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말차림법 4강
능동적인 말과 함께하는 말
"한국사람의 머리속에는 한국말 말차림이 있다. 우리는 그 말차림에 맞는 말차림법을 배우고 있다" 역시나 늘 같은 말로 네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서서히 온라인 수업이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눈앞에 학생들이 몇명 없어 선생님의 시선이 다소 불안하지만 이젠 이런 상황도 제법 익숙해지신듯 싶다. 오늘은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 보았다. "선생님 이것도 설명해주세요" "이것도 알고 싶어요" 등등. 내 옆에서 함께 듣던 다른 학생도 "이거 이게 아닌가요?"라며 추임새에 동참했다. 수업에 대화를 곁들이니 수업의 흐름이 좀 더 안정되는 기분이다. 대화는 업는 사람과 업히는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과정이다. '역시 좋은 수업은 대화가 동반되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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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한국말로 하면 '다발말'이다. '다발'이란 '한다발 두다발' 할때 그 다발이다. 한국말의 다발말은 영어처럼 낱말이 아니라 마디말로 연결된다. 마디말은 다시 앛말과 겿말로 나뉜다. "나는 학교에 간다"에서 "나는" "학교에"는 각각의 마디말이고, "나"는 마디말의 씨앗이 되는 앛말이고 "는"은 마디말의 구실이 되는 겿말이다. 이때 구실이란 "구실을 붙이다"할 때의 그 구실인데, '구실'이란 '마땅히 해야할 책임'으로 '그위=공공성'을 의미한다. 말은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별적 경험이 공공적 말로 소통되기 때문이다. 말의 공공성은 쓰는 말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이나 중국말은 구성상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기에 다소 '끼리끼리' 느낌이 있다. 공공성의 잣대도 그렇다. 반면 한국말에 있어 공공성은 잣대는 안으로 고루하고, 밖으로 두루하기에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고려한다. 한국말의 구성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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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쪽 마디말 + 맞이쪽 마디말 + 풀이 것 마디말
(subject ) (object 등등) (ve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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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말을 할때 기준이 되는 곧이쪽(subject )과 이에 대응하는 맞이쪽을 함께 고려해 상황을 풀어낸다. 그래서 말의 구성이 크게 "곧이쪽+맞이쪽+풀이것"으로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한국사람은 늘 말을 할때 이쪽과 저쪽이 함께하듯 말을 풀어낸다. 가령 "나는 학교에 간다"라고 말하면 "나=이쪽"과 "학교=저쪽"이 함께 "간다"라는 일을 하는 느낌이다. 이때 "곧이쪽=나는"의 자리에는 "나는, 내가, 나도, 나만, 나만이라도" 등등 겿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곧이말을 할 수 있다. "맞이쪽=학교에"도 마찬가지로 "학교에, 학교를, 학교로, 학교부터" 등등 다양한 말이 오고, "풀이것=간다"에도 "간다, 갔다, 갈 것이다" 등이 올 수 이다. 이렇듯 한국사람은 간단한 문장도 아주 섬세하게 느낌을 구분해서 말할 수 있다. 선생님은 코로나 방역본부장이 사람들에게 당부했던 말인 "나 하나 쯤이야라는 태도"와 "나 하나 만이라도라는 태도"를 인용하시며 한국말이 가진 섬세함을 강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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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과 저쪽이 함께 하는 한국말의 가장 큰 특징은 '능동성'이다. 서양말과 중국말의 구성은 subject에서 object로 능동성이 일방적이다. 그래서 자동사과 타동사를 구분하고 주격과 목적격을 구분한다. 즉 말에 있어 능동과 수동이 명확하다. 반면 한국말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거의 없다. 굳이 있다면 능동을 나눠 갖는다고 할까. 가령 "그는 벼락을 맞았다"라고 말할때 그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다. 또 "낙엽이 땅에 떨어져 있다"라고 말할때 낙엽이 땅에 능동적으로 한 것이 없다. 이렇듯 한국사람은 이쪽과 저쪽을 늘 함께하는 관계로 여기는 까닭에 곧이쪽과 맞이쪽을 능동과 수동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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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가장 잘 반영한 말이 '손'이다. 영어로 손과 대상은 각각 hand와 object로 구분되어 말해진다. 반면 한국사람에게 '손'은 내 몸의 손이기도 하고, 목적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말로 '客'을 '손님 객'이라 말한다. 즉 한국말로 '목적적 객체=objec't가 '손'인 것이다. 이렇듯 한국사람에게 객체는 손에 잡히는 대상이어야만 한다. 한국사람은 상호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같은 말로 함으로써 이쪽과 저쪽이 늘 함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대표적인 말 중에 하나가 '바람'이다. '바람'을 알려면 반드시 바람이 부딪치는 벽(낙엽이나 깃발)이 있어야 한다. 때론 이 벽(부채)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바람'을 '벽'의 의미로 썼다. 나는 한자공부할때 '壁'을 '바람 벽'이라 외웠던 생각이 났다. 지금은 '바람벽 壁'이라 말한다. 한국말과 한자어를 조합해 다시 한자어를 풀이하는 이상한 상황이랄까. 아무튼 '손(主)'과 '손(客)'처럼 '바람'과 상호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대상의 이름도 '바람'과 '바람'이다. 바람에 대해서는 수업 말미에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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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말 말차림법으로 돌아와, 한국말의 subject에 해당하는 곧이쪽 마디말의 종류는 지난주 이야기하셨다. 종류만 나열하면 '으뜸곧이, 딸림곧이, 얼임곧이, 같이곧이, 부름곧이'가 있다. 이번주에는 맞이쪽 마디말 6종류를 이야기해 주셨다. 앞서 말한 목적적인 객체를 강조한 "손이 마디말"이 있다. "나는 공부를 한다"라고 말할때 을/를의 겿말이 이에 해당된다. "칼로 벤다"처럼 칼의 쓰임을 강조한 "쓰임 마디말"이 있고, "바다에서 난다"처럼 비롯됨을 강조한 "비롯 마디말", "부산에 간다"처럼 보람을 강조한 "보람 마디말", "물에 빠졌다"처럼 밑감을 강조한 "밑감 마디말" 마지막으로 "어제 갔다"처럼 때와 곳을 강조한 "때곳 마디말"이 있다. 이렇게 6종류의 맞이쪽 마디말이 영어의 소유격, 목적격 등등의 격에 해당된다. 맞이쪽 마디말 종류를 다시 나열하면 '손이, 쓰임, 비롯, 보람, 밑감, 때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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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풀이것 마디말'이다. 풀이것은 이쪽과 저쪽이 함께하는 바람에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한국사람은 이쪽과 저쪽이 함께하는 상황을 약 8가지로 풀어내는데 첫번째가 '까닭 풀이것'이다. 한국사람에게 까닭은"~는 바람에" 혹은 "~했기 때문에"라고 말해진다. '바람에'는 다소 현재진행형이고, '때문에'는 과거진행이거나 과거에 종결된 상황을 의미한다. 한국말로 '바람에'는 한자어로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논리(logos)'라고 말한다. 인과, 연기, 논리는 앞에서 뒤로 나아가는 상황인데, 앞에서 말했듯 '바람'은 이쪽과 저쪽이 함께 한다. 이미 둘의 차이를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엄청난 사상적 차이를 동반한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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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해석하면, "국가의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바람이 흐른다(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의 근본을 설명하면, 역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제적으로 삼교(유불도)를 포함하고 품고 있어 모든 생명과 만나서 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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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이 문장을 인용하며 한국사람에겐 '바람이 흐르는(풍류)' 사상이 있다고 말하셨다. 이를 '풍류도'라 말하지 말고 앞글자만을 따서 '바흐'라 부르자. 그럼 '바흐'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바탕치기'다. 모든 말은 바탕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말의 바탕은 꼴(형태)에 있다. 사람을 의미하는 人은 사람의 옆모습을 보고 그림 그림이고 물을 의미하는 水는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본딴 것이다. 우리는 '水'를 '물 수'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컵에 담긴 모습을 보여주며 물은 흐르기도 하지만 이렇게 고여 있기도 하기에 흐르는 모습을 본따 水라고 쓰는 것은 중국사람이 물에 대한 인식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한국사람에게 물은 '무는 것' '물렁한 것' '무거운 것'이란 의미다. 물에 손을 담그면 물이 손을 문다. 물은 물렁물렁하며, 무겁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물로 무게를 쟀다. 즉 무게라는 말의 바탕이 물에 있는 것이다. 이것에 바로 바탕치기다. 중국사람은 흐르는 꼴로 '水'라는 말을 만들었고, 한국사람은 꼴이 아니라 물리고 물렁하고 무거운 것을 물이라 말했다. 즉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의 물과 경험에 대한 바탕치기가 다른 것이다. 그 말이 어떤 경험과 연관되어 있는지 알면, 그 말을 쓰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렇기에 말이 섬세할수록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도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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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오랜시간 중국의 한자와 서양말로 바탕치기를 해왔다. 한자와 서양말은 한국사람의 경험과 맞닿아 있지 않으니 당연히 모호할 수 밖에 없다. 1000년을 넘게 한자로 바탕치기를 하나 100년을 서양말로 바탕치기를 하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 과정에서 한국말이 소외되었다. 양반과 지식인들은 한국말에도 바탕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거나 몰랐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한국말 바탕치기를 전혀 하지 않했거나 못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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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임자'란 '님+자', 즉 잣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 잣대란 객관적인 기준이다. 객관적 잣대가 주관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때 '줏대'라 말한다. 한자는 배우기 어렵다. 서양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자와 서양말로 판단의 잣대를 삼으면 그 잣대는 온전한 나의 줏대가 되기 어렵다. 내가 쓰는 말과 동떨어져 있기에 항상 어떤 특정 맥락속에서만 그 잣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에서 늘 사용하는 한국말로 잣대로 삼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 잣대가 나의 줏대가 됨으로써 공공의 줏대가 바로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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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국의 지배층은 중국의 글을 잣대로 삼아 피지배층을 다스려왔다. 중국의 잣대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피지배계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한자로 '民'이라 말한다. 맹자의 '민본民本사상'이 조선사회 지배층이 갖고 있던 생각이다. 이때 '民'은 쫄따구라는 의미다. 민본이란 쫄따구를 중시한다는 말로 결국 사람들을 쫄따구로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이 지금까지 이어져 북한은 '인민' 남한은 '국민'이라 사용한다. 여전히 조선의 '쫄따구=민중'이 여전한 것이다. 비록 번역어지만 '시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민'이란 말이 들어간 이상 별수 없다. 인민과 국민, 시민을 대체할 말은 고민할 것도 없다. '사람'으로 하면 된다. 한국말로 '목숨'이란 '몫+숨'이다. 한몫, 두몫 할때 그 몫을 각각 숨으로 갖고 있는 상태를 '목숨'이라 말한다. 이는 낱낱의 생명이다. 이 생명들 중에서 저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려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사르다'에서 나온 말로 '살려서 사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냥 사는게 아니라 살려야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실 '나랏사람'은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주에 가까운 용어다. (민주=쫄따구가 주인이 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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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시민, 국민'을 대하는 민본적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생명적 태도는 차원이 다르다. 만약 한국사람들이 이 사람의 뜻을 제대로 새기면, 공공적인 말과 나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이를 최봉영 샘은 '말씀 인문학'이라 말하셨다. 한국말이 한국사람의 경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아보는 '바탕치기'가 바로 말씀 인문학의 숨결이자 피다. 그리고 한국말 말차림법은 말씀인문학의 골격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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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손'과 '말씀'에 대한 바탕치기가 있었다. 간단히 소개하면, 손은 객체로서의 손으로 나아가는 '쏘다'와 바탕뜻을 함께한다. 쏘다는 '솟다'로 나아가 '소나무, 솔'과 연결된다. '소리'도 '손'과 연관되어 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서 보듯, 말씀은 경어가 아니다. 말씀은 '말+쌓음'이다. 말은 여러 방향으로 쌓을 수 있는데, 말 쌓음은 수직방향을 의미한다. 자연스러운 중력의 흐름대로 쌓아야 말의 논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는 "제가 논리적으로 말을 해 보겠습니다"라고 여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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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 선생님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동안 수집해 오신 '물건인문학'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양에 놀랐고, 뛰어난 질에 또 놀랐다. 평생을 수집한 물건인문학들이 수천점 아니 거의 만점에 가깝다. 제법 큰 집의 방마다, 거실 심지어 화장실에 조차 조각과 그림, 도자기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대충 둘러만 보았다. 말씀의 바탕을 듣고, 물건의 바탕을 보니 한국이라는 시공간이 새롭게 느껴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사진 몇장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