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to do list 가장 마지막엔 항상 '내일 해야 하는 일 적기'가 있다. 내일의 내가 할 일을 오늘의 내가 정하는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무척이나 무책임한 행동인 듯하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써놓은 to do list를 보고 깊게 한숨을 쉰다. 이걸 어떻게 하루 만에 다 하란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치, 오늘의 나에게 어제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잔뜩 안겨주는 상사 같달까.
적어놓은 일을 모두 다 해내지 못하면 심히 자책하는 구간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일을 모두 해내려 노력한다. 당연히 다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뭔가 상황에 변수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굳게 믿고 또 꾸역꾸역 할 일을 써 내려간다. 거기엔 물 한잔 먹기와 같은 소소한 것은 쓰여있지 않다. 모두 굵직한 일뿐이니,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미워할 수밖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 갑자기 약속이 생길 수도 있고, 날씨가 따라주지 않아 밖에 나가지 못할 때도 있다. 이러한 변수는 우리 인생에 수없이 불쑥불쑥 나타나게 마련인데, 나는 그런 변수 따위는 나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는 듯, 할 일을 빼곡하게 적어놓기 바쁘다. 열 개 중에 아홉 개만 해도 잘한 것인데, 나는 하나 못한 것에 집착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면, 다음날엔 좀 느슨하게 할 일을 적을 만도 한데, (일을 끝마치지 못한) 오늘의 나는 오기가 생겨 내일의 나에게 일을 잔뜩 미루고 만다. 반복에 반복을 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는 주말이 되면 완전히 지쳐버린다.
밤만 되면 왜 다음날의 나를 굳게 믿으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할 수 있다는 욕구가 들끓는 것인가. 그 전의 글에도 썼지만, 밤을 주관하는 '나'는 정말이지 지독하다. 다음날엔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무언가의 능력이라도 얻는다는 듯이 그렇게 쭉쭉 열 가지, 아니 열 한 가지의 일을 써 내려간다. 쓰는 것도 나, 하지 못해서 자책하는 것도 나다. 이 정도 깨달았으면 나의 능력치를 알 법한데, 참 고맙게도(?) 나는 꾸준히 해야 할 일을 만들고 또 만든다.
사실, to do list에 적힌 일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밑줄을 쫙쫙 긋는 행위는 꽤 짜릿하다. 그 기분을 느끼려고 해야 할 일을 작성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일을 해나가면서 나에게 해가 될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일을 잘 해내면 득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쉴 틈을 전혀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to do list를 쓰는 방식을 조금 바꿨다. 이것이 나의 자책을 조금씩 덜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하나씩 밑줄을 그어나가는 재미를 두 배로 느낀다는 것에 있어서는 만족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일을 아주 세세하게 적는 것이 나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굵직한 일 하나를 적어두고, 아주 세세한 일을 적는 편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비타민이나 박카스 한 병을 챙겨 먹는 것 또한 할 일에 적어둔다. 이쯤 되면, 너무 세세하게 적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다. 그렇지만, 써보면 또 다르다. 일단, 처음부터 세세하게 적으면 그 일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몸에 익게 되었을 때는 쓰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에 쓰인 글씨를 보고 이걸 또 해야 해?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레 물을 한 잔 먹거나 비타민을 챙겨 먹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때부턴 종이에 굳이 쓰지 않아도 나는 할 일을 알아서 잘 찾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너무 세세하게 적으면 마치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하루의 일과를 파악하고 눈으로 들여다봐야 안심하는 편이기 때문에 오늘도 to do list를 쓴다. 가끔, 살짝씩 반항심의 마음이 들 땐 아예 쓰지 않는 날도 있다. 이럴 땐, 전혀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하루 정도는 내가 잘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하니까. 아주 세세하게 쓰거나, 아예 쓰지 않거나. 나는 요즘 나와의 밀당 중이다.
아니, 하루 루틴 정도는 망가져도 괜찮잖아? 소심하게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