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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May 12. 2020

한국말 논리와 인식 구조

한국말 말차림법 8강

한국말 말쌓음

'말씀'이란 말을 쌓는 것이다. 말쌓기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쌓기, 다른 하나는 위에서 던져 쌓기다. 한국말은 전자에 해당된다. 먼저 "나는"이라는 곧이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학교에"라는 맞이말을 쌓는다. 함께하는 맞이말들을 모두 올린 뒤 가장 마지막에 "간다"라는 풀이것말을 놓는다. 그래서 한국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야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앞을 대충 들으면 함께하는 것들을 놓치게 되고, 마지막을 대충 들으면 함께하는 것들이 무엇을 할지 모른다. "간다"가 아니라 "안간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영국말와 중국말은 던져쌓기다. 영국말에서 곧이말에 해당하는 subject에서 'ject'는 던진다는 의미다. project는 앞으로 던지고, reject는 뒤로 던지고, inject는 안으로 던진다. 그리고 subject는 아래로 던진다. 아래로 던져진 subject가 기단이 된다. 그 위로 verb가 던져진다. verb는 subject를 규명하는 것으로 subject의 의도나 행위, 상태 등을 설명한다. 이 정도 나오면 던져진 말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이 뒤에 던져지는 말들은 목적이나 보충 등 대개가 구체적인 상황설명이다. 그래서 영국말은 한국말과 달리 앞부분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중국말도 비슷하다.   

영국말과 중국말은 던지는 대로 뜻이 드러나고, 한국말은 끝까지 쌓아야 뜻이 드러난다. 언어학에서 영국말은 굴절어, 중국말은 고립어, 한국말은 교착어라고 말한다. 이를 말쌓기의 순서나 방식으로 나누면 굴절어와 고립어는 비슷하다. 굴절/고립어와 교착어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실 굴절어는 연구가 많이 되어 있고, 고립어는 굴절어 연구를 잘 살피면 된다. 하지만 교착어는 말쌓기 방식이 완전히 달라 기존 굴절어 연구를 반영하기 어렵다. 게다가 교착어는 거의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최봉영 샘의 한국말 연구는 아주 중요하다. 한국말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일본말 등 다른 교착어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굴절/고립어 연구에 있어서도 비교 대상을 얻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말 논리

지난주 한국말은 '안과 밖'을 논리의 잣대로 삼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책이다"의 경우 "이것"은 밖에 있는 실체적 대상이고, "책"은 말하는 사람 머리 안에 있는 관념이다. 이 둘이 대응되면 "이다"이고 대응되지 않으면 "안이다(아니다)"이다. 안의 것은 그대로인데 밖의 실체적 대상이 변하면 "밖이었다(바뀌었다)"는 말을 한다. 이 대응은 기존 서양말의 논리처럼 sentence(다발말) 안에서 subject(곧이말)과 object(맞이말)가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관념과 실체의 대응이다. 이를 최봉영 샘은 '여김'이라 말한다. 그래서 한국말의 대응논리는 '여김논리'이다.

한국말에서 '이'와 '저'는 경험되는 실체이고 '그'는 기억되는 실체이다. 경험되는 실체는 밖에 있어야만 말할 수 있지만 기억되는 실체는 언제 어디서든 맘껏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책이다"를 말하려면 책이 앞에 있어야 한다. 반면 "그것은 책이다"라고 말할때는 책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는 강감찬 장군이다"처럼 과거의 인물을 불러낼 수도 있고, "그것은 외계인이다"처럼 경험하지 못한 대상도 말할 수 있다. 내 머리 속에 기억된 '그것'이 말로서 표현될 수 있다면 언제든 불러낼 수 있고, 불러낸 것들을 조립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이것'이나 '저것'과 달리 말쌓음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그것에 의한 말쌓음은 몇가지 수단이 있다. 소리와 문자다. 소리는 입으로 하는 '입말'이고 문자는 손으로 쓰는 '글말'이다. 이 둘을 보통 언어라 말하지만 사실 더 많은 언어가 있다. 손으로 그리는 '그림말'이 있다. 주로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하는 말이다. '숫자'나 '음표'처럼 쓰기와 그리기의 중간 행위도 있다. '숫자'나 '음표' 또한 중요한 언어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몸짓으로 하는 '짓말'이다. 손짓 발짓을 정교하게 다듬은 말이 바로 '수화'다. 요즘에는 이 수화를 언어로 취급해 '수어(手語)'라 말한다. 정리하면 사람은 자신의 생각=그것을 입말, 글말, 그림말, 짓말로 쌓아 소통한다.

한국말은 논리의 잣대가 하나 더 있다. '겉과 속'이다. 사람은 속을 알 수가 없고 오로지 겉만 볼 수 있다. 겉에서 본대로 속이 차 있으면 '참이다'이다. '참'은 '차다'라는 뜻이다. 참깨, 참꽃, 참기름, 참나무, 참나물 등은 모두 먹을 수 있다. 한국사람은 주로 먹을 것에 '참'을 붙혔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참하다' '참으로 좋다'라는 말처럼 좋은 것을 말할 때도 '참'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참은 겉과 속이 같은 상황이다. 겉과 속이 다르면 '속이다' 혹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겉에서 본 것과 속이 다르다고 느끼면 '속이다'라고 말한다. 속을 아는 상황에서 겉이 다르게 보이면 '겉짓(거짓)이다'라고 말한다. '겉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겉이 다른 경우 분명 누군가가 겉에 어떤 짓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즉 '속이다'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속인 것이다면, '겉짓이다(거짓이다)'는 인공적인 행위를 통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다. 때문에 속임말보다 거짓말이 더 나쁘게 느껴진다.

학교에서 논리학을 배울때 '참이다' '거짓이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A와 B가 대응되면 '참'이고, 대응되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말한다. 영국말로는 truth이고 false이다. 이를 우리가 '참' '거짓'으로 쓰는 이유는 일본사람들이 truth를 진眞으로, false를 위僞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 번역된 한자를 그대로 가져와 다시 한국말로 풀어 '참 眞' '거짓 僞'으로 쓴 것이다. 그들이야 그랬다치고, truth와 false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맞다'와 '틀리다'이다. 그래서 대응되면 '맞다'이고, 대응되지 않으면 '틀리다'라고 말하면 된다. 해방 75년이 지나도록 이걸 바꾸지 않고 아직까지 '참' '거짓'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즐기다'와 '기쁘다'

한국사람은 노래부르고 춤추며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즐기다' '즐겁다'라는 말을 즐겨한다. 그럼 한국말에서 '즐기다'는 무슨 뜻일까? 즐기다는 '즐다'로 '즐이 되게 하다'이다. '즐'은 '질'과 바탕을 함께 한다. 즉 '즐이 되게 하다'는 '질이 되게 하다'이다. 우리는 밥이 너무 익으면 "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사실 질게 된 밥은 씹기 좋다. 그래서 이가 안좋은 사람들도 맘껏 먹을 수 있다.

옛날에는 치과가 없었다. 그래서 30대만 되도 이가 빠져 잘 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이가 안좋은 사람들은 딱딱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음식을 마음껏 먹으려면 일단 질어야 한다. 과일도 무르익어 물렁해야 맛있다. 아이들이 쥬스를 좋아하듯 즙으로 짜서 먹으면 더욱 좋다. 이때 질은 상태, 즙인 상태가 바로 '질이 되게 한' 것이고 '즐겁(즐것)게' 된 것이다. 음식을 마음껏 즐기려면 질어야 한다.

'즐겁다'의 뜻에서 볼 때 한국사람에게 주로 '즐거운 것'은 '먹는 것'이다. 한국사람이 주로 먹는 것은 크게 4가지다. 가장 질이 높은 상태인 '국'이다. 그 다음은 '묵'이고, 그 다음은 '죽'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덜 진 것이 '떡'이다. 최봉영 샘은 우리가 흔히 먹는 밥과 반찬은 한자 '밥 반飯'에서 나온듯 싶다고 말하셨다. '국, 묵, 죽'은 이가 없어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다른 문명의 음식에도 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옛날 사람 대부분 이가 안좋았을 것이다. 특히 농경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곡식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돌이 많이 들어가 이가 더 안좋았다. 요즘처럼 치과가 없던 과거 사람들은 오로지 국과 죽 같은 질은 음식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무서웠던 치과가 반갑고 고맙게 여겨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즐긴다는 것' 즉 '즐겁다'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즐겁다'는 음식을 마음껏 씹을 수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마음껏 즐길 수 있으려면 '의지'와 '조건'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데 조건이 안되면 할 수 없다. 가령 '기타를 즐기는' 상황을 따져 보자. 일단 기타를 치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둘째 기타를 치고 싶은데 기타가 없으면 즐길 수 없다. 기타가 있다는 조건이 되어야 기타를 즐길 수 있다. 셋째 기타가 있는데 기타를 칠 줄 모르면 기타를 즐길 수 없다. 기타를 칠 줄 아는 능력이 되어야 기타를 즐길 수 있다. 이렇듯 '즐겁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즐기려면 복잡한 단계와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야 진정 즐길 수 있고, 즐거울 수 있다.

<논어>의 첫 다발말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다. 한국말로 뜻을 풀면 "깨치고 때에 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여기서 '말씀 설說'은 '기쁠 열悅'로 번역된다. 한자사전에는 說를 '기뻐할 열'로 풀기도 한다. 두 글자는 '언言'과 '심心'으로 왼쪽 부수가 다르고 오른쪽 '태兌'는 같다. 兌는 바뀐다는 의미로, 기쁨이 무언가 바뀐 것이라면 '說'은 말이 바뀌어 기쁜 것이고, '悅'은 마음이 바뀌어 기쁜 것이다. 무언가 깨치면 말이 바뀌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렇다. 한국말 말차림을 알게 된 후 한국말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덩달아 한국말에 대한 마음도 바뀌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한국말에서 '기쁘다'는 '깃브다'로 한국말 고어에서 '깃'은 새들의 둥지였다. '깃들다'는 '아늑하게 서려들다'는 의미로 '깃브다'은 아늑한 둥지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늑한 둥지에 가면 편안한 사람들을 만난다. 대게 가족이지만 때론 친구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퇴근길이 그렇듯 만나서 즐거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논어>의 두번째 다발말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이다. 한국말로 뜻을 풀면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즐겁다'에 해당되는 한자어는 '락樂'이다. 이 글자의 상형은 악기들이다. 중국사람에게 여러 악기가 서로 어울리는 상태가 바로 '즐거운' 것이다. 앞선 다발말과 함께 풀면, 말이 바뀌어 기쁜 상황에 더해 말벗하며 어울릴 수 있는 친구까지 있다면 즐거운 것이다.

이처럼 중국말과 한국말에서 볼때 중국사람에게 '즐겁다'와 한국사람에게 '즐겁다'는 다르다. 중국말에서 즐거운 것은 한국말에서 기쁜 것이다. 중국사람은 어울려 조화되는 것이 즐거운 일이고, 한국사람은 질게 되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말 '즐겁다'가 무엇인지 몰라 늘 중국말 '락樂'으로 즐겁다가 무엇인지 풀어왔다. '기쁘다'도 마찬가지다. 이제라도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들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국말의 인식 구조

최근에는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해 사람들이 어떻게 감각 경험하고 지각적으로 통합하고, 생각으로 이어지는지 그 과정이 상세히 밝혀져 있다. 최근 언어학은 신경과학과 연결되어 생각이 어떻게 언어로 구조화되는지 관심이 많다. 이런 언어학을 신경언어학이라 말한다. 강의록을 쓰면서 종종 거론하는 레이코프와 존슨이 대표적인 신경언어학자다.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들을 설명하려면 새로운 생각과 말이 요구된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말은 주로 서양말이라 이를 번역하기 위해 한국사람들은 새로운 한자말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한국말에는 한자말에 의지하지 않고도 뇌의 인식 구조를 번역하고 설명할 말이 있다. 바로 '늧' '얼' '넋' '알' 그리고 '말'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위 그림에서 보듯 실체적 대상인 '이것(사과)'이 있다. '것'은 순수하게 인식된 존재다. '것'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하면 '이것'이 된다. '이것'은 눈으로 본 '늧'이다. 한국말 '느낌'은 '늧이 된 상태'를 말한다. 느낌은 반드시 본 다음에 인식된 상태이기에 늘 존재보다 늦게 인식된다.

손에 칼이 베이면 약간의 시간이 흐른뒤에 아픔을 느낀다. 신경정보의 전달속도는 초당 약 27m로 손가락 끝에서 뇌까지 정보가 전달되는데 대략 0.5초정도 걸린다. 뇌에서 정보를 종합하고 행동을 명령해 근육으로 전달되는데 다시 0.5초가 걸린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지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총 1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늧은 항상 '늦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늧인 '느낌'은 '늦다'와 바탕을 함께 한다. 때문에 '느낌이 있다'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느낌이 허무하다는 뜻에서 '空'이라 말한다.

불교에서 늧=느낌은 주로 5가지로 구분한다. 이를 오감 혹은 오온이라고 말하는데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분류된다. 지금도 이 구분은 유효하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 시각이 압도적으로 크고, 촉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훨씬 더 섬세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뇌의 구조를 보면 시각영역이 상당히 크다. 그리고 손가락 끝 촉각의 경우 압력과 온도 등 약 2000개 이상의 느낌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지각은 감각이 종합된 상태다. 한국말로 이를 '얼'이라고 말한다. '얼'은 늧들이 모여 어린 이미지이다. '얼이다' '얼다'는 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물이 얼음으로 변할때 '얼다'라고 말하는데, 이때 물이 서로 어리면서 얼음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상상하면 된다. '얼굴'은 '얼음'처럼 늧들이 얽혀 울이 된 것이다. 한국말에는 '얼'이 많이 쓰인다. "얼추" "얼치기" "얼렁뚱땅" "얼임짐작" 등 '얼'은 주로 인식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의 얼을 기린다'과 같은 말은 다소 어색하다. 한국사람의 인식을 얼치기로 취급해 기리는 느낌이랄까.

"나는 사과가 보인다"는 다소 수동적인 '얼'에 해당한다. 반면 "나는 사과를 본다"는 '얼'보다 능동적이다. 이는 '이것'을 '어떤 것'으로 여기는 행위다. 다양한 '늧'이 '얼=이미지'로 맺히면 그 '얼'을 무언가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여겨진 것이 '넋'이다. '얼'이 '넋'이 되면 흐릿한 이미지가 또렷한 이미지로 변한다. 대강 인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또렷하게 인식한 것이다. 게다가 이미지를 기억에 있는 무언가로 여김으로서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간다.

넋들이 모이면 '알'이 된다. '알'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앎'이다. '알'로 인식하면 이제 비로소 '이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알=앎'이 공공성을 띈 말이 되어야 비로소 안에서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말해진 다발말이 바로 '이것은 사과이다'이다. 이처럼 단순한 말조차 아주 섬세한 인식과정을 거친다.

정리해보자. 사람이 인식하는 과정을 한국말로 풀면, '것'을 최초로 감각 인식한 '이것'은 늧이다. 이 늧들이 모여 '얼'이 된다. 일종의 귀납과정이다. 흐릿하게 얽힌 '얼'은 또렷한 '넋'으로 여겨진다. 이 '넋'은 일종의 감정적 상태이다. '넋'들이 모이면 비로소 '알'이 되어 통찰이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사람만이 아니라 개나 소, 파충류와 어류, 곤충 등 신경을 가진 모든 생명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즉 감각과 지각까지는 모든 생명이 공유한다.

하지만 사람은 지각을 소통할 수 있는 '말'을 갖고 있다. 개와 돌고래도 단순한 소리를 통해 소통을 하지만 사람처럼 섬세하게 범주를 나누어 소통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이 섬세한 범주구분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은 '말'을 통해 감각과 지각 다음 단계인 생각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알=앎'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알'을 공공적으로 소통가능한 '말'로 여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말을 통해 사람은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덕분에 사람은 빈약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찍히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포식자로서의 사람은 주변 동식물들을 파괴해 왔다. 이 파괴는 산업사회에 들어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땅위만이 아니라 땅속까지 심지어 사람 자신까지 파괴하고 있다. 이런 파괴는 전쟁이나 투쟁, 승리, 정복 등 대부분 말을 모질게 은유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기에 '말'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것이 '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 파괴를 반성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말'에 달려 있다. 전쟁과 파괴와 같은 '모진 말'이 사랑과 평화와 같은 '어진 말'로 바뀌면 분명 모두가 기쁠=說 것이다.  


'말미암다'와 '빌미암다'

모든 것은 말에서 비롯된다. 이때 '비롯'이란 '빌려온다'는 의미다. 처음을 의미하는 '비로소 始'는 '비롯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비'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다. 환경파괴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기후변화이다. 기후변화는 '비'에 달려있다. 비가 많이 오면 고온다습하고, 비가 적게 오면 건조하다. 인류는 지구의 거의 모든 땅을 점령했다. 하지만 아주 고온다습한 아프리카 콩고와 브라질 아마존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또한 아주 한랭건조한 북극과 남극 또한 그렇다. 사람 또한 비에 크게 의지한다.  

단군신화를 보면 '풍백, 운사, 우사'가 순차적으로 나온다. 풍백은 바람이고, 운사는 구름이고, 우사는 비다. 바람이 구름을 몰고 오면 비로소 비가 온다. 단군신화가 바람과 구름, 비를 중요시 여겼던 이유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이다. 농사는 강수량이 아주 중요하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하늘에서 비를 빌려와야 한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비를 빌리기 위해 정성껏 빌었다. 빌어도 비가 안오면 황제가 책임을 진다. 중국의 고대 상商나라의 황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장작 위에 올라 제사를 지낸다. 비를 빌리기 위해 자신을 신의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다. 그만큼 농경문명에서 비는 절박했다.

한국말에서 사람의 인식과 논리는 안과 밖을 잣대로 삼는다. '빌다'는 나의 밖에서 빌려오는 것이다. 이를 '빌미암다'라고 말한다. '빌미암다'는 '빌믜삼다'로 짜임새는 '빌+믜+삼아'이다. '믜'는 매다, 묶다의 의미다. 매고 묶으려면 분리된 것이 있어야 하기에 분리하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빌미삼아'는 나의 밖에서 '빌린 것'을 매개로 삼아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빌미암다'가 나의 밖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나의 안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은 '말미암다'이다. '말미암다' 또한 '말믜삼다'로 짜임새는 '말+믜+삼다'이다. '말'은 내 밖의 경험을 '늧-얼-넋-알-말'의 과정을 거쳐 내 안으로 들이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말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한다. 한국말에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말다'가 몇가지 뜻을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크게 3가지인데 "먹고 말다"의 경우, '말다'는 '한다'는 의미다. "먹지 않고 말다"의 경우, '말다'는 '그만둔다'는 의미다. "먹고 말았다"의 경우, '말았다'는 '이루었다'는 의미다. 즉 '말다'는 먹을지 말지의 '판단과 의지', 먹었다는 '능력과 이룸'을 말할 때 모두 쓰인다.  

한자로 원인을 의미하는 '인할 인因'자를 '말미암을 因'이라고 말한다. 因의 모양에서도 알 수 있듯, '원인原因'은 내 밖에서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내 안이 아니 내 밖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야 뭔가 객관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은 것이 중국과 서양의 학문이다. 그 학문들을 빌미로 삼아 나를 말미암으려 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말미암으려 하는 태도는 좋다. 하지만 '빌미'만을 주장하고 자신의 '말미'를 숨기려 하면 안된다.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다. 빌미가 말미로 이해되어야 진정 자신의 것이 되고 떳떳하게 소통할 수 있다.   

또 자유自由의 '유由'자를 '말미암을 由'라고 말한다. 앞서 '즐겁다'를 묻고 따지고 풀면서 기타를 치는 행위를 예로 들었다. 이 예는 '자유'를 설명할때 쓰는 예이다.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소극적 자유'는 일종의 조건이다. 기타를 치고 싶은 상황이라면 기타가 있어야만 기타를 칠 수 있다. 즉 기타가 있다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적극적 자유'는 능력이다. 기타가 있더라도 기타를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타를 칠 수 있는 자유를 즐길 수 있다. 이렇듯 '자유'는 마음껏 할 수 있는 '즐거움'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를 좋아하는 것이다. 다만 즐거움이 그랬듯 자유에도 '의지'와 '조건'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책임감도 필요하다.


자연과 자유

'자연自然'과 '자유自由'는 '自'라는 한자를 공유한다. 우리는 이 한자를 '스스로 자自'라고 푼다. 그래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고,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다'이다. 자유는 내 안에서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니 '스스로 자'라는 풀이가 마땅하다. 하지만 자연은 과연 '스스로' 하는가? 스스로가 아니라 '저절로'로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자연'의 '자'는 '저절로 自'로 풀어야 마땅하다.

양자물리학에서 자연의 힘은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약력, 강력, 전자기력, 중력이다. 이 중 약력과 강력, 전자기력은 양자내에서 일어나는 상호적 힘으로 같은 힘의 다른 양태다. 그런데 입자 단계에서의 중력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어쨌듯 우리는 중력을 경험하고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중력이 없다면 지구 밖 우주에서 처럼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닐 것이다. 이 중력은 누가 '스스로' 하는 것일까?

한국말은 일이 일어나는 현상을 몇가지로 구분한다. '그냥 일어난다'는 나와 상관없이 그냥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절로 일어난다'는 나와 상관있는 것들이 중력과 같은 힘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난다'는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가 중력의 방향을 거슬러 일어나는 것이다. '위해서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생명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함께 하는 것이다. 이때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기도 한다. 일종의 책임감때문이다.

'그냥, 저절로, 스스로,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논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바로 '이발理發 vs 기발氣發' 논쟁이다. 어떤 현상이 일어남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조선선비들은 두가지로 의견이 나뉜다. 퇴계는 '이발理發'을 주장하고, 고봉은 '기발氣發'을 주장한다. 물리학으로 치면 '기氣'는 생명을 이루는 입자들이다. 원자일수도 있고 양자일수도 있다. 그래서 '기발氣發'은 물리적 현상인 외부적 요인을 중요시한다. 쉽게 풀면 모든 것은 경험에 의지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기발은 "(경험에서) 비롯함"을 중요시 여긴다. 반면 '이발理發'은 경험보다는 '의지意志'를 중요시 여긴다. 경험을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감각과 지각에 의지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감각과 지각을 누를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의지는 생각과 말에 의해 형성된다. 퇴계는 이 '의지'를 사람의 판단 기준으로 본 것이다.

현상의 원인을 '의지'에 둔다는 것은 사람 중심적 태도이다. 어떤 현상을 '스스로'와 '위해서'라는 입장에서 판단한다. 반면 현상의 원인을 '경험'에 둔다는 것은 사람 이외의 모든 생명과의 공통점을 고려한 것이다. '스스로'와 '위해서'에 앞선 '그냥'과 '저절로'를 모두 고려해 판단한다. 하지만 모든 현상을 고려하다 보니 '스스로'와 '위해서'가 다소 위축된다. 즉 사람으로서 윤리적 책임감이 후퇴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발理發 vs 기발氣發'은 선택과 포기를 강요하는 논쟁이 아니라 순서 '기발氣發 -> 이발理發'로 두고, 나아가 둘 모두를 함께 고려한 '기발氣發 + 이발理發'로 보아야 마땅하다. 물론 퇴계와 고봉의 논의도 이렇게 나아갔다.


국뽕과 한국사람'도'

마지막으로 요즘 많이 거론되는 '국뽕'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요즘 한국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인정을 받으면서 한국사람들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때론 한국사람이 대단한 것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있다. 근대 이후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또한 어떤 것에 있어서는 확실히 한국사람들이 잘 해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자부심과 자존감,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럼 어떤 것은 오만한 '국뽕'이고 어떤 것은 '자부심'이 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이 또한 한국말에서 근거를 찾으신다.

마디말은 씨말로 이루어져 있다. 씨말은 앛씨말, 겿씨말로 구분된다. 겿씨말은 앛씨말의 구실이기에 겿씨말을 통해 마디말이 어떤 태도를 갖는지 살필 수 있다. 곧이말(subject)의 겿씨말 중 많이 쓰이는 것이 "은/는, 이/가, 만, 도"이다. 여기서 "는"은 "난호다"로 "나누다"는 의미다. 이때 '난'의 'ㅏ'는 '아래 하'이다. 가령 '한국사람은 ~하다'라고 말할 때 '은'은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졌을때 어느 한쪽을 말하는 경우다. '한국사람이 ~하다'에서 '이'는 전체에서 구체적인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경우다. '한국사람만 ~하다'에서 '만'은 전체에서 어떤 부분만을 떼어내서 말하는 경우다. '한국사람도 ~하다'에서 '도'는 전체에서 소외된 부분을 포함시키는 경우다. 선생님이 SNS에 올린 글을 다시 인용하면.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어떠한 사람으로 알아보는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한국사람은 ~다"라는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예컨데 "한국사람은 생일을 맞으면 미역국을 먹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길 때, "~은"을 써서 "한국사람은 ~다"라고 말한다.

둘째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한국사람이 ~다"라는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사람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여러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한국사람이 어떠한 경우에 어떠하게 되었을 때, "~이"를 써서 "한국사람이 ~다"라고 말한다.

셋째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한국사람만 ~다"라는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사람만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여러 나라 사람 가운데서 오로지 한국사람만 어떠하게 되었을 때, "~만"을 써서 "한국사람만 ~다"라고 말한다.

넷째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한국사람도 ~다"라는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사람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여러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한국사람도 다른 나라 사람과 같이 하게 될, "~도"를 써서 "한국사람도 ~다"라고 말한다.    

<2020년 5월11일 최봉영 페이스북 게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어떠한 사람으로 알아보는 네 가지 방식 중 국뽕에 해당되는 것은 세번째이다. 선생님 글을 인용하면 "셋째로, 한국사람이 "한국사람만 노래를 잘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된다. 다른 나라 사람도 노래를 잘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한국사람만 노래를 잘한다"라고 믿고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를 "국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처럼 "~만"을 제외한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 '한국사람도'는 국뽕에 해당되지 않는다. 국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은, 이, 도'를 모두 '만'으로 보아 한국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국뽕'이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한국말을 강조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를 '한국사람만'으로 여겨 국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한국사람만'이 아니라 '한국사람도'를 말하고 있다고 하신다. 한국사람은 600여년 전부터 중국사람들이나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빌려와 판단의 잣대로 삼았다. 그래서 한국사람도 중국이나 서양사람들처럼 나름의 판단 잣대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서양말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에도 나름대로 서양말처럼 '논리'와 '인식' '존재' 등 인문학적 방법론을 갖고 있다. 중국사람이 '水'를 흘러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한국사람은 '물'을 '무는 것' '무서운 것' '무게의 잣대가 되는 것'으로 여긴다. 이렇듯 한국사람도 중국사람처럼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갖고 있다.

한국말에서 나름의 잣대를 찾는 것음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다. 지난 600년 한국사람은 중국말과 서양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젠 중국말과 서양말을 빌미로 삼아 한국말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중국말과 서양말을 한국말로 풀었으니 한국말을 모르면 중국말과 서양말을 알 도리가 없다. 가령 '아름다울 美', '아름다울 beauty'라고 말하면서 정작 '아름다움'은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때문에 '美'와 'beauty'를 또렷하게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제쳐두고 '美'와 'beauty'의 어원을 뒤져 그 의미를 찾으려 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과 서양의 잣대를 보편적 잣대로 여겨왔다. 이는 중국사람과 서양사람'만' 잣대가 있다는 태도에 가깝다. 거꾸로 그들의 국뽕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과 자유의 '自'가 '저절로'와 '스스로' 두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듯 잣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한국말이라는 맥락에서 한국사람의 잣대가 있다. 한국말의 바탕을 아는 것은 한국사람 스스로의 잣대와 줏대를 세우는 것이다. 각각의 문명에서 각각의 말로 잣대를 세우고 줏대로 삼았듯이 한국사람도 한국말에서 잣대를 찾아 나름의 줏대로 삼는 것은 '국뽕'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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