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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pr 07. 2020

한국말의 몸통과 구실

한국말 말차림법 3강

"사람은 머리속에 말차림이 있다" 이 말은 강의 첫머리에 항상 등장한다. 이 "정교한 말차림에 근거해 말차림법(어법, 문법, 그래마)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말과 일본말 말차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말이 최봉영 샘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한국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말차림이고, 이 말차림을 잘 살펴 말차림법도 만들고 규율도 만들고, 학문도 해야 한다. 말차림법이야 그렇다치고 다른 분야에선 어떤가? 한국말 말차림에 맞게 법과 학문이 구성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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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문장은 낱말로 구성되고, 한국말의 문장은 마디말로 구성된다. 한국말의 마디들은 두개의 낱말이 합쳐져 있다. '나는'에서 앞에 있는 것은 '나=앛말'이고, 뒤에 있는 것은 '는=겿말'이다. '앛말'은 한국고어의 의미를 가져와 최봉영 샘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앛말'은 앗다(갖다), 씨앗 등 근원적 바탕을 의미한다. 영어로 치면 주로 명사나 명사형이 앛말에 해당된다. '겿말'은 '앛말'의 곁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은 <훈민정음>에도 등장하는 말로 예로부터 한국사람들이 쓰던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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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말은 주로 겿말에 의해 구분된다. 지금 보고 있는 한국말의 문장에서 보듯, 문장에서 낱말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모두 겿말이다. '나는 학교에 간다'와 '나도 학교를 간다'를 볼때 '는' '도' '에' '를'에 따라 '나'와 '학교'의 뜻이 미묘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겿말에 의해 앛말의 구실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실'이다. 즉 '구실'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상당한 시간동안 이 구실이 무엇인지 설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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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개별적인 경험을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모두가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말이 있어야 한다. 가령 '감'이라고 말할때 우리는 이 '감'이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먹는 감 있잖아"라고 말하면 우리 머리 속에 과일 '감'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 맛과 냄새, 촉감 등 여러가지 감각이 연상된다. 이렇듯 말이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반드시 요구된다. 먼저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공통경험을 의미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이때 개별적 경험들이 모인 공통경험은 그 자체로 소통되지 않는다. 소통은 반드시 그 공통경험을 아우르는 '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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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의 보편성은 바로 '공공성'을 의미한다. 한국말로 공공성은 '그 위'이다. '그'는 '이'와 '저'처럼 자주 쓰는 말인데, '이것'과 '저것'에서 '이'와 '저'는 실체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면, '그것'할때 '그'는 실체성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그거 있잖아.."라고 말하면서 '그'에 어떤 실체성을 담으려한다. 이때 '그'는 각자의 머리속에는 있지만 정확히 그 실체성이 없는 상태이다. 이 각각의 '그들' 위에 바로 '말'이 있다. '감'이란 말이 갑자기 생각나기 않아 "그거 있잖아..."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대화의 맥락에서 "감?"이라고 말하면, "맞아. 그거, 감"라고 대답한다. 이 대화가 가능한 것은 대화하는 사람들 위에 "감"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화는 둘 모두가 먹는 "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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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샘은 말은 '그들위에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위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요즘말로 '공공성'이라고 말하고, 언어학에서는 이를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말의 '그위성=공공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주 이 중요한 특징을 망각하곤 하는데, 주로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앙가주망' '주이상스'라는 말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강조, 아니 강요한다. 최봉영 샘은 이런 말들이 상대방의 말을 누른다는 의미에서 '말누름말'이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상대방의 말을 누르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말누름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말의 '보편성=공공성=그위성'을 전혀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며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왜 나랑 대화하지?"라는 의구심이 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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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예전 한국의 지식인들은 '시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시민'은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온 말이다. 내가 알기론 본래 시민이란 개념 자체가 북유럽 플랑드르 지방의 고유한 개념으로 시장사람들을 의미한다. 주로 상공업으로 먹고살았던 시장사람들은 주변의 여러지방과 자유롭게 교류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정치적 자치권, 종교적 자율권을 갖고 있었다. 먼 곳과 상품교역을 했기에 종종 국가의 외교사절이 되기도 했다. 후일 이 시민들은 산업혁명과 대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근대화 이후 서양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시민'이란 단어를 끌고와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선생님도 늘 프랑스와 영국의 '시민'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즘 코로나19를 겪는 프랑스와 영국 시민들의 행동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고 하신다. 결국 "시민의 원조는 저런거였구나..."라며. 나도 그렇다. 언젠가부터 '시민'이란 단어가 한국에서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대혁명에서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나라의 시민들이 그런가? 과연 현재 미국, 영국, 프랑스의 시민들이 자율성을 갖고 있는가? 국경을 폐쇄하고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 고분고분하고, 한쪽에서는 엄청난 사재기를 하는 상황이 '자유+평등=자율'이고 '박애+관용'을 강조했던 시민들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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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샘은 '시민'이란 말의 대체어로 한국말 '나랏사람'을 강조하셨다. '사람'은 '살다' '살리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살려서 살아가는 것"을 즉 '사람됨'을 의미한다. '나라'의 짜임새를 살펴보면 '나'와 '라'의 합성어이다. '나'는 어딘가에서 나온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모두 각자 자신이 어딘가에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해 '나'라고 말한다. 각각의 나들 위에 공공적인 '말'이 있다. 이 말이 한국말이다. 공공성을 띈 말은 소통만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고 규제한다. 경찰과 사법 등 물리력을 행사해 강제로 규제하면 법률이고, 물리력 없이 양심적으로 규제하면 도덕이다. 법률과 도덕 역시 모두 공공적인 '말과 글'로 이루어져 있다.(개인적으로 법규 대부분이 한자어고 법률가들만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어졌기에 과연 공공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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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나'라는 사람들 위에 공공적인 '말'이 있고, 이 '말'은 법과 도덕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한다. 말과 글로 된 법률은 개인의 재산과 신체의 소유권을 지켜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얼마전 한 기사를 읽고 '소유가 존재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이는 소유와 존재를 별개로 생각해, 소유와 존재를 분리해서 따져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이다.(물론 소유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연 이 사회에서 소유가 없으면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럼 소유가 있다면 그 소유는 누가 보장해주나... 바로 국가다! 한국말로 이 국가를 '나라'라 말한다. 최봉영 샘은 한국말에서 '라'는 "이거해라"에서처럼 명령을 의미하는 '겿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라'는 '나'를 규제하는 '라'와의 합성어이다. 즉 '나라'는 나를 규제하는 말과 글이 있는 공공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나랏사람'은 '나를 규범화 시켜 살려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라를 만드는 일'은 곧 '나를 만드는 일'이고 이 일이 잘 되어야 나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나라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한다. 한국사람들은 비교적 이를 잘 따라 다른나라처럼 극단적 상황까진 이르지 않았다. 이는 아직까진 한국사람들이 '나랏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잘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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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말 말차림으로 돌아와 말의 세계는 그위성=공공성=보편성을 갖고 있다. 한국말로 '그위'는 공공적인 일, 사람이나 관청에 주로 쓰였는데, '그윗일' '그윗분' '그윗집'이 그렇다. 그 그위가 현재 한국말로 '구실'이 되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구실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이라고 나온다. 이때 근본적인 책임이 바로 '사람구실'이고 한국사람이 이 구실을 잘하려면 공공적인 그윗말, 한국말에 대해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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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의 문장 구성을 보면 크게 3개의 마디말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앞에 있는 subject는 주어가 아니라 곧이말이다. 이 곧이말 뒤에는 함께하는 말들이 따라나오고, 맨 뒤에 곧이말과 함께말이 함께 일을 풀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즉 '곧이쪽(마디말, 주어) + 함께쪽(마디말, 목적어 등) + 풀이것(마디말, 동사)이 된다. '주어+동사+목적어' 구성되는 영어는 '풀이것마디말'이 곧이쪽과 함께쪽 사이에 오기에 곧이쪽이 일방적으로 대상에 행위를 가하는 느낌인데, 한국말은 곧이쪽과 함께쪽이 붙어 있어, 이쪽과 저쪽이 무언가 일을 함께 풀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실제 한국사람들은 무언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해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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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뒤에 나오는 내용을 간략하게만 소개한다. 곧이쪽마디말의 5가지 종류(으뜸, 딸림, 얼임, 같이, 부름)가 있다. 한국말은 "나는 키가 크다"처럼 곧이말이 두개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나는'은 으뜸곧이말이고, '키가'에서 '키'는 나에게 딸린 것이기에 딸림곧이말이다. "나는 소리가 들린다"의 경우 '소리'는 나에게 딸린 것이 아니라 얼인 것이다. 그래서 얼인곧이말이다. 그리고 "나랑 너랑 같이 가자"의 경우 '랑'은 같이곧이말이고, "여경아~ 놀자"처럼 아~가 붙으면 부름곧이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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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기것을 알고 남의 것과 비교하는 방식의 학문방법도 알려주셨다. 자기 것을 모르고 남의 것을 가져오면 그건 학문이 아니라 종속이다. 한국말의 말차림법을 알고, 영어의 그래마를 알고나서 둘을 비교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영어의 그래마를 그대로 가져와 한국말 말차림법에 적용하면 그것은 비교가 아니라 종속이다. 이 경우 영어의 그래마에 맞지 않는 한국말을 모두 예외적인 말들로 여겨진다. 말에 예외가 어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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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을 뜻을 구분하는 3가지(쓰임뜻, 짜임뜻, 바땅뜻) 방법을 소개해 주셨다. 첫째 쓰임뜻은 말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짐작하는 것이다. "노속을 먹었니?"라고 유치원 아이에게 물어보면 그 아이는 '노속'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먹는 것이겠거니 여긴다. 어른에게 물어보면 "노속이 뭐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말 그 자체의 뜻은 모르고 문장의 맥락에서 대충 그런 뜻인가 보다 알아듣는 경우가 바로 쓰임뜻이다. 대부분은 이렇게 말과 문장의 맥락적 쓰임뜻으로 단어나 말의 뜻을 이해한다. 두번째는 짜임뜻이다. '지나다'의 경우 '지+나+다'의 짜임으로 구성된다. '지'는 '먹지' '오지' '하지'처럼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말이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어딘가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나다'와 '지내다'는 짜임뜻이 다르다. '지나다'는 '나'의 의미로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고, '지내다'의 '내'는 '나+이'의 합성어로 나가 스스로 존재하는 이가 된 상태이다. 그래서 '지내다'는 무언가 스스로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다"라고 말하고, "나는 잘 지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내다"나 "나는 잘 지나"는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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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만들어지는 원리가 '바탕뜻'을 만드는 '바탕치기'에 있다고 강조하셨다. 바탕치기란 말의 바탕이 어떤 경험이나 의미와 연관되어 있는지 그 뿌리를 아는 것이다. 말은 기존의 경험의 공공성을 담은 그윗말과 새로운 경험을 엮어 바탕을 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바다'는 바른 것이다. 물은 '무는 것'이고, 토끼는 '톡끼는 것', 파리는 '팔팔한 것', 벌레는 '벌어지는 것', '맛'은 만나는 것 등등 여러 바탕치기를 소개해 주셨다. 이 바탕치기는 바로 인문학 그 자체다. 거꾸로 바탕치가기 안되면 인문학이 안된다. 한국말의 바탕뜻은 바로 한국사람들의 바탕치기 집단지성이다. 즉 한국말의 바탕뜻을 이해하면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왔는지 등등 한국사람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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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수업의 작은 단면일 뿐이다. 이번 주는 내용이 많아서 그런지 수업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업는 선생님도 업힌 학생도 피로감이 높았던듯 싶다. 다음주부터는 수업 시간과 분량을 소화할 수 있을 정로로 부탁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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