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방대하다. 라에르티오스가 정리한 146권의 목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플라톤 저작들이 잘 보관된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소홀히 보관된 나머지 전체의 약 25%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저작은 거의 모두 학문적 성격을 띠며 산문체로 써졌다. 양적으로 책 한 권을 300쪽 정도로 쳐서 약 45권의 분량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아카데미아와 뤼케이온 학당은 학생들을 위한 강의와 연구 외에 대중을 위한 일반 강연도 빈번하게 열렸다. 그러므로 일반을 위한 강연록과 같은 저작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아쉽게도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술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소실된 많은 저작이 대화체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대부분 저작이 대화체로 쓰여 있으니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대화체 형식의 저작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모방하여 책을 내는 일은 서양철학사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 오컴, 갈릴레이, 라이프니츠, 흄 등이 대화체를 사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체 저술은 ‘대화가 황금같이 흐른다'고 칭찬한 키케로의 언급으로 봐서 최소한 로마 제정 전기 시대에는 존재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저작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로마에서 페리파토스학파의 수장격이었던 안드로니코스가 만든 필사본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당에서 강의했던 내용은 당시에 출판된 적이 없었다. 대부분 제자에 의해 편집된 강의록들이 뤼케이온 2대 교장인 테오프라스토스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아테네의 서적수집가에 의해 팔려져 그의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그리스 등 소아시아는 기원전 1세기 초에 로마공화정의 장군인 술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한다. 이때 술라는 당시 아테네에 있던 장서를 모두 로마로 가져오게 하였다 한다. 안드로니코스가 필사본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술라의 약탈 덕분이었지만 인류에게는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필사본은 여럿 만들어져 로마제국의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헬레니즘 시대에 필사본이 이미 만들어져 보관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프톨레미 왕조가 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가 있다. 블에 타 소실될 떄까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 표현은 넓은 의미로 문학에 가까웠다. 파르메니데스나 엠페도클레스는 운문(시)의 형태로 사상을 표현한 반면,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및 헤라클레이토스는 짧은 단문인 아포리즘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논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플라톤은 대화 형식을 빌려 사유를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산문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남겼는데 산문체는 가장 진보된 형식의 글쓰기이다.
그가 남긴 저작물 중에 압도적으로 많고 눈에 띄는 것들이 바로 자연과학에 관한 저술이다.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한 최초의 인물이자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관찰과 이론 사이의 관계를 정립한 최초의 과학자임을 증명해 준다. 그의 논증을 위한 논리학은 명실공히 논리의 모든 부분을 담은 결정체로서 과학적 방법론의 확증을 위한 논증 또한 포함한다. 그의 관심은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 등 인간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학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학문체계를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세분화하여 물리학, 동물학, 윤리학, 정치학, 시학, 논리학 등 학문의 명칭을 붙였다. 오늘날 쓰이는 학문 이름들이 모두 그에게서 유래되었다. 또한 학문이 무엇을 얘기하는가에 따라 기초(이론) 학문, 실천 학문 및 예비 학문 등으로 나누었다. 이론 학문은 자연과학 및 형이상학으로, 실천 학문을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그리고 이들 학문의 수학을 위한 예비 학문으로 논리학이 있다. 그 외 기타 시학이나 수사학까지 학문 세계를 조직화하였다. 저작들은 경험에 기인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고 경험이 닿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합리적인 연역 체계를 이루고 있어 조화를 이룬다. 철저히 경험에 입각한 구체적인 체계를 세워가면서도 학문은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연역의 바탕에 있어야 함을 잊지 않았다. 오늘날 서구 문명을 지배하는 참과 거짓을 따지는 연역적 사고는 그의 논리학에 준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과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공헌뿐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탐구에 대한 방법론을 정립하였다. 그가 생각한 과학적 탐구는 관찰로부터 일반 원리를 발견하고 일반 원리를 기초로 더 근본적인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관찰로 일반 원리를 끌어내는 귀납의 과정과 일반 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더 근본적인 원리를 도출하는 연역의 과정을 모두 중요시하였다. 귀납에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단순 열거로 개별적 사건 또는 종에 관한 언명으로부터 개체가 속하는 종 또는 류에 대한 일반 원리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직관적인 귀납으로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자료 중에서 근본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과학자의 통찰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후자가 오늘날 과학자가 과학 하는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학문을 그저 나열하여 저술한 것이 아니고 모든 학문을 통일의 관점에서 체계화시킨 것이다. 그의 수정된 이데아 개념은 자연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우리가 감각으로 알고 있는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그러므로 수정된 이데아 개념에서 얻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운동 또는 변화이다. 저작 전체에 운동 또는 변화가 체계적으로 다루어졌다. 저작을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무생물과 생물의 운동과 변화를 다루는 자연학, 생물 일반을 다루는 영혼론과 동물 일반에 관한 동물 운동론, 인간의 운동 또는 변화를 다루는 윤리학과 정치학, 마지막으로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동력을 주는 신(부동의 원동자)이 다루어지는 형이상학으로 무생물에서 신까지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변화에는 그것에 합당한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모두가 목적에 부합하는 질서 속에 있고 규칙적인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사물들이 고유한 근거가 그것들의 궁극 원인, 즉 그것들의 목적 규정에 있다고 보았다. 자연의 목적론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이미 나온 바 있다. 목적론적 자연의 준거로 그는 모든 학문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을 목적론적 법칙 하에 통일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모든 학문을 하나의 법칙 하에 통합한 인류 최초의 통일 이론을 구축한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