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민재님으로부터 메일이 온다. 다행히 나한테만 오는 건 아니고 우리 패션팀 전체 인원을 수신인으로 하는 메일이다. 민재님이 오시기 전에는 월요일 아침에 진행하던 위클리 미팅이 화요일 오후로 옮겨졌고, 이렇게 전날에 미팅에서 다뤄질 안건이 무엇인지 미리 메일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내용의 메일을 받았을 때에는 어리둥절했다. 지금은 그날의 어젠다만 작성되어서 오지만, 처음으로 왔던 어젠다 메일에는 맨 위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금주부터는 위클리 미팅을 매주 화요일 2시 30분에 진행합니다. 제가 오고 나서 처음 하는 미팅이니까 어떻게 진행되는지 미리 알려드릴게요.
회의는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팀 전체에 공유가 필요한 공지사항(있는 경우)과 어젠다를 전달하고, “왜죠?”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만 각 담당자에게 할 예정이에요. 아래 내용으로 회의를 준비하시면서 여러분도 “왜?” “어떻게?”를 함께 고민해서 와 주세요.
다음 날 오후 민재님과의 첫 위클리 미팅은 참혹했다. 심지어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 창피함을 잔뜩 안겨준 원온원 미팅 (제1화 참고) 몇 시간 후에 이루어진 위클리 미팅이어서 그 충격파가 더했다.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팀원 2명도 민재님이 앞서 요청했던 미팅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여서, 하나하나 다 같이 데이터를 조회해 가며 각 카테고리의 매출 변화 요인을 파악했다.
민재님이 떠난 회의실, 1시간 동안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듯한 그곳에 덩그러니 남은 우리는 혼이 다 빠져서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 지금 오늘 아침부터 콤보로 얻어맞고 있어요.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적막을 깨고 말했다. 말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머지 팀원들도 그제야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마찬가지라고 끄덕인다.
두 분도 아시지만 저 이런 분석하는 거에 진짜 약하거든요? 앞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민재님의 합류 이후 사무실에서 영 기분이 침체되어 있는 - 항상 발랄한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였다 - 소라님이 왠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소라님 괜찮을까?
2.
민재님이 오기 전 위클리 미팅은 회의 주제가 신규 브랜드 영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 물론 실적 얘기가 빠질 수는 없었지만, 그 부분은 이전 팀장님의 몫이었다. 팀장님이 지난주 GMV는 어땠는지 목표 대비 달성률은 어떤지를 주르륵 읊어준다. 우리가 할 질문은 없었고 팀장님도 딱히 질문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후에 담당자 각자 지난주 신규 브랜드 영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몇 개 브랜드와 통화를 또는 대면미팅을 했고 그 결과 입점하기로 했는지 아니면 어떤 핑계로 하지 않는지를 이야기했다.
미리 미팅을 잡아놓고서도 막상 약속된 시간에 찾아가니까 마치 불청객 장사꾼이 들어온 것처럼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브랜드였다. 하지만 내가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고생해서 설득을 했고, 처음엔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팔짱 끼고 듣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내가 떠날 때는 앞으로 잘해보자고 서로 악수까지 했다는,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스토리를 직접 몸짓 연기까지 하면서 자신감 넘치게 설명했다. 다른 팀원들도 약간의 과장, 약간의 왜곡, 약간의 허영을 더한 자신들의 영업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 같이 웃기도 하고 박수도 치는 화기애애한 미팅이 익숙했다. 유일하게 웃음기 없고 모두 진지하게 임했던 회의는 팀장님의 갑작스러운 퇴사 고백으로 막을 연 마지막 미팅이었다.
3.
“왜죠?” “어떻게 하면 되죠?” 보기엔 간단해도 답하려고 하면 전혀 간단하지 않은 그 두 질문에 더 이상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자세히 실적을 보고 가기로 했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다른 팀원들 앞에서까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위클리 미팅 직전까지 매출 데이터를 열심히 분석했다. 민재님과 진행하는 네 번째 위클리 미팅이고, 이제는 “왜?” 질문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미리 던져보고 답을 고민하는 데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 – 어쨌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참 다행이다 - 미팅 시간 5분 전 회의실로 향했다. 예전에는 팀원들이 회의실에 모이면서부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민재님을 기다린다.
그럼 다음은 주간 실적 리뷰 진행할게요. 여성부터 시작해 주세요.
민재님의 8월 KPI 목표 전달이 끝나고 내 차례가 왔다. 혹시 숫자가 헷갈리고 말이 막힐까 봐 노트북 바탕화면에 스티커메모 앱을 켜놓고 나름대로 스크립트를 적어놓았다. 중간중간 훔쳐보면서 리뷰를 하기 시작했다.
네, 여성의류 카테고리 전체 GMV는 전주 대비 +4.5억 증가했는데요 – 윽, 긴장한 바람에 목소리가 떨린다. 듣는 사람들도 알아차리면 안 되는데 - 증감률로는 +2.9%입니다. 티셔츠에서 +5.1억, 팬츠에서 +1.4억 매출이 증가했습니다. 티셔츠 매출 증가는 금요일부터 3일 간 진행했던 주말특가 기획전에 참여한 슬리브리스 상품들 요인이 컸습니다. 매출이 가장 많이 상승한 상품 5개가 모두 기획전 참여 상품이었어요.
그래요, 지수님이 고객 트렌드에 맞춰서 빠르게 액션 하신 성과가 있네요. 이 상품들 매출을 여름시즌 마감까지 계속 끌어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즌오프 기획전이 라이브(live: 새로운 기획전, 배너 등 프로모션이 실행되어 고객들에게 노출되는 것)되는데, 이번 주말특가 기획전에서 반응이 좋았던 상품들 추가로 협의해서 노출하려고 해요. 보니까 나시 검색량이 8월 중순까지 높아서 시즌오프 때도 고객 수요가 확실히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좋아요 – 민재님이 ‘좋아요’라고 말하다니. 내 귀에는 이 말이 ‘잘했어’로 들렸다 – 시즌오프 기획전 대상이 아니었던 상품들 있으면 추가로 협의해 주세요. 음, 주말특가 상품들은 티셔츠 위주던데 원피스나 블라우스 카테고리 상품들 중에서도 슬리브리스류 추가할 것들 같이 정리해 주세요.
아, 솔직히 티셔츠 매출을 분석하다가 떠올랐던 거라서 티셔츠 말고 다른 카테고리는 놓치고 있었는데 잘 짚어주시네. 더운 여름에 나시 찾는 고객들이면 티셔츠도 보고, 원피스랑 블라우스도 나시에다가 예쁜 거면 함께 고민해 보고 구매할 것이다. 경험이 많으면 시야가 넓어지는 건가?
4.
미팅이 끝나자마자 바로 또 하나의 메일이 왔다. 방금 나눈 이야기들 중 각자 액션이 필요한 것들 – 그리고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지 - 에 대해 정리한 메일이 도착했다. 이렇게나 빨리 보낸다고? 민재님이 우리 얘길 들으면서 메일을 미리 작성해 놓고, 회의실 나가면서 발송을 누르고 나간 게 틀림없다.
가끔 회의를 하고 나서도 끝나면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그래서 우리 뭐 하기로 했지? 하고 기억이 증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1시간 동안 많은 대화가 오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을 걸어 나오자마자 아무 결과물 없이 흐지부지되는 느낌. 그저 회의시간을 채우기 위한 회의를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회의의 주최자가 끝나고 정리해 주는 게 필요한 건데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 다들 그저 알아서 하겠거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면 잊어버리는 사람도, 놓치는 사람도, 아니면 그냥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안 한 사람도 많았다. 민재님이 오시고 나서야 ‘아, 이렇게 회의를 마무리지어야 일이 제대로 되는구나’ 깨닫게 되었다.
회의 분위기 너무 삭막하지 않아요? 주원님 - 전에 계시던 팀장님이다 - 이 그리워요.
그래요? 저는 오히려 지금이 나은데. 그땐 솔직히 팀장님 맘에 드는 말 지어내기 바빴잖아요.
민재님이 없는 틈을 타 드디어 우리끼리 이야기를 한다. 역시 똑같은 회의를 하는 데도 팀원들 간에 서로 느끼는 바가 완전히 다르다.
지수님은 어때요? 민재님이 요구하는 방식에 제일 적응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요? 아니에요 저 힘들어요.. 조금은 그래도 익숙해져 갈랑말랑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하다 보니까 실적도 확실히 눈에 들어오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지는 것 같구요. 회의도 좀 유익해진 거 같고..
그러니까요, 저도 그래요. 그전에는 매번 회의 때마다 똑같이 어디랑 미팅했는데 어땠고 저땠고, 영업 뛰고 온 후기 각자 말하고 나면 끝이었잖아요. 내가 말만 잘하면 되는 그런 회의였는데 지금은 미리 데이터 보고 준비도 다 해와야 되니까 그만큼 회의에 더 집중하게 돼요.
자기만 빼놓고 나머지 둘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니 소라님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는 멍하니 딴 데를 바라보고 있다. 그만 이야기하고 나가서 소라님이랑 둘이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달래줘야 할 것 같다.
+.
내게 엑셀의 기본기를 전수해 준 원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혼자 밥 먹어야 한다는 소라님도 데리고 함께 왔다.
지수님 그때 타운홀 미팅(소규모 기업 등에서 경영진과 구성원들이 다 함께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영업 노하우 세션 하셨죠? 말씀하셨던 거 중에 “내가 말하기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라”였나? 그게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커머스 파트이긴 해도 팀이 다르면 친목을 다질 만한 일이 없다. 그래서 이름이야 메신저에서 자주 봐서 익숙하지만 다른 팀 직원들의 얼굴을 그 이름들과 매치하기는 어렵다. 원님과도 이번에 이것저것 물어보고 배우면서 안면을 텄다. 그런데 이런 나와는 다르게 원님은 올 1월에 했던 타운홀미팅 때부터 나를 계속 알고 있었나 보다.
저는 촉이 왔어요.
식사를 마치고 원님은 살 게 있다며 편의점으로, 우리 둘은 사무실로 돌아와 양치를 하러 가는데 소라님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무슨 촉이요?
로맨스의 촉이 왔어요.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