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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아레테 Nov 05. 2021

임신이란 무엇일까?

우울함,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과정


임신 20주 차에 접어들면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윗배는 튀어나오기 시작한 아랫배의 곡선과 합쳐지면서 완연한 D모양을 이루었다. 정말 D라인이다. 누가 봐도 이젠 임산부이다. 임신 중기에 접어들며,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산책을 할 때마다 숨이 차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거뜬히 걸었던 산책코스도 걷다 보면 어지러워서 몇 번이나 주저앉아 숨을 고르곤 했다. 


도대체 임신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내 삶을 폭풍처럼 뒤흔드는 것일까.



나는 임신을 통해 변화하는 내 몸을 볼 때마다, 우울감과 쓸쓸함, 외로움이 뒤섞여 감정이 널뛰는 나 스스로를 느끼며 늘 자조 섞인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이리 대단하고 고귀하기에 국가는 이런 중요한 내용을 교육과정에 넣지 않은 것인가.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성실한 모범생이었고, 남들이 내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기술과 가정>도 늘 90점 이상을 받던 아이였기 때문에 임신과 관련된 교육과정이 있더라면 우수하게 습득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어마 무시한 작업인걸 알면 감히(!) 임신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은폐를 하는 걸까? 생명을 품는 고귀한 일이라 하지만 그 뒤에 따른 희생과 고통이 너무 크다. 

이걸 몰랐던 과거 세대의 엄마들은 어떻게 살아갔던 걸까. 나는 늘 그 생각을 하였다.


임신 15주 차가 될 때까지 내 입덧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상당히 입덧이 빨리 온 편이었는데, 거의 5주 차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동시에 입덧이 시작되었다. 제일 경기를 일으킬만한 입덧 요소는 바로 고기였다. 역한 고기 냄새- 밥상머리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한 끼조차 먹지 못하는 내 남편은 나로 인해서 고기반찬을 강제로 줄여야만 했다(그러나 그는 끝끝내 고기반찬을 포기하진 못했고, 양을 최대한 줄이는 걸로 협의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고기 장면만 봐도, 고기에 '고'라는 글자만 꺼내도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먹었던 음식물을 그대로 게워내곤 했었다. 몇 시간 전 내가 먹었던 음식물이 위장에서 어떻게 소화되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은 썩 즐겁지 않다. 무엇보다도 타는 듯이 답답한 식도와 명치 부근, 액체조차도 역류하는 느낌.. 그 느낌이 몸서리칠 정도로 싫었다. 


야채를 곁들여먹던 내 식단도 많이 변했다. 야채에서 나는 특유의 날 비린내도 내 신경을 건드렸다. 식단 중 야채랑 고기를 먹지 못하니 남는 건 과일밖에 없었다. 평생 먹지도 않은 오렌지주스를 입에 달고 살았다. 거의 일주일에 두 통은 콜X 오렌지주스로 작살냈다. 오렌지주스도 모자라서 과일 오렌지도 한가득 사두었다. 자두, 오렌지, 키위, 귤... 과일처럼 당이 많이 든 음식을 먹으면 애기가 커질 수 있었다고 했지만 내가 죽겠는데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 과일을 욱여넣었다. 밥은 거의 1/3 공기를 간신히 넘겼고 그마저 토하는 경우도 많았다. 주차가 지날수록 밥을 넘길 수 있는 양은 서서히 많아졌지만 먹는 과일의 양을 줄이긴 힘들었다. 특히 아침 공복에 고통스럽게 울렁이던 속은 오렌지주스를 한 컵 들이키면 잠잠하게 가라앉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먹는 행위가 고통이 되니 삶이 재밌을 리가 만무했다.


주차가 늘어날 때마다 입덧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그 여파로 소화불량과 역류성 식도염이 새로 나타났다. 음식 냄새가 역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이상 과식을 하면 바로 체하거나 토하는 건 여전했다. 

20주 차인데도 윗배는 안 튀어나온 임산부도 많던데. 지긋지긋한 입덧 때문에 복부에 가스가 차서 복부팽만이 나타난 게 아닐까?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이 있어서 비딱한 생각만 계속 들었다. 

내 몸은 이렇게 시시각각 힘든데, 아기는 정말 무탈할 정도로 잘 자라고 있으니 야속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하고.. 이율 배반적인 감정이었다.


입덧으로 오게 된 두 번째 증상은 빈혈이었다. 

나는 빈혈 증상이 상당히 빨리 온 편이었다(아마 입덧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극심한 편두통과 어지러움증으로 입덧이 그나마 잠잠한 날에는 두통에 시달렸다. 타이레놀이나 약 한 알 쉽게 먹지 못하니 소파에 누워 끙끙 앓으면서 울곤 했다. 게다가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소양증도 생겼다. 몸에 생기는 두드러기.. 배랑 가슴 쪽이 간지러움이 특히 심했는데, 흉이 질까 봐 긁지를 못하니 얼음팩을 가져다 대면서 엉엉 울었다. 몇 번은 회사에 가있는 남편한테 전화해서 울면서 살려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입덧과 소양증, 두통이 한꺼번에 오는 날은 내게 지옥이었다. 임산부는 마음을 곱게 먹어야 한다 하는데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텅 빈 현관문을 바라볼 때면 머리를 찧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나마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여서 다행이었다.

회사를 정상 출근하면서 임신을 했더라면 아마 나는 중간에 조기 휴직을 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도 이렇게 힘든데 회사에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으리라 만무했다.


내가 처음 회사에 입사한 후 나의 사수는 임신을 했는데, 심한 입덧에 시달려서 하루 종일 화장실에 있던 기억이 있었다. 사실 그때는 미혼인지라 딱히 힘들구나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화장실 바닥에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토한 탓에 멍이 들었던 걸 보면서, 차디찬 타일 바닥에 담요를 깔아주는 것 배려 정도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사실 미혼의 신입직원이 임신의 고통을 헤아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문득 나는 그 사수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회의 중간에 올라오는 토기로 화장실을 드나들었고, 팀장님께 보고를 드리다가도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 뛰쳐나가곤 했다. 출근한 지 3일,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재택근무로 전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상반기 근무성과가 아까웠지만 그때는 책상에 앉아있는 게 고통스러웠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숨을 쉬는 이상 입덧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회사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에서 나는 먼지 냄새, 커피 그라인더에서 나는 커피 향, 마스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같은 직원들의 향수 냄새와 샴푸 냄새가 섞인 체향... 세상에 그렇게 많은 냄새가 존재하는지 나는 임신하고 난 뒤에 깨달았다. 어쨌거나 임신은, 후각적 측면에서 나의 시각을 한층 더 넓혀준 셈이었다. 


그렇게, 일련의 서술한 증상들로 인해 내가 누리고 있던 삶의 모든 활동은 멈추었다.

회사가 끝나면 나는 필라테스나 운동을 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듣는 등 나만의 자기 계발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신의 과정에 들어서면서 나의 모든 활동은 강제 중단되었다. 내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토하거나 누워있거나 자는 거였다. (실제로 입덧 약은 항히스타민제라서 먹으면 매우 졸렸다. 임산부를 재워서 입덧을 안 하게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또한 재택근무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필요한 업무상 대화는 메신저로 이어지다 보니 남편이 오기 전까지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만을 기다렸고, 남편이 퇴근하면 그제서야 숨통이 트인것처럼 조잘조잘 내 얘기를 떠들곤했다. 남편이 늦는 날은 과도하게 우울해졌다. 코로나 때문에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다 보니 내가 유일하게 삶에서 소통하는 사람은 남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내 삶의 축이 남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희로애락이, 그리고 삶의 축이 남편으로 맞춰진다는 점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왜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걸리는지를 실감하게 되던 순간이었다. 

평생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만 하다보니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집에 안방이나 남편의 서재, 아이들 공부방은 있지만 엄마가 혼자서 편히 쉴만한 엄마의 공간이 없었다는 어떤 말처럼.

임신을 하는 순간부터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가 그동안 숨쉬어왔던 자아는 지워지는 것이다. 마치 흘러가버리는 빗물처럼, 그렇게, 침잠하듯이..



예전에 인터넷에서 보던 글이 생각났다.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축을 여러 가지로 만들어놔야 한다고. 그래서 취미생활이든, 운동이든, 악기든, 다양하게 발을 걸쳐야 내 삶의 어느 한축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축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의존하는 외로움의 충족은 분명 한계가 있다.

실제로 몇 달 동안 남편의 작고 사소한 행동에도 눈물을 터트린 경험을 해보니 더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의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는 것을.이건 아마 임신으로 인한 감정적인 우울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활이 없다 보니 강제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 강제적인 현실말이다.


내 삶의 주도권은 내가 쥐어야지, 타인에게 의존하며 타인에게 넘겨주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




임신은 태아를 잉태하는 과정이지만, 

임신의 과정에서 산모의 고통과 슬픔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산모는 태아를 품으면서 삶을 버리는 연습을 하고, 애가 태어난 이후에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누리던 삶의 즐거움을 멈춰야 했는데, 아무도 이 노고를 몰라주는 걸까. 

어머니의 위대함과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과정을 퉁치기에는 다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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