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_물 위를 건너다

어느 이른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셋

by 은륜



섬진강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너는지 세다가 잊어버렸다.


장군목인증센터를 지나 다음인증센터 향가유원지까지 30km를 달리고 있다.


구름이 인심 쓰듯 잠깐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이제 제법 달려왔다. 넓은 들판을 마주하니 수월해지려나 싶었는데 회색 구름이 빠르게 몰려왔다. 순창과 임실을 연결하는 가장 큰 다리인 유촌 대교 위에서 자전거를 밀어내는 강풍을 만났다.


눈보라 사이를 지루하게 달리다가 긴 사연이 있는 향가 목교를 건넌다.

일제강점기에 전쟁을 위한 쌀 수탈을 목적으로 철도를 놓기 시작했고 완성되기 전 해방을 맞았다. 강 위에 8개의 교각만 서 있던 시절이 오래였다. 섬진강자전거길을 만들면서 남아 있던 교각 위에 목재로 교량을 연결했다. 목교 중간에 유리로 만든 스카이워크전망대가 있다. 의암호를 끼고도는 춘천 자전거 길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라이더들이 바퀴를 멈추고 사진을 찍는 장소다. 얼어 있는 유리가 깨질까 감히 올라서지 못하고 다른 마을로 넘어간다.


행가리라 부르는 향기롭고 아름다운(香佳) 마을길을 간다.

강물이 산자락을 휘감고 돌아가는 곳에서 시인과 한량들이 놀았다. 2km의 넓은 백사장 위로 기이한 바위들과 늙은 나무들을 구경꾼으로 두고 강을 무대로 시 쓰고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눈구름 속을 피해 서둘러 둥지로 돌아가는 새소리만 들린다.

노래를 부를 수 없던 시절,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삼키며 돌을 날라 철도를 놓았고 폭발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으며 터널을 뚫었다.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과 함께 흘러 들어온 낯선 이는 향가터널 속으로 피했다. 눈바람이 세차게 들이쳐 터널 속으로 깊게 들어와서야 헬멧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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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살에 등을 내어주고 키운 쌀을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 내줘야 했던 섬진강 사람들은 이 터널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자전거 길의 명소가 되어 흘린 땀을 식혀주는 멋진 쉼터가 되었지만 피하고 싶었던 역사의 운명 앞에 무기력했던 삶의 눈물은 얼마나 오래 흘렀을까. 터널의 길이 384m.


터널에서 좀 쉬고 나오니 딴 세상이다.

눈바람 속을 헤치고 달려왔다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경치가 펼쳐져 있다. 눈이 살짝 덮인 지리산 자락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드러나 섬진강 물을 깊게 적신다. 강은 이제야 우리에게 곁을 내어 주는가. 남원과 곡성의 줄기를 따라가는 길은 다정하기 그지없고 강을 끼고도는 산은 호쾌하게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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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강이었구나."


넋을 놓고 강물을 바라보니 남편이 경고를 보낸다.


"갈 길이 멀어, 해지기 전에 곡성에 도착해야 해."


갈림길 앞에서 지도 찾고 우왕좌왕하다 상당히 지체되었으니 그의 맘이 타는 것도 당연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사진 찍으려고 바퀴는 자꾸 멈춰 서 버린다. 재촉하는 그도 곡성을 눈 앞에 두고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다해 허벅지를 태우는데 다시 잠수교를 만난다.


길이 얼었다.

해가 지면 강 가의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것을 모를 만큼 우리는 무지한 도시인이다.

자전거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다.


#16_어느 이른 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셋 끝
다음화 #17_어두운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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