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서랍 속 깊숙이 넣어둔

by 달숲

작업실로 가져갈 책 보따리를 싸면서 집안 곳곳의 책장에서 내 책들을 꺼내다가 책장 아래쪽 수납장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다양한 종류의 천들과 자수실, 내가 만든 자수보자기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꺼내어 놓고 보니 지나온 세월만큼 그 양도 엄청나다. 언제부터 이렇게 보관만 해두었던 걸까. 벌써 그 시간이 팔 년이 다 되어 간다. 십 년도 더 되게 비닐에 꽁꽁 쌓여 있는 패키지들도 있다. 공방에서 집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두 번의 이사를 더 다니면서도 소중하게 여기며 이고 지고 다녔던 재료들이다. 수틀에 매어둔 채 완성을 기다리는 미완성 자수 작품들도 많았다. 작업실에 가지고 갈, 앞으로의 나를 채울 목록 속에 그것들을 넣을 것인지 이제라도 정리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그림에 소질이 있지도 않았고, 미술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었다. 그저 손으로 무언가를 조몰락거리고 있을 때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즐거웠다. 집에 학생 대백과사전이 몇 권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거기에 나오는 만들기 예시를 좋아했다. 예를 들어 ‘탈’이라는 항목이라고 한다면, 탈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학습 정보를 나열한 후, 탈 만들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일종의 체험이나 실습 항목인 셈인데, 이 만들기 코너만을 골라 보며 집에서 혼자 따라 해보는 걸 좋아했다. 신문지를 물에 적시고 밀가루풀과 섞어 풍선에 붙이던 어린 나. 해가 질 무렵이면 쓸쓸하고 외로워서 어쩔 줄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기억을 한 겹 더 들춰보니 그 시절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집에 일찍 들어온 날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엎드려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기쁨, 풍선에 붙여둔 신문지 반죽이 꾸덕하게 잘 말랐나 며칠에 걸쳐 확인하다가 드디어 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 하던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며 몰입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면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몽롱하던 그 느낌. 그때 나는 2층 주택에 살고 있었고 현관 밖으로 나가 바깥 풍경 내다보는 걸 좋아했다. 현관 밖을 내다보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집 앞부터 수킬로 먼 거리까지 시야 가득 거대한 논(부천의 중동, 상동 신도시가 들어오기 전)이 펼쳐져 있었다. 온통 초록이거나 노란빛으로 혹은 석양의 붉은 빛깔로 출렁이며 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던 자연까지. 내 유년을 채우던 행복의 조각들이다.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 탐구생활 숙제나 시화집 만들기 숙제 등을 받아오면 그걸 그렇게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나에게 만들고 놀아보라고 판을 깔아주는 듯해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무언가를 만드는 미술시간이 즐거웠는데 미술을 제대로 배우거나 진로로 삼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 건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저 숙제가 주어지면 그걸 즐겁게 하는 어린이였을 뿐. 그렇게 대학을 들어간 후에도 스스로에게 만들기 숙제를 내주듯이 무언가를 배우러 다녔다. 대학 때는 전공자도 아니면서 유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멋대로 그림을 그리고, 출판사에 들어가 책 만드는 편집자로 일할 때에는 퇴근 후 예술제본을 배우러 공방에 다녔다. 도서관에서 일할 때에는 퇴근 후 국비학원에 등록해 규방공예 바느질을 배우러 다녔다. 나에게 제대로 된 만들기 숙제를 내주게 된 건, 엄마와 오랜 시간 떨어지는 걸 힘들어하던 첫째 아이를 위해 도서관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다.


아이를 위해 직장생활은 포기해야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들기는 실컷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일하면서 국비과정으로 배웠던 규방공예를 더 심도 깊게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 자수보자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자수장 김현희 선생님께 배우고 싶어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 등록을 했다. 내가 나에게 본격적으로 만들기 숙제를 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통자수와 자수보자기를 5년 동안 배우며 전문가 과정을 마쳤고, 전통자수를 배우는 동안 수업료도 벌 겸 도서관과 집에서 야생화를 수놓는 실용자수 수업을 열었는데 수강생이 늘면서 동네에 작은 공방을 열기도 했었다. 공방에는 아이가 왔을 때에도 편히 쉴 수 있게 평상을 마련해 두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공방 수업을 하거나 작품을 만들고 아이가 돌아온 후에는 함께 도서관을 다니고 책을 읽으며 보냈던 평온한 날들이었다. 혼자만 즐기던 만들기를 업으로까지 삼고 푹 빠져 지냈던 내 인생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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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지금은 그 꿈도 다시 접어 서랍 속에 곱게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공방을 운영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그렇게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아 포기했던 둘째 아이가 첫째를 낳은 지 십 년 만에 찾아왔다. 처음엔 아이를 낳고도 공방을 계속 꾸릴 계획이어서 만삭까지도 수업을 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다시 수업을 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만 엄마 도움을 받고, 어린이집에 보낸 후에는 공방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온한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이 말기신부전 진단을 받고 신장 투석을 하게 되었고, 공방 수업이 있을 때마다 아이를 봐주시던 친정 엄마는 충격으로 어지럼증이 재발하고 말았다. 남편의 망가진 신장은 칼륨을 걸러내지 못해 혈중 칼륨 농도가 너무 높아져 있었고, 몸에 쌓인 칼륨이 언제 심장을 멈추게 할지 몰라 잠시라도 통화가 안 되면 두려운 상상에 몸을 떨곤 했다. 남편은 늦둥이 딸을 낳고 책임감에 일을 쉴 수가 없었고, 나는 아기띠를 매고 남편의 식이요법을 위해 야채들을 물에 2시간씩 담가 칼륨을 녹여낸 후 음식을 만들어 출근 도시락을 싸주곤 하던 때였다. 남편을 쉬게 하려면 오히려 내가 돈을 더 벌어야 할 것 같았는데, 수업할 동안 아이를 봐주던 엄마마저 아프시니 겨우 버티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선택했던 건 순종이었다. 내 운명에 순종하는 것. 더 이상 저항하거나 도전하지 않고 이 운명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 언제나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운명에 도전하던 내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자.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아보자. 남편과 나누는 대화, 아이들과 눈 맞추는 일상, 틈틈이 읽는 책들. 그 안에서도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삶을 살아보자. 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꿈꾸며 살아왔기에 내 마음이 늘 괴롭고 힘들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 제발 좀 다 내려놓으라고. 지금, 여기에서, 현실을 살라고, 내게 운명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방 문을 닫게 되었고 내 꿈들도 다시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로부터 벌써 8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수납장 속에서 깨어난 기억들이 재료들과 함께 줄줄이 딸려나왔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청소년처럼 마음이 갈팡질팡이다. 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한길만 쭉 파서 성취를 이루어낸 멋진 어른이 되지 못했나 한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나이에도 꿈을 찾아 헤매는, 이게 나인걸. 조각조각의 내가 모여 언젠가는 무언가가 되겠지.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내 방을 만든 것이다. 다시 짐을 바리바리 싸고 또 한번의 이사를 하기로 한다. 나와 함께 가자. 다시 꿈꾸는 방으로. 무엇으로 완성될지는 그 방에서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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