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적 형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변화 자체에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를 둔다. 그러므로 변화를 설명하려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데아는 다른 세계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 안에 항상 존재하여 변화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실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동적인 관점은 정적인 관점에 선 플라톤과 대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 또는 운동하므로, 우리가 세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확고한 진리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의 세계는 이데아라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이상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나 그림자가 아니다. 이데아는 사물 안에 존재하므로 감각의 세계는 참된 실재이다. 끊임없는 변화의 기저에는 변화를 설명하게 하는 기본적인 원리나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이성적 추론에 덧붙여 감각을 이용하여 연구할 수 있다.
내재적 이데아로서 우리는 사물은 어떤 질료에 그것을 특징짓는 형상(이데아)적 성질이 넣어지거나 갖추어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나무 의자의 질료는 나무일 것이고 의자의 생김새는 형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종류의 의자를 어떻게 다른 사물과 구분할 수 있을까? 개개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대상을 특징짓는 어떤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이 속하는 종류를 알아내어 내적 구조를 분석하여야 한다. 즉 귀납적 분석으로 이 대상들 가운데 이들을 공통으로 특징짓는 어떤 것들을 밝혀내야 한다. 이것이 밝혀지면 우리는 어떤 특정의 대상 자체의 본질을 알게 되어 이들 대상을 다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있다. 즉, 의자는 의자의 형상이 존재하므로 의자의 다리가 달라도 재질이 달라도 색이 달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의자로 판단한다.
이렇게 구별이 가능하여 사물을 알 수 있지만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은 변한다. 변화는 이미 헤라클레이토스 등에 의해서 두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립자는 뜨거움과 차가움 또는 밝음과 어둠 등 양극적 대립이 대표적 예이다. 그러므로 변화란 ‘차가운 것이 뜨겁게 되었다’ 라거나 ‘아침이 밤이 되었다.’처럼 양극이 바뀌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변화는 대립하는 성질이 서로 바뀌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차가움이 뜨거움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차가웠던 어떤 것이 뜨거워진 것이다. 실체가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고 대립하는 것들은 하나의 속성일 뿐으로 사물과 구별되어야 한다. 플라톤에게는 사물의 형상이 사물과는 따로 존재하고 있으나 동시에 형상이 특정의 사물 안으로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스며들어 사물이 정체성을 가졌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항상 사물 안에 존재하게 함으로 신비함이라는 비 철학적 요소를 없애버렸다. 사물을 이루는 질료(재료)는 내재되어 있는 형상과 결합하여 개별 사물이 되므로 형상은 개별 사물의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