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은 '또 다른 나'일 확률이 높다

by 김단한

여태 피해 다니고 두려워했던 존재가 결국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패턴을 꿰뚫고 있는 '나'에게는 앞선 글에서 언급한 은둔 스킬이나 도망가기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적인 '나'는 내가 도망가기도 전에 미리 숨을 곳에 가 있거나, 숨어있는 바로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아 있기도 하다.


나의 진정한 적이 '또 다른 나'일 것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는데. 사실, 그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독한 우울의 감정을 겪은 4-5월 정도였다. 날리는 꽃가루처럼 마음이 방방 들떴는데, 기분 좋음의 들뜸이 아니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들뜸. 아침부터 오후까지 일할 땐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일이 끝나고 나면 방황을 했다. 남들은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오고 싶어 한다던데, 나는 퇴근하고 난 이후 바로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굉장히 힘들었다. 나가도 딱히 할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그저 나가려고 애썼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우울증의 초기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최대한 밖을 나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밖을 나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돌아다니면 나에게도 좋겠지만, 나는 그러려고 밖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친구들을 불러내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은 허함에 속을 끓어댔으니까. 결국 술을 마시게 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고, 다음날 힘들어하다가 다시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반복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나가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을 관장하는 '나'라는 존재가 당시엔 너무나 싫고 미웠다.


나는 '기본 캐릭터'밖에 안되어서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망가는 것과 눈에 보이는 무엇을 집어던지는 것밖에 없는데, 나의 적인 '나'는 갑옷을 입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나 보자, 하는 눈으로. 결국 나는 호소하기에 이른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너는 나고, 나는 너 아니야? 왜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내가 힘들어야 네가 행복한 거야?" 돌아오는 외침은 없다. '나'는 똑같이 울상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때서야 나는 '나'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것이 '나'라면 들지 않게 만드는 것도 '나'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얼마든지 나는 나를 이길 수 있고, 재울 수 있고, 토닥여줄 수 있고, 맛있는 것을 먹일 수 있고, 달래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나'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고, 지는 노을을 보고, 굽은 어깨를 펴주기 위해 필라테스를 다녔다. 술은 아주 조금만 마시고, 그것마저도 줄이면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시작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나'를 달랬다.


아주 크고 거대하게만 보였던 '나'라는 존재가 점점 작아져 나와 키가 똑같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일 무서워하고 피했던 존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니. 이제는 나를 달래는 방법을 안다. 은둔 스킬을 쓰거나, 굳이 도망가지 않아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을 줄기차게 걷어차는 '나'를 달래는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조금 더 쉬워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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