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_계곡을 지나다

어느 이른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둘

by 은륜


두 산이 마주 선 계곡은 깊었다.


눈 발이 거세어졌다. 물우리와 천담리 사이 좁게 뻗은 길이 절반은 운무에 가려져 있다. 계곡 입구에 <섬진강자전거길>이라고 쓰인 이정표는 달려 가야 할 거리를 냉정하게 새겨 놓았다.


잠시 머뭇거렸다.

아주 오래전 설악산 주정골 계곡에서 만난 눈길을 떠올렸다. 맨 몸으로 산길을 걸었던 그 허벅지는 얼마나 젊었던가. 가리워져 아름다운 그 길에 두려움이 들어올 구석은 없었는데….



2월의 마지막 날, 자전거를 끌고 온 내 앞에 다시 길이 놓였다.

구름과 눈 속에 놓인 길은 이제 곧 순백으로 자취를 감추려 한다. 사진을 찍으려 고개를 드니 차갑고 습한 공기가 가슴까지 내려온다.


우리를 받아줄까?

감히 두 바퀴를 굴려 이 길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까? 늘 공평한 두 바퀴라 노래하며 달렸던 허벅지는 긴장했다. 사방이 고요하고 눈송이는 화려하게 흩어져 날아다녔다. 저만치 서있는 남편의 푸른색 점퍼가 불손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외쳤다.

"가자!"


의심의 온도는 차가워져 길을 얼어붙게 할 뿐이다. 머뭇거리지 않고 페달을 돌리려고 안장에 올라 타나 내딛는 첫 발은 조심스럽다. 마른 길을 달려 나갈 때의 혈기는 사라지고 산이 받아주기를 기도하며 눈 덮인 하얀 길을 저어 간다.


얼어붙은 휠이 차가운 회전을 천천히 시작하면 스포크 사이로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에 페달은 겸손해진다. 타이어는 하얀 눈에 둘러싸여 검은 피부를 감추고 여인의 발로 밟듯 뽀드득 소리를 낸다. 중심을 잡는 두 바퀴가 신비로운 무늬를 그리며 굴러가는 사이 계곡은 화선지 위의 한 획이 되었다.


눈보라는 우리의 공손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이 깊어질수록 내 다리를 때리고 허리를 밀어낸다. 시린 손에 겹쳐 낀 두 벌의 장갑 때문에 손은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중심을 잡고 버티면서도 언제든 브레이크 레버를 잡으려 어깨는 성이 났다.


달릴 수 없는 길 위에서 머리는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모든 나쁜 상황의 변수를 향해 달려간다. 바람맞은 종아리와 허벅지에 쌓인 눈에 하얗다. 차가워진 근육은 뜨거운 여름의 그것보다 강했다.



춥지 않았다.

발도 시리지 않았다.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 마스크를 계속 바꿔 껴야 했지만 그 사이에 짬을 내고 쉬어가며 장군목 까지 왔다. 서북쪽에는 용골산, 남쪽에는 무량산이 섬진강 물을 마주 보고 힘을 겨루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다. 오랜 세월 동안 거센 물살이 바위를 기세 좋게 만들었다. 유명한 사연이 있다는 요강바위는 구름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땅의 기운이 눈바람 속에서도 전혀 굽히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장군목 유원지 위 현수교를 지날 때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던 남편이 나를 향해 포즈를 취하라고 소리친다. 보이지 않던 적군을 무찌른 장수처럼 두 팔을 벌리며 소리친다.

"만세!"


계곡을 벗어나 얕은 강 위를 넘나들며 새로운 마을을 만난다. 화탄 잠수교를 지나 아름다운 소나무 언덕이 반겨주는 마을로 들어섰다. 순창에서 바로 들어오는 다리가 없어 1980년에 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170여 미터의 다리를 놓았다. 일 년 동안 담배농사를 지은 것을 헌납했다.


다리를 위해 놓은 다리를 지날 때 강물이 반짝거렸다.


#15_어느 이른 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둘
다음화 #16_물 위를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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