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말차림법 5강
"한국사람의 머리속에 말차림이 있다" 오늘도 역시 이 말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말차림이 제대로 차려져 있으면 '정신' 차리기가 가능하다. 이를 기반으로 '염치'와 '체면'을 차리고 나아가 '살림'까지 차려 간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염치와 체면을 차리기 어려워 사람들의 살림차림도 어렵다. 이럴때일수록 염치와 체면을 의식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 한국사람 머리 속에 말차림이 제대로 갖춰지면, 정신과 체면을 차리고 연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어려운 살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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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여러말을 알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동안 라디오 EBS기초영어를 매일 외웠다. 6개월정도 하니까 자신감이 좀 붙었다. 약간의 대화가 가능했고, 영어 문장도 다소 읽혔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다보니 영어공부에 탄력이 붙지 않았다. 지난 17년동안 만남이나 일에 있어 영어를 쓴 경우는 채 10번도 없었던듯 싶다. 영어 없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 영어공부가 지속되지 않았다. 한 6개월 지나니 다시 원래 까막눈으로 돌아왔다. 대학원생들과 일본친환경 박람회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2년여 일본말을 공부했다. 이번엔 제법 말을 잘했다. 일본사람과 간단한 주제로 몇시간을 이야기 나눌 정도가 되었다. 어느날 일본대지진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방사능 누출이 염려되어 일본 방문을 자제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일본어 능력도 녹슬기 시작했다. 약 3년여가 지나니 몇개의 단어만 간간히 떠오를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번엔 한자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말은 7할이 한자어라는 말을 듣고 한자는 계속 쓰니 잃어버릴 일이 없겠다 싶었다. 사실 한자공부는 진짜 어렵다. 영어와 일본어처럼 외운다고 되는게 아니다. 글자 하나마다 그 형태를 이해해야 한다. 하루 1시간정도 매일 꼬박 3년을 하니 어느정도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날 내가 아는 한자를 주욱 써보니 대략 3000자 정도 되었다. 한자 공부를 하면서 간판이나 책을 읽을때 그 말의 바탕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수희의 비가, 애모"라고 써 있으면 그런가 싶고,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한자를 알고나니 "김수희의 슬픈 노래, 사랑을 그리워하다"라고 읽혔다. 점점 많은 한자어들이 눈에 띄었는데, 재밌는 점은 유식한 사람일수록 한자어로 된 말을 많이 사용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한자의 바탕을 제대로 알고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대충 퉁쳐서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한자의 바탕을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왠지 그렇게 나의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조차 시들해졌다. 한자어로 나열된 문장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되지도 못할 단어들을 갖고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무엇보다 유식함이 나의 사람다움을 채워주는것 같지 않았다. 한자를 잘 쓰지 않다보니 아는 한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300자나 기억할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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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의 7할이 한자어는 아닌거 같다. 어떤 사람은 8할 9할까지 한자어를 쓴다. 보통사람은 5할도 쓰지 않는다. 한국말에 있어 한자어는 쓰는 사람 나름이다. 한자어가 많이 있으면 유식해보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소통이 안되는 단점이 있다. 왜 그럴까? 그러던차 이성민 선생님을 통해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 언어학'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사람의 말은 경험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최봉영 샘을 뵙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한자어는 한국사람의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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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장신경과 말초신경, 중추신경이 상호작용하며 사유한다."라는 문장에는 한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사실 겿씨(토씨)말 빼고는 모두 한자다. 여러분이 이 문장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대강 그려려니 할 것이다. 이 문장을 다시 한국말로 바꾸면 이렇다. "사람은 몸과 마음, 머리가 서로 어울려 생각한다" 이 문장은 모두 순수 한국말이다. 어떤 문장이 이해하기 편한가? 후자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소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대강의 말뜻만이 아니라 말의 바탕까지 알면 생각과 태도에 어마무시한 차이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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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人間으로 '사람들 사이'이다. '人'은 사람의 옆모습을 본딴 것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본 사람을 의미한다. 間는 중국전통문 사이에 해(日)가 들어온다. 달이란 말도 있다. 아무튼 문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따 만든 글자다. 한자의 꼴을 갖고 바탕치기를 하면 "사람의 옆모습(人)+문사이로 들어온 빛(間)"이다. 반면 "사람"의 오래된 말은 '사르다'로 '살리다'는 의미다. 즉 "사람"이란 말의 바탕은 '살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단어가 '사람'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뜻을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란 단어를 쓰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경우 객관적 상태의 사람을 말할때는 '인간'이란 말을 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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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말초, 중추, 신경 등의 한자어는 그렇다치고, '몸'은 무슨 의미일까? 몸은 '모옴'이다. 몸은 '모인 것'이다. '머리'는 '멀'로 '멀다' '멀지'와 바탕을 함께 한다. 머리는 멀리 있는 것과 만나는 것이다. 머리에 달린 감각기관은 모두 멀리 있는 것을 본다. 한국말로 '본다'란 경험한다는 말이다. 멀리보고, 들어보고, 냄새맡아보고 등등. 본다는 '생각해 본다'라고도 말한다. '빅뱅'이니 '미래'니 사람은 백억년 뒤나 수백년 앞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사람을 말과 글을 갖고 멀고 가까운 시공간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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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바야흐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보야하로'이다. '보야'는 '본다'이고 '하로'는 '한다'이다. 즉 보야하로는 '지금 함께 하고 겪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말로 지금 겪고 있는 것을 판단할때 "~는 바람에"라고 말한다. 한국사람은 바람의 흐름처럼 사물의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 이 바람의 흐름에 따라 인과관계가 연결되고, 인연이 형성된다. 이게 불교의 '연기'이다. '바야흐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람은 경험에 충실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함께 겪고 있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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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국사람들은 경험을 말로 옮기는 바탕치기에 아주 능하다. 한국말의 바탕뜻을 잘 살피면 그 바탕치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머리는 '멀리 보는 것'과 관련이 있듯, 토끼는 '톡끼는 것', 물은 '무는 것', 불은 '불어나는 것', 벌레는 '벌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말은 아주 바탕치기가 잘 된 말이다. 바탕치기가 잘 되었다는 말은 말의 범주가 섬세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의미다. 말의 범주가 섬세하게 나누어지면 생각을 정교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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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이 바탕치기를 모르면 말의 범주가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를 모른다. 범주의 섬세함을 인식하지 못하니, 생각도 정교하지 못하다. 나아가 사물의 흐름을 알 수도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국말 문법이다. 한국말 문법을 보면 글을 통틀어 "문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 문장' 할 때와 '전체 문장'이 별 구분없이 쓰인다. 물론 그럴때가 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말은 비록 한문장이지만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하이쿠 시가 그렇다. "꽃잎이 떨어지네, 어 올라가네, 나비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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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글은 '단락', 몇 단어로 이루어진 말을 '구'라고 말한다. 주어, 동사, 목적어 등은 말의 '성분'이라고 말하고, 낱말을 '품사'라고 말한다. 이 말들은 말을 분석한 것임에도 범주구분이 없다. '문장, 단락, 구, 성분, 품사'는 문법용어인데 도무지 일관성이 느껴지질 않는다. 말의 전체 흐름을 바탕치기 하지 못하고 날치기로 말을 만들었거나 얼치기로 서양말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진지해야 한다. 장난치기로 해서는 안된다. 사기치기는 더더욱 안된다. 날치기와 얼치기, 장난치기와 사기치기는 인문학이 아니라 예술과 디자인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의 바탕인 말차림법(문법)은 제대로된 흐름과 논리를 갖춘 바탕치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선생님은 말차림범의 큰 갈래를 새로운 용어로 바탕치기 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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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씨말에서 시작된다. 앞선 강의에서 마디말은 '앛말'과 '겿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일종의 품사에 해당된다. 그래서 품사를 대체하는 말로 '씨말'이라는 말을 바탕치기 하셨다. 씨말에서 "씨"는 말씨를 말한다. 맵씨(몸씨), 솜씨(손씨), 여경씨 등 우리말에는 '씨'가 많이 쓰인다. "그 놈이 밥을 먹었다"와 "그 분이 밥을 먹었다"에서 "놈"과 "분"으로 말씨의 차이가 구분된다. "그 놈이 밥을 쳐먹었다"와 "그 분이 진지를 드셨다"의 말씨는 많이 다르다. 이 말씨는 앛말과 겿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앛말과 겿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씨가 달라진다. 그래서 한국말 말차림을 근거로 '씨말'이라는 말을 만들고, 앛말은 '앛씨말' 겿말은 '겿씨말'로 바꿔 부르자고 하셨다.
위 그림은 앛씨말과 겿씨말의 갈래를 정리한 내용이다. 앛씨말과 겿씨말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마디말이 만들어진다. 마디말들이 모여서 하나의 다발말이 만들어진다. 다말발은 크게 세개로 구성되는데 말하는 사람이 "이것은 곧 무엇이다"라고 말하며 '첫 주제'로 삼은 말이 '곧이쪽 마디말'이다. 곧이쪽 마디말에 이어 곧이를 맞이하는 맛이쪽 마디말이 따라 나온다. 곧이쪽과 맞이쪽은 서로 함께 일을 풀어나감다. 이쪽 저쪽을 함께 풀이한 것이 다발말 맨 마지막에 나오는 '풀이것 마디말'이다. 한국말과 영어가 가장 차이나는 점이 바로 이 풀이것 마디말의 위치다. 영어는 곧이쪽과 맞이쪽 사이에 풀이것 마디말을 두는 반면, 한국말은 맨 마지막에 풀이것 마디말을 둔다. 즉 영어를 쓰는 사람과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함의 태도에 차이가 생긴다.
겿씨말은 마디말의 구성과 같다. 한국말에서 다발말의 세가지 마디말은 크게 곧이쪽, 맞이쪽, 풀이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쪽말들의 종류는 모두 겿씨말에 달려있다. 겿씨말은 기존의 상식처럼 '은/는/이/가'는 주어, '을/를'은 목적어처럼 무자르듯 딱 구분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겿씨말이 곧이쪽이 될 수도 있고, 맞이쪽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학교까지 간다 "의 경우와 "나까지 학교에 간다"의 경우 겿씨말 "까지"는 곧이쪽과 맞이쪽 모두에 쓰인다. 중요한 것은 겿씨말 자체가 아니라 말의 위치다. 겿씨말은 그 위치에 있는 말의 구실을 섬세하게 구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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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내가/나만/나까지/나부터/나만이라도/나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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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학교를/학교만/학교부터/학교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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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갔다/갈 것이다/가고 있다/가고 말았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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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에서 보듯, 겿씨말에 따라 곧이쪽과 맞이쪽, 풀이것이 다양하게 분류된다. 3가지를 조합하는 경우의 수를 따지면 100가지를 훌쩍 넘는다. 즉 '나'와 '학교'가 함께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 100가지 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말은 아주 섬세하게 이쪽과 저쪽의 함께성을 구분할 수 있다. 이 섬세함은 곧이쪽 마디말에서 맞이쪽 마디말로 나아가는 단계에서도 살필 수 있다. 가령,
"나는 귀가 들린다"
"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세가지 다발말은 큰 틀에서는 소리를 듣는 행위지만, 씨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첫번째 다발말에서 "나는"은 으뜸곧이말이고 "귀가"는 나에게 딸려있는 딸림곧이말이다. 곧이말 두개가 함께 "들린다"라는 풀이것을 한다. 두번째 다발말에서 "소리가"는 얼임곧이말이다. 소리는 나에게 얼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곧이말 두개가 함께 한다. 앞의 두 다발말은 내쪽에서의 변화만을 얘기한다. 마지막 다발말은 이쪽과 저쪽이 함께하는 변화가 느껴진다. 그래서 마지막 다발말에서 "소리를"은 곧이말이 아닌 맞이쪽 마디말로 바뀐다. 겿씨말이 변화하면서 소리가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풀이것 마디말이 "들린다"에서 "듣는다"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같은 앛씨말을 공유하면서도 겿씨말의 변화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말의 이런 미묘한 변화를 알게 되면 한국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즉 한강의 기적이니, BTS와 기생충, 코로니19의 대처 등 세계에서 한국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한국말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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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뭉치말(단락)을 쓰면서 '문장'이라고 쓴 것을 몇번이고 '다발말'이라고 고쳤다. 이미 우리는 '단락' '문장'을 공공의 말로 사용하기에 바꾸기가 어렵다. 또 어떤 이는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며 반발할 수도 있다. 주로 한자어를 많이 알고 있는 유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이 말들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단락, 문장, 구, 성분, 품사 등의 단어는 의미 구분도 잘 안되고 느낌도 별로 없다. 바탕치기는 커녕 날치기, 얼치기조차 안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문법을 말차림법이라 말하듯 말차림법에 걸맞은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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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프는 우리가 소통이 잘 되는 기본층위 범주가 있다고 말한다. 이 범주는 '종속과목강문계'의 '속'의 범주다. 코끼리는 '속'이다. 종은 인도코끼리와 아프리카코끼리를 나누기에 구별이 어렵지만 '속'인 코끼리는 토끼와 금방 구별된다. 이 속에 해당되는 단어가 바로 '기본층위 범주'다. 사람들은 이 기본층위 범주의 단어로 얘기할때 소통이 잘 된다. 가령 나무의 속을 얘기할때는 "참나무, 잣나무, 소나무"라고 말한다. 사람의 속을 얘기할때는 "젊은사람, 어린사람, 좋은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법은 말의 속을 이야기하면서 말의 기본층위 범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법은 말차림법이라 바꾸고, 말차림법의 용어는 모두 '~말'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용어를 읽고 최소한 얼치기라도 할 수 있다. 이 용어들을 정리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바탕치기와 날치기, 얼치기를 구분하시며 우리가 인문학을 할때 날치기와 얼치기로 하지 말고 제대로 바탕치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예술과 디자인은 역할이 얼치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곧바로 바탕치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탕치기는 반드시 느낌에 기반한다. 얼추와 얼른의 얼치기가 있어야 심도 있는 바탕치기가 가능하다. 예술과 디자인은 얼추 느끼거나 얼른 이해하도록 하는 소통분야이다. 예술과 디자인이 얼치기를 하고, 인문학은 바탕치기를 하는 관계랄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술과 디자인에서 바탕치기를 하고, 인문학에서 얼치기를 하려한다. 이 정도는 뭐 괜찮다. 장난치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진짜 안좋은 것은 날치기하고, 사기치기다. 지금 우리의 예술과 디자인, 인문학이 날치기와 사기치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을듯 싶다. 어짜피 날치기와 사기치기는 오래 지속되진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