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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May 19. 2020

한국말과 한국사회

한국말 말차림법 9강

계몽의 태도

지식인들은 '계몽'을 하고 싶어한다. '계몽啓蒙'은 '열 계啓'와 '어두울(어릴) 몽蒙'의 합성어로 짜임뜻은 "어두운 것을 열어 밝게 한다"는 의미다. '계啓'에는 '후后'와 '구口'가 포함되어 있다. 즉 이 글자에서 의도하는 '연다'는 말로서 상대방을 일깨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계몽은 '말로서 생각이 어둡거나 어린 사람을 일깨워준다'는 의미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모르는 것을 알도록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지적질, 꼰대질이다. 그럼 이런 의문이 생긴다. 계몽에 있어 긍정과 부정의 경계는 어디일까? 가르침과 꼰대질은 무엇을 잣대로 구분할까?

한자에 있어 '계몽'의 의미를 살펴보았으니 서양말에 있어 계몽의 의미도 살펴보자. 서양사람들에게 '계몽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칸트를 떠올릴 것이다. 철학사에서 칸트는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불린다. 동시에 낭만주의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도 있다. 즉 칸트는 계몽주의의 낭만주의의 경계에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몽주의의 끝과 낭만주의의 시작점에 있다. 

칸트는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글을 썼다. 우리의 질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제목이다. 이 글에서 칸트는 계몽은 누군가에 의존하는 어리석은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이때 이성이란 '생각하기'다. 그러니까 계몽은 누군가의 생각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갖으려면 스스로 생각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권리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말미암는 '자유自由'의 의미는 지난주에 풀었으니 생략한다.) 이 '자유'가 낭만주의를 낳았다. 그래서 칸트는 의도치 않게 낭만주의의 어머니가 되었다. 아무튼 칸트 덕분에 자유가 '계몽'과 '낭만'의 경계라는 점을 알았다. 그럼 이 경계가 계몽의 긍정과 부정의 경계일까? 이건 좀 더 생각해보자.  

살펴보았듯이 한자의 '계몽=啓蒙'과 칸트의 '계몽=Enlightenment, Aufklärung'은 의미가 거의 같다. 서양의 계몽 개념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니 당연하다. 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양'이다. 한국말로는 '가르쳐 기르기'이다. 계몽은 '가르치기'에 해당된다. 배우려는 사람은 누군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칸트의 주장처럼 스스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군가의 생각을 빌미삼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원하지도 않는 가르침을 받으면 결코 반갑지 않다. 이미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강요받고 억압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원하는 가르침은 주지 않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자신이 원하는 가르침만을 강요하는 태도랄까. 

한국의 지식인들은 '꼰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계몽에 있어 상대방의 생각(이성적 자유)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문맹률이 90%였던 시절에는 이 강요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대중교육이 이루어지고 한국사람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면서 이 강요가 잘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 기법이 바로 낯선 외국말 쓰기다. 외국말 쓰기는 사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오랜시간 이어진 지식인들의 수법인데 한국 지식인의 경우 중국의 '한자'를 가져와 한자를 모르는 한국사람들을 무시하고 억눌렀다. 

어제 수업은 5월18일이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기리는 날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SNS에 5.18에 대해 쓴 글을 소개해 주셨다. 그런데 이 글은 5.18의 참상과 거짓을 지적하는 글이 아니다. 그런글이라면 이미 90년대에 책에서 여러번 언급했고, 지금은 이 사태에 더 밝은 사람들이 있기에 굳이 또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은 '광주민주화항쟁'을 '광주사태'로 호도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포된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셨다. 선생님은 40년전 배포된 이 책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갖고 계셨다고 한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쓸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지에서 보듯 이 책은 저자가 없다. 출판사 이름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제목만 달랑 있다. 선생님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두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글을 인용하면, 


첫째로, 이 책은 "진상眞相"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조금만 눈을 팔게 되면, 언제든지 거짓을 진상으로 꾸밀 수 있고, 진상을 거짓으로 덮을 수 있다.

둘째로, 이 책은 한자漢字를 배운 소수의 유식자有識者만 읽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수의 有識者만 협력자로 둘 수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은 누구나 들으면 뜻을 알아볼 수 있는 말을 모두 한자로 바꾸어썼다.  그들은 "진행"을 "進行"으로, "시작"을 "始作"으로, "자극"을 "刺戟"으로, "유포"를 "流布"로, "암흑"을 "暗黑"으로, "돌변"을 "突變"으로 바꾸어서 말했다. 그들은 소수의 유식자有識者들이 유식有識함에 젖을 수 있도록 특별 대접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小數의 유식有識한 부역자附逆者, 조력자助力者, 동조자同助者였다.


먼저 이 책은 '거짓'을 말한다. 거짓이란 '겉짓'으로 속을 감추기 위해 겉에다가 어떤 짓을 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이 속을 감추기 위해 교묘한 겉짓을 했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모두 말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사진과 내용만을 골라 사태를 그럴싸하게 짜집기 한다. 이를 토대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한다. 

두번째는 말과 글을 대하는 태도다. 사실 저 위에 써 있는 한자들은 한국사람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대부분 한자로 썼다. 한자를 써서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한자를 아는 소수의 사람하고만 소통하려 한다. 그들만 설득하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다는 한국지식인들의 오랜된 오만함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시 전두환 정부 사람들이지만 한자와 같은 외국말로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민중을 소외시키는 태도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태도이다. 선생님은 그 예로 '기미독립선언서'과 '미국독립선언문'을 비교한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제목부터 한자다. '오등吾等'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겿씨말을 빼곤 전부 한자다. 민중들은 전혀 읽을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글이다. 반면 미국독립선언문은 누구나 읽고 이해할만한 일상의 말로 쓰여져 있다. 두 독립선언서를 비교하면 당시 독립을 주장한 한국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말과 소통에 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형식적 권위주의 

한국은 '권위'보다 '권위주의'가 강조되는 사회다. '권위'는 서로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반면 '권위주의'는 형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권위주의를 흔히 '(껍데기만 있는) 형식적 권위주의'라 말한다. 선생님은 한국사회의 형식적 권위주의에 4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이 또한 인용해 보자. 


첫째, 한국사람이 배우고 쓰는 높낮이말은 사람들이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서 말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권위의 높낮이를 달리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니, 지위가 높은 사람은 저절로 권위를 높이는 말을 듣게 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저절로 권위를 낮추는 말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권위를 높이는 말로써 대접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발버둥을 친다. 지위가 낮으면 권위를 높여주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도 권위를 높여주어야 하는 일을 억지로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크게 서럽다. 오늘날 높낮이말은 사람들이 형식적 권위주의에 젖어서 살아가도록 앞서서 이끌어가는 구실을 한다. 

둘째,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던 전통적 신분제도는 권위주의를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였다. 신분제도는 모든 사람을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서 권력과 권위의 높낮이가 달라지도록 만들고, 그것에 따라서 장신구, 건물, 말씨 따위에 높낮이를 두도록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신분만 높으면, 대단한 형식적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1894년에 갑오개혁을 통해서 전통적 신분제도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신분제도에서 형성된 권위주의 가운데서 어떤 것들이 남아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형식적 권위주의를 북돋우는 일을 하고 있다.  

셋째, 한국의 인문학자는 중국이나 서양에서 만들어진 지식을 빌려서 학문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다. 그들은 밖에서 빌려온 지식을 가지고 철학, 윤리, 교육, 미학 따위를 풀어내는 잣대와 줏대로 삼는다. 이러니 그들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이미 잘 아는 것처럼 꾸며서 말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들이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스스로 지식을 만들어서 잣대와 줏대로 삼는 것을 가로막는 일이 많았다. 이러니 사람들은 스스로 지식을 만들어서 잣대와 줏대를 세우고, 학문의 권위를 세워나가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것은 사람들에게 형식적 권위주의를 북돋우는 일을 한다.

넷째, 한국에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일에 앞장을 서는 종교, 정치, 문화와 같은 영역의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에 짙게 젖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어가려고 할 때,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가져온 것으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들은 한국사람이 살아온 바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밖에서 가져온 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풀어갈 수 있을 것처럼 내세우는 일이 많다. 이러니 사람들은 그냥 따라가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어서, 어떤 것이 참으로 옳고 맞는지, 묻고 따지는 일을 할 수 없다. 이런 것은 사람들에게 형식적 권위주의를 북돋우는 일을 한다.


정리하면 형식적 권위주의의 주요 원인은 '높낮이말' '오래된 신분제' '빌려온 지식' '부실한 바탕'이다. 높낮이말과 신분제는 그렇다치자. 빌려운 지식까지는 좋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지식을 제대로 곱씹지 못하고 빌린 상태로 계속 놔두며 권위를 누려왔다. 그 이유는 바탕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이 부실한 바탕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것이 최봉영 샘의 주장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한국말 바탕 공부가 바로 이 과정이다. 

선생님은 퇴계와 같은 조선의 몇몇 지식인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주자와 같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넘어섰다고 말하셨다. 그 이유는 번역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중국의 한자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중국말과 한자를 철저하게 공부했고, 다시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한국말 바탕을 섬세하게 살피었다. 가령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우 '격물格物'을 "사물(物)을 연구한다(格)" 혹은 "사물로 연구한다" "연구된 사물" 등등 겿씨말과 말의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점을 섬세하게 따저 물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경敬'의 경우도 중국사람이 갖고 있는 '敬'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한국사람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시 따져 물어 '고마(곰곰이)'라는 한국말을 찾아 '敬'을 "고마 敬'으로 풀었다. 이렇듯 한자어를 한국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국사람인 퇴계는 중국사람보다 '格物'나 '敬'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다산은 기호(嗜好=취향)를 강조했다. 사람의 기호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다산은 한자말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한국사람의 경험을 중요시 했다. 이렇듯 번역은 경험과 밀접하다. 사과의 맛으로 예를 들면, 중국사람은 '중국사과'를 갖고 사과맛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를 번역하려는 한국사람은 중국사과를 먹어보고 다시 한국사과도 먹어보아 자연스럽게 두 사과의 맛을 비교하게 된다. 사과맛을 더 꼼꼼히 살피기 위해 일본사과 독일사과 영국사과 등 다른 곳들의 사과도 먹어본다. 여러사과를 먹는 과정에서 중국사과만을 먹어본 사람보다 사과맛을 더 잘 알게 된다. 이쪽과 저쪽을 함께 경험함으로서 중국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맛을 알게 된다. 

그래서 번역을 할 때는 외국말만이 아니 내가 알고 있는 말의 바탕도 잘 알아야 한다. 때론 내가 쓰는 말의 바탕과 번역할 대상을 잘 안다 하더라도 서로 통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번역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번역이란 어떤 것들은 대충 넘겨야 할 수밖에 없다.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번역의 한계를 인정하고 번역할 대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찾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번역 경험이 많은 이성민 샘도 최봉영 샘과 비슷한 지적을 한 적이 있다. 한국번역자들은 정작 중요한 것은 대충 넘기거나 생략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만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한국말에 대한 바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서양말을 중국의 한자어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한자어는 다시 한국말로 번역되어야 하기에 이중의 고역이다. 만약 한국말의 바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한자어를 건너띄고 서양말을 바로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런 노력은 없는 듯 싶다. 

자신의 바탕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의 것도 빌릴 수 없다. 억지로 빌려온다 하더라도 제대로 소통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해야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이해되지 못한 말을 듣는 것도 곤혹스럽다. 빌려온 것으로 억누르고 억눌리게 됨으로써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은 '형식적 권위주의'에 빠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퇴계나 율곡, 다산 등 몇몇 학자 이외에는 모두 빌려온 것에만 의지했다고 한다. 우리 시대는 오죽하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요즘 나오는 언론의 말과 글을 보면 한자어의 사용빈도가 줄고 있다. 학문적 용어와 번역에 있어서도 한자 표기를 거의 찾기 어렵다. 대부분 한글로 표기하고 되도록 한국말로 풀어주려 노력한다. 어쩌면 우리시대는 삼국시대 이후 한국말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시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한국사람 대부분이 한글이라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 디지털 덕분에 소통의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고, 인공지능 번역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한국말과 한글의 사용성은 더욱 커질듯 싶다.

한국말의 바탕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쓰고 있는 말과 글을 제대로 이해하면 서양이나 중국 등 남의 것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더욱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럼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억누르는 계몽이 아닌 서로 상호적인 계몽을 하게 됨으로써 '형식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제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해법이 나온듯 싶다. "계몽에 있어 긍정과 부정의 경계는 어디일까?" 이 경계는 바로 '형식적 권위주의'다. 그리고 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해법은 자신이 쓰는 말에 대한 바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가 강조했던 생각하기(이성)의 자유, 즉 계몽의 끝에서 낭만으로 건너가는 '자유'의 자자격을 갖게 된다. 일방적 꼰대가 아닌 자유롭게 소통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권위가 싹트게 될 것이다. 


배우기의 4가지 유형

사람들은 남의 지식을 빌미삼아 스스로 말미암는 성장을 한다. 이 과정이 바로 '번역'이다. 외국말을 한국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이지만, 남의 말을 나의 말로 바꾸는 것도 번역이다. 이 번역 과정에서 말하고 쓰는 사람이 있고, 듣고 읽는 사람이 있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주로 가르치는 사람이고, 듣고 읽는 사람은 주로 배우는 사람이다. 앞서 계몽과 권위주의에서 가르치는 사람 입장을 다루었으니, 이번엔 배우는 사람 입장을 살펴보자. 

사람이 배우는 이유는 '흥미' '시험' '논문' '새로운 판',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흥미'와 '시험'을 기존에 있는 정보나 지식을 그대로 얻는 것이다. '논문'과 '새로운 판'은 기존의 정보를 잣대로 삼아 나름의 줏대를 세우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관점이나 지식을 차리는 것이다. 

첫번째 유형인 '흥미'를 살펴보자. 사람은 흥미로운 것에 끌린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재밌다. 흥미와 재미로 가르치는 사람은 이것저것 지식을 늘어놓길 좋아한다. 흥미와 재미로 배우는 사람도 이것저것 정보를 주워서 늘어놓는다. 잘 기억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유형은 '시험'이다. 사람은 반드시 통과해야할 시험이 있으면 흥미롭지 않아도 집중하게 된다. 시험은 시험의 내용보다는 통과 여부가 중요하다. 되도록 빨리 통과하면 좋다. 시험은 긴급함을 요구하기에 효율적으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용의 요점을 알아야 한다. 이 요점을 잘 정리해주는 사람이 1타강사다. 유명한 학원 강사는 방대한 교과내용을 요리조리 잘 묶고 분류해 요점의 갈래를 잘 잡아준다. 이 요점 갈래는 시험을 앞둔 입시생들에게 아주 요긴하다. 하지만 시험을 보고 나면 끝이다. 

세번째 유형은 '논문'이다. 논문을 쓰는 사람은 심사에 통과하거나 인정받아야 한다. 관심을 둔 분야의 기존 정보와 새로운 정보를 잘 조화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새로운 관점은 기존에 차려진 판에서 너무 어긋나면 안된다. 기존의 판에서 허락된 것만이 좋은 논문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사람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에만 흥미를 느낀다. 그 정보를 얻으면 기존의 정보와 버무려 차려본다. 학문은 이렇게 차려진 논문들이 차곡차곡 쌓여감으로서 발전한다. 하지만 이 논문들은 기존 분야의 경계와 한계를 넘지 못한다. 당연히 논문을 쓰는 사람의 배움도 그 한계에 머무리게 된다. 

네번째 유형은 '새로운 판'이다. 어떤 분야의 끝에 다다르게 되면 기존 분야의 경계와 한계에 답답함을 느끼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게 된다. 나아가 한계를 넘어 새로운 판 만들기에 관심을 둔다. 이런 사람들은 시험이나 논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첫번째 유형처럼 '흥미'를 중시한다. 하지만 늘어놓는 흥미에 만족하지 못하고 갈래를 잡아 새로운 무언가를 차린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판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판을 만들어 낸다. 요즘에는 대학이나 학문 분야에서 이런 경우를 찾기 어렵고 기업이나 경영 분야에 새로운 판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가르치는 사람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도 여러 욕망의 갈래가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의도와 요구가 잘 만나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데 그렇지 못하면 서로 힘들다. 이번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은 네번째 유형인 '새로운 판' 만들기이다. 흥미로운 정보를 원하거나, 시험이 급하거나, 논문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수업은 유익하고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 기존의 판이 답답해 새로운 판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이처럼 계몽은 어느 한쪽의 요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요구가 같을때 비로소 성사된다. 그래서 '같음'은 아주 중요하다. 


한국말에 있어 '같다=동일률'의 논리

서양말의 대응 논리는 곧이말(subject) 안에 맞이말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가령 "this is book"이라고 말하면 'this'라는 말 안에 'book'이 내포되어야 한다. 다른 예를 들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말에서 '총각'의 개념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총각=결혼하지 않는 사람'의 대응이 형성된다. 이때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개념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를 동일률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다발말 분석은 서양말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논리이자 판단 기준이다. 

7~8강에서 우리는 한국말에도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논리는 다발말(문장) 내의 '대응논리'와 달리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정에서 생기는 실체와 관념의 '여김논리'다. 그래서 한국말에서 안과 밖, 겉과 속은 논리적 판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잣대다. 그런데 한국말에도 서양말처럼 다발말 내의 대응논리가 있다. 이 대응논리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같다'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배가 고프다" "이것은 빛깔이 붉다"에서 곧임말인 "나는"과 "이것은"은 "배가 고픔"과 "빛깔이 붉음"을 갖고 있는 임자다. 그래서 "나=배가 고픔" "이것=빛깔 붉음"이라는 같음=동일률이 성립된다. 이렇듯 '같다'는 '갖다'와 바탕을 함께 한다. 이쪽과 저쪽이 서로 갖고 있는 것이 동일한 경우 '같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다'는 '갖다, 갖추다'와 가족이다. 모두 '가'라는 말을 공유하고 있는데, '가'는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으로, 나아가면서 무언가를 가르고(분류), 가리키고(방향), 가르치고(지시), 가지는(소유) 일을 한다. 그래서 '같다'라는 말에는 분류와 방향, 지시, 소유의 개념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같다'의 바탕을 알았으니 이제 다발말의 말씀(말쌓음) 구성 논리를 살펴보자. "이것은 빛깔이 붉다"라는 다발말은 '이것' 안에 내포된 색의 속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은 으뜸곧이-마디말'이고 '빛깔이'는 '이것'에 딸려 있는 딸림곧이-마디말이다. 그리고 '붉다'는 풀이것-마디말이다. "이것은 빛깔이 붉은 것이다"라고 말하면 '붉은'은 매김-마디말이고 '것이다'는 마침-마디말이 된다.

"이것은 빛깔이 붉은 것이다"라는 다발말에는 두개의 논리 구조가 있다. 첫째 '이것=빛깔이 붉은'의 대응이다. 그리고 '이것'이 '것'이 서로 여겨지는 상황으로 '이것'은 실체이고 '것'은 나의 관념이다. "이것은 빛깔이 붉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이것'과 '빛깔이 붉은'이라는 대응이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보이는 현상과 내 관념 안에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과 뒤에 나오는'것이다'는 안과 밖의 여김논리다. 그런데 "이것은 빛깔이 붉은"은 여김논리가 아니라 서양말과 같은 다발말 내의 대응논리가 된다. '이것'이 갖고 있는 속성과 '빛깔이 붉은'이라는 속성이 서로 대응하는지 여부를 따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에서 '같다'는 여러 글자가 있다. '如, 同, 若'는 모두 '같을'로 번역한다. '오히려 猶'에서 오히려는 '오힐'으로 한국말 고어에서 '같음'을 의미한다. '이룰 可'를 예전에는 '어루 가'라고 말했다. 이때 '어루'는 '얼추 같다'는 의미다. 可는 옮음, 이룸, 얼추 등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데 모두 '같음'을 의미한다. 

한자에서 '같음'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듯이 한국말에도 '같음'의 갈래가 나누어져 있다. 크게 두갈래인데 첫번째는 앞서 '이것'과 '빛깔이 붉은 것이다'처럼 이쪽과 저쪽이 서로 여겨짐으로서 같아지는 경우이다. 두번째는 속성이 이루어저 목적하는 바에 도달해 같아지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사람같다"라고 말할 경우 '사람'이라는 속성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속성에 다다르면 "사람같다"라고 말하고 그 속성에 다다르지 못하면 "사람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여김으로 같아지는 경우는 주로 사물들의 현상이나 용도에 쓰이고, 이룸으로 같아지는 경우는 주로 생명이 있는 동식물의 성장과정에 쓰인다. 가령 "이것은 분필 같지 않다"라고 말할 경우 이 분필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하는 분필의 유용성을 만족시키지 못한 상태를 여겨 말한 것이다. 생명체의 경우는 "이것은 사람 같지 않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이 사람다움의 속성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여겨서 같아지는 경우'는 밖(겉)에서 보아 이쪽과 저쪽이 서로 여겨지는 상황이고, '되어서 같아지는 경우'는 안(속)에서 성장이나 성숙을 통해 목적한 속성에 다다르는 상황이다. 

되어서 같아지는 경우 한국사람은 '큰다'라고 말한다. 한국사람은 '큰 것'을 아주 중요시 여겨 '德'을 '큰 덕德'이라 말하고 '仁'도 '클 仁'이라 말했다. 공자의 정명正名,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풀때도 "군자는 군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로 풀어 '답게=이룸'처럼 되어서 같아지는 과정을 강조했다.  

한국말에서 '곧이말'과 '맞이말'의 관계는 '풀이것말'에 달려있다. 그래서 다발말내의 대응 관계를 알려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풀이것말'을 잘 살펴야 한다. '풀이것말'은 크게 '꼴, 일, 이' 3가지로 나누어진다. "나는 키가 크다"에서 '크다'는 꼴을 의미하기에 '꼴지님-마디말'이다. "나는 밥을 먹는다"에서 '먹는다'는 일어나는 일을 의미하기에 '일지님-마디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름이 윤여경이다"에서 '윤여경'은 '이지님-마디말'이다. 여기서 '지님'은 또한 '가진'이란 말과 비슷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지님'은 본래의 속성에 가깝고, '가짐'은 밖의 것을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 즉 획득된 속성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초반에는 '꼴가짐, 일가짐, 이가짐'으로 쓰다가 최근에 '꼴지님, 일지님, 이지님'으로 바꾸었다고 말하셨다.    


어울리다와 어질다

'사람답다'는 것은 사람다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사람다움이란 크고 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키는 유전적 한계가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그 한계가 없기에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내 마음과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야 가능하다. 한계를 넘기 위해 먼저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외국말과 남의 생각들을 경청해 나의 말로 번역하면 좋다. 이 번역을 바탕으로 나의 마음을 크게 하고 생각으로 참되게 함으로서 사람다움에 가까워질 수 있다. 

번역을 하려면 일단 어울려야 한다. 어울리려면 먼저 '어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울리다'의 짜임은 '어+울+리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는 이쪽에서 저쪽을 구분하고 연결하는 말이다. 이쪽에 있는 것이 '아'이고 저쪽에 있는 것은 '어'이다. 부모님을 의미하는 한국말 '어버이'이는 '어벗이'에서 비롯되었다. '벗'은 '어'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어무이(어머니)'와 '아바이(아버지)'에서 뻗어 나온 사람이다. 그래서 '나=아'를 기준으로 최초의 뻗은 '어'는 '어무이, 아바이'이기에 '어버이'가 된다. 

'어'는 '아'에서 뻗어나가기에 방향성을 갖고 있다. '어디로'라는 말은 이를 반영한 한국말이다. '아'가 어떤 '어'로 연결되어야 할지 가늠할때 우리는 '어디로'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시간적 순서는 '아'가 먼저고 '어'가 따라나온다. 

요즘은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해 과거의 전통과 진리에 의지해서만은 살아가기 어렵다. 미래를 위한 혁신적인 해법이 요구된다. 사람들은 창의적 혁신을 하기 위해 '융복합'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융복합'이란 무슨 뜻일까? 이 말의 한자는 '融複合'으로 '녹일 융融'과 '겹칠 복複', '합할 합合'의 합성이다. 녹여서(融) 합치면(合)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진다. 아우러지게 되면 녹기 이전 낱낱의 속성들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아=낱'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융합은 '아우르다'는 의미다. 반면 겹치면(複)은 합쳐도(合) 낱낱의 속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가 '어'의 낱낱의 상태로서 서로 어울린다. 그래서 복합은 '어우르다'는 의미다. 즉 어울린다는 것은 '아'와 '어'들이 낱낱의 속성이 유지된 상태로 상호적으로 울림으로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서로 '말함=대화=울림'으로서 하나가 된다.  

잘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진 마음과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럼 '어질다'는 무슨 의미일까? 어질다의 짜임은 '어+지르다'이다. '지르다'는 '주먹을 지르다'처럼 의지를 갖고 어떤 특정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앞서 말했듯이 '어'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 방향성은 '아=나'쪽에서 출발해 '어=너'쪽으로 나아간다. 한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늘은 둥근 원, 땅은 네모 그리고 생명은 세모로 여겼다. 원과 달리 네모와 세모는 뾰족한 모서리를 갖고 있다. 그 모서리는 '모'가 '서' 있는 모습이다. 

모서리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는데 바깥쪽이 '모'이고, 안쪽이 '어'이다. 바깥쪽의 '모'의 방향으로 가면 '모질다'라고 말하고 반대 안쪽 '어'로 나아가는 것은 '어질다'이다. 모진 방향은 뾰족하다 이 방향은 아무것도 없이 홀로 무쏘의 뿔처럼 나아가는 것이다. 모진 방향은 오로지 나만 나아가기에 외롭고 힘들다. 때론 뾰족한 모서리에 누군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요즘은 무쏘의 뿔처럼 나아가기를 권장하는 사회라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래야만 한다면 어쩔 수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되도록 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 여러사람을 아울러 자기화 시키기 보다는 여러사람을 어울러 함께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모진 방향은 여러 사람을 아울러 내 권력 지향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반면 어진 방향은 여러 사람과 함께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어질다'로 푸는 한자가 많다. '덕德, 인仁, 선善, 양良, 현賢' 등은 모두 '어질~'라고 말한다. 요즘은 현명賢明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현명한 사람'이란 '똑똑하고 밝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현賢' 보다는 '명明'에 중심을 둔 다소 잘못된 풀이다. '현賢'에 중심을 두고 풀면 '어질고 밝은 사람'이거나 '어진 것에 밝은 사람'이 된다. 전자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후자는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맹자>에는 '현자재위賢者在位 능자임직能者任職'란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에게 지위를 주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직위를 맡겨야 한다'는 의미다. 지위는 사람을 통솔하는 리더이고, 직위는 그 일을 직접 하는 실무자이다. 즉 리더는 능력 있는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의미다. 가끔 능력 있는 사람(능자)이 일처리를 인정받아 팀의 리더가 되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팀원들을 모질게 질책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 팀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어 오히려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 그래서 팀장은 팀원들 각각의 능력을 잘 어우르고 하나의 팀으로 아우르는 어진 사람(현자)이 더 어울린다. 모진사람보다는 어진사람이 팀장이어야 팀원들이 믿고 따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되도록 현명한 어진사람이 팀장이 되는 것이 좋고, 능력 있는 모진사람이라도 팀장이 되면 스스로 현명해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한국말 '어질다'의 바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오늘 수업은 '계몽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어 '같음의 논리'를 거쳐 '어울리는 태도'으로 마무리 되었다. 가르침과 논리, 태도는 모두 말에서 비롯된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가르쳐 계몽하고, 한국말로 같음의 논리를 추구하며, 한국말로 어울린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사람들은 한국말의 바탕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계몽도, 논리도, 태도도 모두 어설프고 어색하고 흐릿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한국말 말차림과 바탕치기를 통해 한국말 속에 들어있는 계몽과 논리, 태도를 또렷하게 인식함으로서 더 많은 한국사람들이 계몽되고, 논리적이며, 잘 어울리는 한국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를 요약하면 '한국말로 스스로 생각하는 한국사람'이다. 이를 더 짧은 마디말로 줄이면 앞서 퇴계가 '경敬'을 풀었던 '고마(고마하는 사람)'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맙습니다'의 바탕이 바로 '고마'다. 

돌이켜보면 좋은 이야기 해주신 선생님께 고맙고, 긴 글을 열심히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한국말을 만들고 지켜온 한국사람들이 고맙다. 나아가 사람과 함께하는 생명들과 공기, 물, 숲 등 자연에 고마운 마음이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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