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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Jun 03. 2022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에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칼키디케 반도의 동쪽 해안에 있는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이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뮌타스 2세(알렉산더의 할아버지)의 주치의였다.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버지가 자연, 특히 생물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추론 하나만으로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과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는 논리는 약간 빈약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자연에 대해 무언가를 배웠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록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어 후견인 밑에서 성장했을지라도 어린 시절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생물에 관한 많은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연과학 전반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와 동물에 관한 독보적인 성취의 연원을 찾을 데가 빈약하다.


17세가 되던 해에 플라톤이 세운 학당인 아카데미아의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아테네로 이주하였다. 이때는 이미 아테네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소크라테스 시절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져서 플라톤이 청년 시절에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도 병사로서 두번이나 참전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패배 후 북쪽의 마케도니아 세력은 힘을 키워 남진 중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서거할 때까지 학당에 20년간을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플라톤의 가르침에 다양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논쟁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플라톤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섭렵이라 할 만큼 습득의 속도는 빨랐다. 그의 저작의 많은 부분이 그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핵심 사상인 이데아를 믿지 않았다. 이데아를 부정한 주된 이유는 자연과학에 있다. 자연적 관찰을 통한 사실의 구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이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이데아 이론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자연의 진리를 추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컸지만, 자신이 확신했던 진리보다는 소중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서거 후 아테네를 떠난다. 아카데미아 학당은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책임지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당을 이어받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이 때문에 아테네를 떠났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스페우시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20세 정도 많고 아테네 시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카데미아와의 학풍과 맞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상과 대척 관계에 있었고 스페우시포스는 아카데미아가 지향하는 플라톤의 사상의 계승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재적 형상의 개념을 이미 이 당시에 사유하고 있었던 듯싶다. 더 나아가 외지인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학당의 재산 관리 같은 업무를 볼 수 없는 것 또한 실질적 문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에 일고 있었던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커다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테네는 결국 마케도니아의 통치 하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이유로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아소스로 향했다. 이때부터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기원전 335년까지의 약 13년 동안의 주 연구는 생물학이었다. 특히 레스보스섬에서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공동 연구가 이루어졌다. 경험적 탐구 방법을 통한 생물학적 관찰은 놀라울 만큼 정확한 과학적 토대 위에 수행되었다. 이들은 그의 저작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성취의 논리적 정당화는 매우 중요했을 것이었다. 훗날 진리 탐구의 결정적 논증 체계인 오르가논의 집대성 계획은 이때 세워졌을 것이다.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 왕인 필립포스의 초청을 받아들여 알렉산더의 가정교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펠라에 머물게 된다. 2,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의 만남이었을지라도 스승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알렉산더로부터 커다란 지원을 받게 된다. 


그리스 지도로 보여준 아리스토텔레스 간략 연표

38세가 되던 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로 다시 돌아갔다. 이때는 정치적으로 알렉산더가 아시아 원정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안정적 통치하에 있었다. 아폴론 신전 경내의 뤼케이온에 학당을 설립될 만큼 정권의 도움은 지대하였다. 뤼케이온 학당은 나중에 페리파토스(소요) 학파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소요학파는 학당 내를 걸어 다니면서 철학을 논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한 연구 활동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저작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저작은 오늘날의 사회과학, 인문학 및 자연과학 모든 분야를 망라했고 특히 생물학, 천문학, 우주론, 물리학, 심리학 등의 자연과학 저작들이 두드러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조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아테네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주요 인물이 되었다. 당시 뤼케이온은 모든 분야의 책들을 담은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고 방대한 지도 보관실 또한 갖추어져 있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집한 온갖 동물로 구성된 동물원이 있었다. 개중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지에서 구한 귀한 동물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뤼케이온이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번성했지만,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돌연 사망하자 위기를 맞게 된다. 올림포스 남쪽 지역의 자존심 강한 그리스인들은 북쪽의 마케도니아 지방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알렉산더 치하의 아테네는 해방을 항상 희망하고 있었다. 정치적 권리가 아예 없는 외지인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었고 아테네 인들은 내심으로 시기하였던 차였다. 아테네는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중심지가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와 가진 연고는 그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인들에게 소크라테스와 같은 죄목인 불경죄로 고발을 당했다. 죄의 내용은 소아시아로 갔을 때 그를 보살펴준 앗소스의 참주인 헤르메이아스를 그리스 영웅들에 비교하여 찬양한 것이 불경죄로 찍혔다. 아테네 인들은 예전에도 같은 죄목으로 아낙사고라스를 귀양 보냈고,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워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다. 위기를 느낀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성모독 혐의로 소송이 진행될 즈음에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테네가 더는 철학에 대해 죄를 지을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도주하였다고 회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게해의 한 섬에서 머물다가 1년 뒤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63세였고 기원전 322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는 너무 간략할 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다. 역사적 아리스토텔레스가 간략한 것은 줄인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개인적인 것은 거의 없으나 기원후 3세기의 라에르티오스가 저술한 철학자들의 전기에 비록 간략하나마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지 얘기하고 있다. 어눌한 말, 작은 눈과 짧게 깎은 수염, 유난히 가는 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손에 반지를 끼는 등 치장을 잘하고 옷을 잘 입고 다녔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도 잘 차려입는 그의 습관으로 인해 사람들 눈에 잘 띄었을 듯싶다. 그는 남들과 대화할 때 조롱이 섞인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기록으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딱딱하기 그지없고 근엄한 꼰대 같은 학자 정도로 여겨질 법도 하겠다. 하지만 라에르티오스의 책에 함께 남아있는 그의 유언장의 내용을 보면 정반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유언은 재산을 비교적 공평히 친족을 비롯하여 자신과 연을 맺었던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며 누구누구를 잘 돌봐주라는 얘기도 잊지 않는다. 섬세하고 따듯한 인간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게 한다.


그런데 그가 대화 가운데 남을 조롱하는 말을 잘했다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단순히 남을 잘 비웃는 인간성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쯤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새로운 지식 추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 본성에 못 미친다는 뜻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기반으로 적당한 재산, 생김새 등 조건을 넣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 그것을 위한 기반이 있어야 하고 추구에는 새로운 것을 계속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러한 요구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조롱 섞인 말을 뱉었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 본성에 벗어난 사람들은 꾸짖음의 대상이었을 수가 있다.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새로운 지식을 쌓는데 평생을 쏟았다. 스승인 플라톤을 존경하였을지라도 진리보다는 덜 사랑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적어도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스승 플라톤의 사상은 새로운 지식을 방해하는 장애물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가 자연과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세상에 남긴 저작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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