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정은 다단계로 몰락했다

by 김단한

정말 오랜만에 중학교 때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신설이었기에, 선배 없이 거의 '우리들만의 세상'이었다. 어딜 가나 풍기는 새 건물의 냄새는 교복을 갖춰 입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우리는 넓은 학교를 누비며, '제1회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우정을 쌓아나갔었다.


내가 속했던 1학년 6반은 특히나 남녀사이가 허물없는 반이었다. 남녀가 섞여 쉬는 시간에 말뚝박기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섞여 앉아 밥을 먹었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남자아이들이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렸을 때, 여자 아이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들이 무사히(?) 다시 우리의 궤도로 돌아오길 바라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아이들은 금세 다시 우정의 길목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매일 등교와 하교를 함께 하며 더욱 그 길을 다졌더랬다.


1학년 때의 기억이 너무나 커서인지, 우리는 각각 반이 흩어진 2학년, 3학년이 되어서도 복도에서 마주치는 서로의 얼굴을 그렇게나 반가워했다. 다른 반 아이들은 은근히 1학년 6반이었던 아이들을 부러워했고, 자기들도 그와 비슷한(?) 우정을 만들려 했지만 빈번히 실패했다. 그럴수록, 1학년 6반이라는 자부심은 더욱 커져만 갔기에…… 그랬기에 나는 오랜만에 온 그 아이의 연락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잘 지내냐는 문자는 나를 설레게 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대충 건너 건너 들은 사람이 보내온 연락이 아니어서 더 그랬던 듯하다. 그는 정말이지, 갑자기 나타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십몇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다. 나도 건너 건너 대충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에 더 설렜다. 이렇게나 반갑다니, 이렇게나! 그렇게 나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 것이 이 비극의 시작인 거다.


커피 한 잔을 마시자는 말이 참 생소하면서도 재밌게 느껴졌다. 하교할 때 매번 컵에 든 떡볶이나 월드콘을 사 먹으며 걸어갔던 우리가 커피 한 잔이라니. 성인이 된 건 오래된 일이지만, 왠지 이제 막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좋았다. 다시 중학교 1학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사실, 은근히 좋아하던 마음을 품었던 아이였기에 더 신이 났다. 지금 와서 뭘 어쩌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십몇 년의 그 텀이 나를 설레게 했다. 지금 보면 어떨까. 지금 그 애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좀 컸다고 느낄까? 아니면 그대로라고 느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뜸 지갑을 잃어버렸댔다. 초행길이라 정신없이 버스를 갈아타다가 그랬다며 울상을 짓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마음이 아파 벌떡 일어났다. 계획도 없으면서 지갑을 찾으러 가자는 나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어차피 든 것도 없었다 말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다시 앉힌 그는 그냥 커피 한 잔을 사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미안하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말에 나는 사르르 녹았던가. 커피 백 잔도 더 사줄 수(그럴 돈은 없지만)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그대로였다. 약간 잘생긴 편에 속하는 얼굴도 그대로였고, 조금 어벙벙하게 말하는 말투도, 잘 웃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역시 잘생긴 애들은 계속 잘생기네, 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커피를 먹고 종일 수다를 떨다 보니 해가 졌다. 이대로 안녕을 고하려 했더니, 그가 대뜸 술 한잔을 하잖다. 술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깜짝 놀랐는데, 아 맞다, 우리 성인이지… 싶은 생각이 들어 수락했다. 맥주 한 잔 정도야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그의 다음 단계인지도 모르고.


맥주를 먹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끊고는 내게,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여기 동네에 사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며 함께 술자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자리 좋아하는 나로서는 흔쾌히 수락을 했다. 술집에 들어선 두 여자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쩜 이렇게 자리가 생기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때, 뭔가 묘함을 느꼈던 것 같다. 이 두 여자와 내 옆에 앉은 이 남자애가 별로 그렇게 친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그건 설명하기 아주 까다로운데,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14살부터 학습된 '여자와 남자가 친할 때 진짜로 하는 행동'에 속하지 않는 행동을 이들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친하다면서, 말할 때 가끔씩 존댓말이 튀어나온다던가,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던가 하는…….어느 정도 술을 먹다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을 가기만 하면 따라오는 여자 둘이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술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설마 다단계는 아니지? 이 말이 어떻게 나왔더라.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는 마음과 이 남자애가 정말 어릴 적의 나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나를 찾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뭐 그런 마음들이 섞여서 울컥했나. 아무튼, 나는 술을 먹다 말고 그에게 물었고, 그는 말이 없었고, 앞에 두 여자는 당황했고, 나는 웃었다.


나 진짜 돈이 없어서 그래. 널 도와주질 못해. 네가 나를 잘 몰라서 연락한 모양인데, 진짜 나 돈 없어. 그러니까 다단계면 지금 말해, 괜히 서로 힘 빼지 말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두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말했다. 진짜 돈 없어?


아. 나의 우정이여. 나는 그를 바라봤다. 중학교 1학년, 14살, 어색한 교복을 입고 그보다 더 어색하게 웃던 남자애는 없었다. 눈에 있는 힘없는 힘 다 끌어모아 정말 얘가 돈이 있는지 없는지 보려는 남자만 있을 뿐. 다단계 같은 것에 빠지면 제일 먼저 우정을 잃는다더니, 정말이네. 나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를 보며 물었다. 너 지갑 잃어버린 것도 구라니?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일어났다. 술값은 너네가 내, 짜식들아.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고, 발목을 잡고 질질 늘어지는 어떤 우정 때문에 좀 속상했다.


어느 한동안은 정말 오랜만에 연락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딱 그런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웃긴 건, 내가 글을 쓴다고 공공연히 알리고 난 다음부터는 연락이 없다. 설마 다단계 하는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났나. 글로 얼마나 돈을 벌겠어, 걔는 놔둬.라는 불쌍한 동정심을 받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땡큐다. 알 수 없는 피라미드에 갇혀 다이아니 뭐니 나에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친구의 눈을 보는 것보단, 아예 그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얘들아, 나 돈 없다. 연락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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