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시키시는 하나님
일단 내 MBTI는 ENTJ다.
E임에도 불구하고, I 같은 성향이 다분히 많다.
하루종일 사람에 치이다가 잠깐 찾은 회사 화장실 한 칸이 나에게 안식처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얕은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가"
또는,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난 전공을 살려 입사했고, 전공에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만일 생각했던 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괴감이 더욱 심했겠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어떤 경우이든 저 말을 되뇌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면접 때 말하는 지원동기 따위는 예쁘게 포장한 스토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분명 그 입사동기 스토리의 뼈대정도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겉 포장 말고, 제대로 된 지원 동기에 집중해야 한다.
대기업의 커리어가 필요해서
경력 단절을 끊고 싶은 재 취업
업종을 변경해서 새로운 커리어를 추가해 보고 싶어서
연봉이나 직급을 올리고 싶어서
집이랑 가까운 회사여서
네임밸류 있는 회사여서
이것들은 모두 내 이직의 이유였다. 물론 각자의 이유는 더 다양할 것이다.
이 이유들을 만족시킨 입사라면, 일단 버틸 이유가 있다.
물론, 입사 이유는 만족시켰지만, 생각지 못한 더 큰 마이너스 요인이 생긴다면 그땐 이직을 하고 싶은 발동이 걸린다.
그렇게 되면 다음 회사에서의 지원 동기는 하나씩 더 추가가 된다.
네임밸류도 있고 + 업무가 지금보다는 적었으면 좋겠다.
운 좋게 다음 회사에서 이 두 가지의 요건이 충족되고 어느 정도 다니다 보면 또 다른 단점이 보인다.
그럼 그 다음 지원 회사의 지원 동기는 또 하나의 요건이 추가가 된다.
네임밸류도 있고 + 업무가 지금보다 적고 + 그러나 돈은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정말 정말 운이 좋게도 이런 회사로 다시 이직을 하고, 어느 정도 다니다 보면 또 그곳의 다른 단점이 보인다.
물론 세 가지나 만족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 모든 걸 뒤엎을 만한 커다란 문제이다.
네임밸류도 있고+ 업무량 적당하고 + 돈도 많이 받고 + 불법적인 일 좀 강요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마치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갈치도 있고~ 시금치도 있고~ 뭐 하나씩 계속 추가되는 그 노래와 똑같다.
이 모든 것이 교집합이 되는 그런 회사는 분명히 있다. 세상은 넓고 회사는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 포지션을 적시에 만나기가 힘들다.
찾는다 해도 그 회사의 입장에서도 저 노래처럼 다양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을 뽑고 싶어 할 것이기에 나 또한 장점이 많아야 가능 한 일인 것이다.
저희는 경력 10년 이상 +나이 30대 중후반 + 금융업 유경험자 +야근에 관대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다.
가끔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신다.(아니다. 거의 매일이다)
"네 마음에 쏙 드는 회사를 어떻게 찾냐. 거기서 뽑아나 준다니~ 좀 그냥 참고 다녀라."
그러나 난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엄마는 공무원 출신이다. 그리고 난 정의감 넘치는 기업 법무팀 팀장이다. 애초에 엄마와 나는 지원동기 자체가 다르다.
아마 우리 엄마에게 지원동기는 딱 하나일 것이고, 매우 만족스러우셨을 것이다.
안정적이면 된다.
이렇게 사람마다 지원동기는 다르고, 현재 있는 곳에서의 만족도는 다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신입사원이다.
신입사원일 경우에는 이런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결국 사회에서 내 강력한 무기는 '경력'이다.
물론 이러한 '경력'이 없는 신입은 스펙과 외모와 성격이 무기겠지만, 이 모든 것은 '경력'에 밀리는 카드일 때가 많다. 그러니 신입의 경우에는 일단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더라도, 일정 부분은 견뎌야 하는 절대적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긴 하다.
(내가 신입일 때에는 이 말이 부당함을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들려서 싫었지만, 결국 나도 똑같은 말을 하게 되는 걸 보면 이 말이 맞긴 한가보다.)
물론 경력직일 경우에도 위의 교집합을 충족시키는 회사로의 이직을 위하여 내 무기를 추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처한 입장에서 최적인 이 회사에 더 버텨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사실 나는 회사 다니는 행위를 "버틴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러나 적어도 일정 경력인 나만의 특수 무기가 생기기 전에는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어 유감이다.
내 무기 또한 온라인 게임의 무기처럼 인챈트를 덧씌워 다양한 수식어를 추가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하다. 아무리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 한들, 이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앞으로 살면서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내 이직의 경험들을 차례차례 줄 세워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 필요 없었던 것이 없었다.
심지어 법무와 관련 없던 첫 보험회사에서의 경력이 그러했다.
다시는 보험회사의 업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나의 언더라이팅 자격증과 보험심사 경력은 영원히 쓸모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도 계획된 것이었다. 보험사에도 법무팀은 있지 않은가.
현재 나는 보험과 관련이 깊은 핀테크 회사의 법무팀에 재직하고 있다.
회사 화장실 칸에 들어와
"하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라고 불평하며 마음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들려온 기도의 응답은
"지금 이곳과,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 시간들과, 이 경험들은 너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곳과, 이곳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너가 반드시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이 시간을 견디면 분명 그 다음은 내가 원하는 저 교집합을 만족시키는 최적의 곳을 최적의 타이밍에 보여주신다.
그럼 내가 할 일은 현재 지금 있는 곳에서 내 무기를 추가시키는 것. 하나님께서 기회를 보내 주실 때 그 기회를 알아차리고, 잡을 수 있도록 성장하고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있는 각자의 회사에서 오늘 하루도 힘겹게 버텨낸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괜찮다. 지금 있는 곳이 내가 계속 있길 원하는 곳이 아닐지라도 괜찮다.
지금은 이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곳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획하신 큰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퍼즐의 한 조각이다.
그러니 오늘도 완벽히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