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지난 6월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3개월이 됐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바이올린을 배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더니 사십 대의 전업주부, 배불뚝이 아줌마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앙상블팀에 소속돼 연주를 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겨우 3개월 차 바이올린 초보이지만 내게 바이올린은 자존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성취감, 뭐라도 하고 있다는 안도감... 그런 감정들이 바이올린에 깃들어 있다.
초등, 아니 국민학교 시절 5년 간 피아노를 배웠던 것을 제외하면 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리코더, 단소, 소고, 장구 등이 제가 접한 악기의 전부다.바이올린은 부자들의 전유물 같은 이미지여서 진입장벽이 높다못해 다른 행성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딱 떨어지는 정장이나 드레스를 입고 한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걸쳐놓고 우아하게 팔을 움직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연주자는 서울 강남이나 성북동, 평창동 같은 부자 동네에나 살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악기였고. 막상 바이올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꼭 돈이 많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건 딸아이 영향이었자.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교내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면서 내가 바이올린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공립인데도 불구하고 교내 오케스트라가 활동하고 있는데 학기별로 등굣길에 연주를 하거나 졸업식, 입학식 혹은 관내 행사에 초청을 받아 연주를 하곤 한다. 아이를 따라 등굣길 연주회를 몇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는 고백도 해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게 연주회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로 억지로 찾아다녔지만 졸고 나오는 게 다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내가 초등학생들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동네 도서관에서 진행된 아마추어 앙상블 연주회에 다녀오면서 악기와 연주에 대한 갈증은 계속 커졌다. 악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악기 구입비나 레슨비 등을 생각하면 가시적인 수입이 전혀 없는 나는 감히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선에서 감사할 수밖에.
@이니슨
기회는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모양이다. 그게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결국 개인의 역량일 것이고.
아이가 오케스트라의 신입 단원이 된 이후에 지휘를 맡아주시는 외부 선생님을 통해 동네에 성인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휘 선생님이 시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 공모사업으로 운영하는 DEEP이라는 오케스트라인데 악기를 배운 적이 없어도, 심지어 악기가 없어도(대여 가능)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아니겠는가!!
20~30여 년 간 악기와 어떤 접점도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와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지만 설렘이 세력을 넓히면서 두려움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금이 아니면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의 두려움보다 아무 발전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나 자신을 매일 마주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니까. 그나마 피아노를 장기간 배웠던 덕에(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악보는 살짝 볼 줄 안다. 믿는 구석은 오직 이것뿐인 채로 성인 오케스트라 모임에 발을 들였다.
정확히 6월 12일에 바이올린 쌩 초보로 시작해 도레미파솔라시도도 모르던 나는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앙상블팀으로 승진(?)해 벌써 두 번의 공연을 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음을 짚고, 박자를 맞추며 어설프게나마 연주가 가능해진 덕이다. 비록 작은 규모의 동네 혹은 주민 행사용 공연이었지만 먼저 앙상블팀에 소속돼 있던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초고속 승진이라고 한다.
제대로 레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맑고 고운 소리보단 삑삑 쁙쁙 소리가 난무한, 초보와 다르지 않은 실력이지만 더 잘하고 싶고 더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내가 마음에 든다.
DEEP 단원(연습생 포함)은 화가, 음악가, 학생, 선생님, 회사원, 주부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고, '아이와 함께 연주하고 싶어서', '아이에게 엄마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악기로 자기 계발을 하고 싶어서'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모였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도와주며 함께 성장한다는 공통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니슨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천재 음악가는 아니지만 마치 21세기 모차르트라도 되는 듯한 기세로 더디지만 확실하게 발전하고 있는 불혹의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