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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한 Apr 28. 2024

스스로를 잊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짧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의사가 강의 중에 들려준 이야기였는데, 내용은 이렇다. 대장암 말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성 환자가 있었단다. 어느 날, 그 여성 환자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남편에게 하나도 안 미안해요. 나는 내가 해줄 걸 다 해줬거든. 그리고 우리 아들들한테도 안 미안해요, 식당 일하고 평생 일하면서 뒷바라지 다 하고 대학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거든. 그래서 누구한테 제일 미안하냐 하면, 나한테 미안해요. 그러느라 어디 여행도 못 가보고 아무것도 못했거든. 이제 죽는 것밖에 안 남았거든, 그래서 나 자신한테 너무 미안해요'


나 자신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듣고 꽤 놀랐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적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시선은 늘 밖을 향했다. 늘 다른 곳을 떠돌았다. 남을 더 먼저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느라 나를 놓친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후회가 생기고, 미련함이 밀려오고, 자존감을 잃고, 열등감만 굳히게 되었다.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나 자신을 놓쳤을 때가 훨씬 많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청년에게 어느 나이 든 남자가 말한다. '내가 당신의 나이였을 때 조금 더 나를 데리고 멀리 다니면서, 이것저것 경험할 수 있었다면, 삶의 가치관이 달라짐은 물론이고, 지금의 삶도 정말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고. 


이 두 가지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지 못해 후회된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했다. 사실, 글을 쓰는 것이 좋아서 쓰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의무감처럼 느끼지는 않았는지. 다른 친구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를 낮춰버리지는 않았는지. 그것 때문에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후회가 되었다. 정말이지, 내가 나를 생각하고, 나를 가꾸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달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다. 평생 붙들고 살고, 같이 가야 하는 존재로 생각을 하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그 주인공일 텐데, 나는 그것을 간과하고 자꾸만 나를 감정의 벼랑 끝으로 몰았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는 꽤 시간을 들여서 나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현재 나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병행하는 중인데, 그 균형도 잘 잡으면서 나의 속을 조금 더 옹골차게 채워볼 예정이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잠에서 깨어난 다음부터 모든 순간은 보너스'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나와 잘 타협해 줄 수 있는 완벽한 파트너도 '나'일 것이고,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나'일 것이기에. 나는 다른 누구를 알려고 하는 노력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잠시 나에게 집중해 보기로 한다.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면,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지지 않을까. 내 속에 숨어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생각과 감정을 똘똘 뭉쳐 하나씩 꺼내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갑자기 그날이 떠오른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반장선거 날이었다. 누군가 나를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곤, 반 안에서 똘똘 뭉쳐 노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돌아가며 서로를 후보로 세웠다. 칠판에 적힌 이름은 총 여섯. 그들의 이름 사이에 끼어있는 내 이름이 문득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반의 분위기를 거의 사로잡고 있던 다섯 명의 아이들은 아이들의 표를 많이 받았다. 서로 돌아가면서 이름을 써주었기 때문에 한 표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테다. 나는 나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0표를 받았다. 내 이름 옆에 바를 정(正) 자의 한 획도 쓰이지 않았음을 느꼈을 때 나는 좌절했다.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했음이, 심지어 나를 후보로 올려준 아이도 나를 선택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내 이름을 자신 있게 적었더라면 또 어땠을까, 하는. 맥락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를 굳게 믿고 나를 보호하였다면, 내 이름 옆이 텅텅 비는 일 자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바를 정(正) 자의 한 획 정도는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든든한 나의 편이 되고 싶다. 그런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름들을 바라볼 수 있겠지. 조급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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