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도망가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by 김단한

잘 도망가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고로, 나는 잘 도망감으로써 불필요한 싸움을 피한다. 이것은 게임상에서도 그렇고, 현실 세계에서도 내가 적절히 살아남는 방법이다.


게임에서 '기본 캐릭터'는 ctrl 키를 누르면 몸을 숙이거나 쪼그려 앉는다. 이것을 은둔 스킬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발소리 없이 조용히 걸어야 하거나 미션을 수행해야 할 때 적에게 들키지 않으려 사용하곤 한다. 이 은둔 스킬을 쓰면 상대방은 내가 뒤로 바짝 다가갈 때까지 나의 존재를 모른다. 나는 이 은둔 스킬이 꽤 마음에 들었고, 굳이 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줄곧 사용하곤 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있는데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어렸을 땐 내가 초능력자인 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스킬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굳게 믿고 있었던 건 '순간이동' 능력이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데, 내가 주문을 알지 못해서 혹은 내가 아직 아이라서 그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귀가 나올 정도로 몸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흡!), 알라빵랄까!(어디서 주워들은 말!) 같은 희한한 주문을 한번 얻어걸려볼 심산으로 외쳐본 적도 많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순간이동 스킬을 가진 자가 아니었고, 터벅터벅 나의 일상을 걸어 다니는 중이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편이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기본 캐릭터' 성향은 어딜 가질 않아서 나는 기껏해야 싸움이 붙더라도 맨몸으로 모든 것을 부딪혀야 한다. 적을 마주한 순간, 손에 든 무기가 아무것도 없을 땐 순간이동의 스킬이 절실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특출 난 스킬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그저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지긋이 나의 몸에 있는 어떤 컨트롤 버튼을 눌러 숨기 바쁘다.


그 어떤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레벨이 낮은 나만 탓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왜 그저 때리면 맞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도망가는 것조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우물쭈물하며 모든 기회를 놓쳤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매번 쪼그려 앉아 '은둔'을 일삼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도망가는 것도 스킬이다, 라는. 도망을 가야 할 때는 잘 도망가고, 그렇게 배운 감정을 일삼아 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어떤 상황이든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을 일삼아 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기본 캐릭터'여서 할 수 있는 맨몸 부딪히기. 일단 해보는 것, 그냥 해보는 것, 어떻게든 해보는 것.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가만히 생각하고 갈고닦는 것. 그렇게 나를 컨트롤해보는 것.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점점 '기본기'를 다져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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