.

우리가 쓰는 말은 경험과 밀접하다. 활쏘기 경험은 우리에게 말을 선물했다. 이제 우리는 활쏘기를 하지 않지만 '활짝'과 '살짝'이란 말은 자주 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쓰는 말 중에 경험의 바탕을 잃어버린 말이 얼마나 많을까?        


한국말에서 '짝'과 '쪽'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느낌이 다르다. '짝꿍', '나의 짝' 등에서 보듯 짝은 '활과 살'처럼 둘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반면 쪽은 둘만이 아니라 여럿의 관계도 포함한다. 이쪽, 저쪽, 그쪽, 요쪽 등 쪽은 여럿이 있을 수 있다. '짝과 쪽'처럼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그 말을 할때 깊은 말맛이 생긴다. 그런데 말의 의미가 흐릿하면 말맛이 느껴지지 않거나 자극적인 맛만 느껴진다.

선생님은 젊은시절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왠지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사유'라는 말이 더 멋있어 보여서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사고와 사유는 결국 '생각'이란 생각이 들면서 '생각'이라는 말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 '생각'의 말맛을 느끼게 되면서 사고와 사유는 도무지 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뭔가 조미료 잔뜩 친 자극적인 맛만 느껴진다거나.

사고와 사유는 '사고한다' '사유한다' 외에는 말을 쓸 수 없다. '사고든다' '사유난다'는 말이 안된다. 한자어 하나씩을 가져와 '思한다' '考한다' '惟한다'는 말도 이상하다. 반면 '생각'은 '생각한다' '생각난다' '생각든다' '생각해본다' 등 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즉 생각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생각'이라는 말이 멸시받을때 '생각'이라는 말을 구원해준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았다. 한명은 프랑스 조각가 로뎅이다. 로뎅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으로 유명한데, 한국사람들은 이 조각을 '사유하는 사람'이나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품격있는 조각에 '생각'이라는 말이 계속 쓰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근대 사상의 아버지 데카르트다. 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 덕분에 '생각'은 지식인들 말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유식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나는 생각한다'는 말보다 '코기토'라는 말을 쓴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무튼 서양 근대 미술과 철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한국말 '생각'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지난주 선생님은 페이스북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 첫 글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지적이다. 한자어로 흐릿한 의미를 가진 '사회'와 '거리'로 이루어진 이 말은 사람들에게 그 의도를 또렷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국사람들은 그 의미를 또렷히 새겨 실천한다. 한국사람들은 섬세한 한국말을 사용하기에 말의 맥락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락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재밌는 점은 최초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라는 말을 쓴 서양사람들조차 '사회'와 '거리두기'의 이상한 조합을 어색해하는 상황이다. 이 말을 의도를 한국말로 옳게 번역하면 '만나서 사이 띄우기'이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쉬운 말을 피하고 어려운 말을 선호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선생님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다소 긴 글이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논문=에세이'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논문하면 일단 경직된다. 주석과 각주를 달아야 하고, 논리정연해야 하며, 학술지에 실려야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래 서양사람들은 그런식으로 논문을 쓰지 않았다. 그냥 자유로운 글쓰기의 한 방편으로서 논문을 쓴 것이다. 이 자유로운 글쓰기가 바로 자유로운 말차림이고 또한 자유로운 생각차림이다. 글과 말과 생각은 경직되어서는 안된다. 자유롭게 쓰고, 말할 수 있어야 되도록 여러사람의 생각차림을 알 수 있다.

나는 10여년 논문지도를 해왔지만 이런 생각을 갖지 못했다. 나조차 글쓰기에 대한 딱딱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편견에서 깨지는 순간, '(선생님이 글을 쓰신) 페이스북'이 학술지처럼 느껴졌다. 페이스북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사람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학술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재밌는 은유다. 물론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 타임라인의 성격은 달라지지만.


다시 한국말로 돌아오자. '안개'란 무엇일까? 바탕치기를 해보자. 바탕치기는 말이 가진 경험과 말소리의 유사성을 떠올리면 된다. '안개'하면 먼저 '안'자가 눈에 띈다. 안은 왠지 "안지" "안하다" "안에" 등의 말이 연상된다. 맞다. "안개"는 "안보이는 것"이다. 사물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안보인다. "안개가 끼면 안개에 안기거나 안개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안보인다." 앞의 문장에서 '안'자는 무려 6번 쓰였다. 이렇듯 우리는 '안'이라는 원형을 갖고 여러말들을 바탕치기해 사용하고 있다. 이를 언어학에서 가족유사성이라 말한다.

'쓸개'는 무엇일까? '쓰지'이다. '개'는 '거이' '게지' '것이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쓸개는 '쓴 것'이다. 지게는 "지지"이다. "지게를 지는 짐꾼은 먼저 짐을 올리고 지팡이를 짚는다." 앞의 문장에서 '지'라는 원형이 6번 쓰였다. 이렇듯 한국말에는 말의 원형과 가족유사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말맛이 살아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많이 쓰이는 여러 언어 중 한국말처럼 말의 바탕치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하신다.  


그럼 '말'이란 무엇일까? 한국사람들은 '말馬'과 '말言'을 똑같이 표기하는데 이는 '아래 하' 모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소리의 구별이 사라졌다. 한자어를 주로 쓰던 사람들이 한국말에 한 테러다. 한자어를 쓰는 사람은 '馬'과 '言'를 주로 쓰기에 굳이 '(동물)말'과 '(언어)말'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 테러를 언급하면서 알파벳에서 모음 하나가 사라졌다고 상상해보라고 하셨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동물로서 말은 아래 하가 들어가 약하게 발음하는 '말'이다. 반면 언어인 말은 다소 강하게 말하는 '말!'이다. '하다'와 '하늘'의 경우도 같은 경우다. '하다'의 '하'는 약하게 발음한다. '해' '하나'는 모두 아래 하자가 들어가야 마땅하다. '하도 많아서' '하늘' '한나라' 등은 지금처럼 'ㅏ'를 쓰고 강하게 발음하면 된다.

다시 '말'로 돌아와서, 말은 '말지'다. '말지'는 그만둔다는 의미다. '그만 둔다'는 '금안에 둔다'이다. 금 안에 둔다는 것은 속 안에 넣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의 바탕치기다. 나는 과거 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칸트가 책 제목으로 사용한 '비판=크리틱'이라는 말이 경계 짓기, 한계 짓기라 들은 적이 있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판단력이라는 말의 경계와 한계를 지은 책이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개념'이라는 흐릿한 말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그 선생님은 나름대로 '비판'이란 말을 경험으로 바탕치기 한 것이다.

말은 비판처럼 경계와 한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와 한계라는 말도 흐릿하다. 더 또렷하게 말하려면 금안에 넣는 것이다. 금 안은 속이고 금 밖은 겉이다. 겉보기 경험을 속에 넣는 것이 바로 '말'이다. 한달전 선생님과 기호학의 '기표'와 '기의'에 대한 한참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선생님은 이 흐릿한 말들을 한국말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하고 '기표'는 '겉보기'로, '기의'는 '속들이'로 바꿔말하셨다. 나는 이 용어를 수업에 적용했는데 학생들에게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는 모두 겉과 속의 관계이며, '겉'과 '속'이 잘 연결된 말은 소통이 잘 되고, '겉'과 '속'이 따로따로인 말은 소통이 잘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언어학에서 '겉=속'이 잘 연결된 말을 '기본층위 범주'라 말한다. 이 범주는 생물학의 분류 '종속과목강문계'에서 '속屬'에 해당된다. 코끼리의 경우 '아프리카 코끼리종'과 '인도 코끼리종'은 구별하기 어렵지만 코끼리와 호랑이로 구별되는 '속屬'은 금방 구별된다. 왜냐면 속의 경우 겉과 속이 잘 연결된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속이 후련했다. 나는 수년간 기호학을 강의했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기호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픔' '기쁨'은 감정적 속성이다. 이 속성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다.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려면 밖에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 슬픈 장면이나, 기쁜 소식을 들려주면 이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속성을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기호=말이다. 말은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드러내려면 겉에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 이 자극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기본층위 범주의 '은유'와 말의 '쓰임새'다.

말은 금 안에, 속 안에 넣는 것이다. 기본층위 범주가 아닌 말들은 속 안에 있으면 의미가 흐릿하다. '사랑' '인생' '생명' 같은 단어는 연상되는 이미지가 모호하다. 이런 말의 속성을 이해하려면 기본층위 범주에 있는 낱말로 이루어진 말뭉치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말은 입에서 나는 소리이다' '말은 생각을 주고받는 것이다'처럼 말과 연결된 말들로 말을 설명한다. 두번째로는 말의 쓰임새를 통해 '말'이 이해된다. '말 좀 해봐' '무슨 말이 그래' '그 사람은 말이 곱지 않아' '말을 잘해야 성공해'라는 말의 쓰임새를 통해 우리는 말의 쓰임뜻을 알게 된다.


말에 경계를 짓고, 한계를 두면 말은 어떤 의미로 규정된다. 물론 이 규정은 개인적이다. 누군가는 어떤 동물을 보고, 코가 길다라고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귀가 크다고 느꼈을 것이다. 둘은 그 동물의 의미를 다르게 한계 짓는데, 하나는 '코끼리=코가길다' 다른 하나는 '귀클리=귀가크다'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귀가 큰 것보다 코가 긴 특징이 더 인정받아, 이 동물의 이름은 '귀클리'가 아니라 '코끼리'로 여겨진다. 즉 코끼리는 '코가 길다'는 경험이 공공적으로 인정받은 동물의 이름이자 말이다.

이렇듯 말은 반드시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때 말이 공공적이란 인식을 하면 아무말이나 막하게 된다. 일부러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말의 공공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때론 어려운 용어로 하는 잘난척이 잘 먹히겠지만, "말은 공공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은 말에 대한 태도가 어긋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말은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소통의 매개 수단이기 때문에 말의 공공성을 모르는 사람은 집단지성과 소통을 날치기로 하는 것이다. 만약 말의 공공성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한다면 사기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데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 바로 '보이스피싱'이다. 보이스피싱은 말의 공공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로서 사람들을 억눌러 사기치는 행위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도 보이스피싱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억누르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한국말에서 '말'은 도량의 척도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홉'이 열이면 '되'이고, '되'가 열이면 '말'이다. '말'이 열이면 '섬'이 된다. '홉-되-말-섬' 중에서 '되'와 '말'은 한국말에 흔히 쓰는 말이다. "~이 되다" "~은 말이야"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듯이 우리는 '되'와 '말'을 중요한 척도로 사용한다. 되는 사면체의 틀로 측정되기에 실체성을 가진 부피다. 그 무게는 약 1.5kg 정도다. 이 부피가 열개가 모이면 한 말이 되는데, 말은 원통으로 측정된다.

사면체의 되와 원통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앞서 기본층위 범주를 소개했다. 이 범주는 소통이 편한 말의 범주로 '(보편성이 높은) 상위 범주'의 말과 '(개별성이 높은) 하위 범주'의 말을 소통시키기 위해 말의 맥락으로 주로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홉'과 '섬'은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상상이 잘 안된다. 적당한 크기의 '되'와 '말'로 빗대야 비로소 그 크기와 부피가 피부에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너무 멀리 있는 천체나, 너무 작게 있는 바이러스는 반드시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당기거나 확대해 눈에 보이는 크기로 가져와야 인식된다.

그게 바로 말이다. 말의 공공성은 소통이 안되는 말을 소통 되는 상태로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도, 바이러스를 확대했을때 왕관 모양이라는 특징을 가져와 '코로나'라는 이름을 지었다. 즉 '코로나'라는 이름 자체가 아주 작은 바이러스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식시키려는 노력이다.

한자에서 말은 '言'이다. 이 글자의 상형을 보면 '音'과 거의 같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단순한 그림에 가깝다. 상형문자의 그림속성을 알면 중국사람들이 말을 무엇으로 여겼는지 바탕치기가 된다. '말씀 언'과 '소리 음'은 모두 입에서 말이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마치 와이파이 그림처럼 입에서 말이 나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아마 옆으로 나아가는 것을 쓰기 쉽게 하기 위해 위로 나아가도록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말을 탑처럼 위아래로 세워놓은 이 그림은 말의 특징을 잘 시사한다. 한국말 '말씀'이란 의미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말씀은 '말쌈'으로 말을 쌓는 것이다. 쌓는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탑을 쌓는 방향은 중력의 역방향으로 아래에서 위로 쌓는다. 이것을 알면 subject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subject란 아래(sub)에 첫단을 놓듯이(ject) 먼저 큰 기단을 쌓는 것이다. 이 subject=기단에 따라 위에 object 등이 쌓여나간다. 한국말과 서양말, 중국말의 쌓기 방법이 다소 다른데, 서양말의 경우 먼저 기단을 놓고 어떻게 쌓을지 먼저 verb를 정하고 쌓는다. 한국말과 일본말은 먼저 기단을 놓고, 다른 것들을 차곡차곡 다 쌓은 다음 이 탑이 무엇을 위해 쌓았는지 풀어낸다. 다발말(문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풀이것 마디말'이 바로 서양말의 verb에 해당된다.

말탑을 쌓을때 잘 쌓아야 한다. 잘 쌓은 말탑을 '논리=logos'라고 말한다. 한국말에선 아랫단을 쌓는 '바람에' 윗단에 어떤 것이 놓인 것이란 의미에서 "~는 바람에"이다. 중국말로는 '인과', 인도말로는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말을 어떻게 잘 쌓느냐를 놓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10년전부터 logos가 무언지 여기저기 묻곤 했다. 여러 대답을 들었지만 늘 흐릿했다. logos는 안개속에 있어 안보였다. 그런데 말탑 쌓기 은유를 알게 됨으로서 이제 logos의 의미를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말을 쌓을때 유념해야 하는 곳이 닫는 면이다. 아래에서 위로 볼때는 '이는' 것이고, 위에서 아래로 볼때는 '놓는 것'이다. 이때 '놓는 것'을 한국말로 '니다'라고 말한다. '니다'는 '합니다' '갑니다' '습니다'에 쓰이는 말이다. 머리위로 '이다'와 놓는 '니다'가 같은 소리를 갖고 있다. 한국말에는 이렇듯 긴밀하게 상호적인 경우 같은 소리로 발음되는 말이 몇가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람' '손' '움직이다'이다. 이 말들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말로 사용한다. '손=주체'와 '손님=객체'가 같은 말이다. 바람은 '바르는 것'인데 바르는 것과 대상이 모두 '바람'이다. '돌을 움직이다' '돌이 움직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동과 능동이 모두 같은 말로 쓰인다.

'니다'와 '이다'는 주체와 객체, 수동과 능동을 초월한 말이다. 그래서 같은 소리로 발음된다. '니다'는 크게 '지니다'와 '다니다' 두가지로 분류된다. '지니다'의 '지'는 일종의 속성이다. '먹지' '가지' '입지' 등은 대상이 갖고 있는 속성을 말로서 표현한 것이다. '다니다'의 '다'는 일종의 겉보기이다. '다'는 '지'가 겉으로 드러나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물은 물지'처럼 '지' 앞에는 '물'이 나오는데, '물은 문다'의 경우 '다' 앞에는 '문'이 나온다. '물은 문지'는 좀 어색하다. '흐른다' '말한다' '온다' 등 '다'가 나오는 말은 대체로 'ㄴ다'로 말해진다.

'지니다'가 '다지다'가 되면서 시간성이 개입된다. 즉 '다니다'는 속성인 '지니가'다 현상으로 드러나 이루어진 상태이다. '다니다'는 현재성을 나타내는데, 이 현재성이 바로 우리가 겉으로 보는 실재 상황이다. 철학적으로 볼때 과거와 미래는 완결되어 있지 않다. 과거는 기억과 기록에 따라 언제든 재구성되며 미래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현재는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다. 일종의 완성태라고 할까. 스피노자는 이 점을 물고 늘어져 하나의 관점을 완성했다. 그 관점을 한국말로 치면 '다'이다.


마지막으로 지난주에 나왔던 한국말 말차림법을 한번 더 정리해 보자. 이야기, 뭉치말, 다발말, 마디말, 씨말(앛씨말, 겿씨말)로 이루어진 한국말차림 흐름에 있어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 다발말과 마디발이다. 마치 '되'와 '말'처럼.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 다발말은 문장, 마디말은 단어(혹은 낱말)이다. 다발말과 마디말 사이에 중요한 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매듭말'이다. 일종의 관용어구 같은 말인데, "나는 학교에 갈 것이다"에서 보듯 한국말의 미래형은 "갈 것이다"라고 표현된다. 한국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것만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미래형은 '것'으로 표현된다. '갈 것이다'에서 '갈'은 '것이다'의 의미를 매겨준다는 뜻에서 '매김마디말'이다. '갈 것이다'처럼 매김마디말이 들어간 경우를 묶어서 '매듭말'이라 이름을 지으셨다. 다시 정리하면 아래 그림과 같은 흐름이다.  

이 외에 죽다, 즐겁다, 돌과 돈에 대한 바탕치기를 얘기해 주셨다. 죽다는 '죽이 된다'이고, '즐겁다'는 '즐다'로서 무르익은 상태를 말한다. 돌은 '돈다'이다. 무엇이든 돌을 만나서 돌아서 가게 된다. 또한 돌은 데굴데굴 잘 돌아간다. '돈'도 '돌'과 바탕을 함께 하는데, 돈의 가장 큰 특징이 세상을 돌게 하는 것이다. 돈은 본래 금과 은처럼 희귀한 돌이다. 이 돌=돈은 그 자체로 사용가치를 갖고 있지 않는다. 오로지 교환가치로서 의미가 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마르크스다. 그는 일찍이 돈에 의해 상품들이 교환되며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이 돌=돈을 '자본'이라고 말했다.

앛씨말에 대한 약간의 설명도 있었다. 보통 앛씨말은 어근과 어간으로 말해지는데 이 흐릿한 한자어가 아니라 '것말' '지님말'로 풀어 이야기해 주셨다. '지님'은 어떤 일=상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먹다-먹음-먹이'의 경우 '먹' '먹음' '먹이'는 모두 앛씨말이다. 이중 '먹이'는 것말이고, '먹음'과 '먹'은 지님말이다. '생각하다-생각함-생각'에서 '생각하다'의 '생각'과 '생각함'은 지님말이고, '생각'은 '것말'처럼 쓰인다. 우리는 이를 명사형이라 말하는데, 이 명사형이 크게 것과 지님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번주는 한국말 말차림법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말차림의 바탕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말차림법을 들을때는 어떤 지식을 배우는 느낌이고, 말차림 바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지혜를 배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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