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꿈에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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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난 가면을 쓰고 무도회에 참석한다.

2025.1.20.

by 윤지아 Feb 06. 2025

전철역 플랫폼을 나오니, 넓은 광장이 펼쳐져있다.

방금 내가 타고 온 전철은 지상으로 달려 나를 내려준 역을 빠르게 떠나버렸다.

내가 서있는 그 광장은 초록빛이 싱그럽게 파릇파릇하고 잘 정돈된 잔디밭이었고, 가운데 황토색 흙길이 길게 뻗어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그곳에서 난 잠시 서성였고, 곧바로 다음 전철이 도착했다.

그 전철에서 내린 어떤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뛰어왔다.

"나랑 같이 들어가~"

그 남자와 나는 이미 아는 사이인듯했다.

"왜 바로 안 들어가고, 이쪽으로 왔어?"

말은 그렇게 해도, 난 반가운 눈치이다.


우린 광장에서 한참을 걷거나 뛰며 놀았다.

분명 어린아이도 아닌데, 어린아이처럼 논 기분이다.

마치 어둑어둑 해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그날 처음 만난 동네 또래와 뛰어놀다가,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소리침에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던 그 시절처럼.

그렇게 아무 걱정 고민도 없이 자유롭게 뛰논 그런 기분이다.

그러나 한참 뒤 전철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온 여자는 엄마가 아닌 어떤 나이 든 여자였다.

사감선생님 같은 인상의 딱딱하고 엄격해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둘 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다. 늦기 전에 얼른 가자."

그 여자는 나와 함께 있던 남자를 나무랐다.

"넌 일찍 왔으면 일찍 들어오지, 왜 몇 정류장이나 더 지나와서 쟤랑 놀고 있는 거니."

그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냥 웃는다.


셋이 나란히 걷다가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떤 편의점이다. 그 편의점 옆에 있는 알 수 없는 낮은 문이 있다.

그 문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여자와 남자가 먼저 들어가 버리고, 드디어 내 차례다.

조심스레 가림막을 들추고 들어가니 어두운 보랏빛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재즈가 흐르는 어떤 파티장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지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왜 이제 왔냐고, 너는 왜 가면이 없냐고 나무란다.

얼떨결에 파티에 참석한 나는 그곳이 내가 일해야 하는 곳이란 걸 깨닫는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들과 똑같이 가면을 쓰고 파티에 참석한 듯 사교적인 활동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준비한 가면이 없어 오늘은 그냥 이렇게 일을 하기로 한다.


좋은 분위기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지만, 기분은 좋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나쁘다.

그들이 쓴 가면은 왠지 모르게, 아름답다기보다 기괴하고 부자연스럽다.

하얀 석고 가면에 얼굴의 1/3쯤 가린 어떤 여자와 한참 대화를 나눈다. 그녀의 하얀 석고 가면은 한쪽눈만 가려져있었으며, 빨간색으로 어떤 문양이 들어가 있다. 눈이 뚫린 부분에는 검은색으로 아이라이너를 그린 듯 음영 덧칠이 되어있다. 그녀의 반대쪽 눈이 표정에 따라 움직일 때마다, 가면을 쓴 쪽은 그러지 못해 부자연스럽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 나를 데려다준 여자가 파티가 끝났음을 알린다.

모두들 사교 활동을 마치고 또 다른 검은색 커튼 쪽으로 향한다. 나도 조용히 뒤따른다.


그 검은 커튼을 들추자, 안에는 오늘 파티에 참여한 모든 직원들이 가면을 벗어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난 가면을 벗은 직원들의 얼굴을 보며 섬뜩하게 놀랐다.

가면으로 덧씌워졌던 얼굴이 썩어 문드러져있었던 것이다. 그 가면의 모양대로, 검게 짓눌러 타들어가듯 흉하게.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어울리는 가면 하나를 들고 온다.

"너도 내일부터 이걸 쓰도록 해"

그 가면을 쓰는 방법은 못질을 해 얼굴에 박는 것이었다.

가면을 벗은 직원들은 썩어 문 들어진 한쪽 얼굴이 이미 익숙한 본인의 얼굴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가면을 벗고 퇴근했다.



요즘 내가 그렇다.

전보다 조금은 네임밸류가 있는 회사로 이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꿈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나의 무의식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화려한 가면무도회장 같은 이곳.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모든 것들. 

절반만 본인을 유지한 채,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모습들.

그러나 가면을 벗어낸 진짜 모습조차 이미 그 강력한 가면에 지워져 버렸다.

결국 그 지워진 얼굴에 꼭 맞는 가면을 쓰고, 또다시 반복적으로 이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파티장에 가서 다른 가면을 쓸 수도 없다. 

이미 그들의 얼굴은 그 가면에 꼭 맞춰져 못질되어 있으니.


그러나 이러한 가면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와 뛰어 논 그 소꿉친구 같은 동료처럼 아직 이 회사에 물들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그 동료를 통해 난 아직 그 세계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나도 그도 언젠가 그 가면뒤에 내 진짜 얼굴이 문드러져, 그 가면이 없으면 다른 곳은 영원히 가지 못하게 될지.


그렇다고 또 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사실 이 형식적인 파티가 싫지만은 않다.

그럴싸한 가면이 싫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를 잃고 싶지는 않다. 이것만은 절실하다.

이곳에서 이곳의 문화에 맞춰, 내 업무능력과 관계없는 연극과 정치를 하며, 보내는 이 시간들이 진정한 내 경력이 되어줄까.

나를 이루거나 발전시키는 경력이 되기는커녕, 나의 일부를 지워버려,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은 영원히 갈 수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난 망가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꿈의 해석을 하며 결국 오늘도 난 파티장으로 들어와 출근을 찍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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