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데리고 나갔다 올게" 듣던 중 반가운 말

독박육아 에세이

by 이니슨

아마도 12월 초였던 것 같다. 주말이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온다고 했다. 수산시장에 가서 회를 사 온다는 것이었다.


'이게 웬 횡재냐~'


나는 단 번에 좋다며 환호했다.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만 아니면. 나 혼자 있을 걱정은 절대 하지 말고 아이들 물고기 구경 오래오래 시키고 와도 된다고 덧붙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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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이 텅 빈 집안. 몇 달 만인 것 같다. 두 아이 중 하나도 없이, 오롯이 나 혼자 있는 시간은. 원래 같으면 다 하지 못한 설거지를 하고, 정리와 청소를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혼자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만 있는 시간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소주 두 병을 냉동실에 넣어놓고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낮 시간에 아이들이 보는 만화가 아닌 내가 보고 싶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는 게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피곤이 밀려와 그대로 잠을 청했다. 이제 돌아온다는 남편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대로 쭉 낮잠을 잤을 것이다.




당시 나는 부쩍 짜증이 늘어 있는 상태였다. 쉽게 화가 치밀었고, 아이들이 예쁘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하던 때였다. 친구의 권유로 인터넷을 통해 우울증 자가 검진을 했는데 서너번의 검사 결과가 모두 내게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로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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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우울하다기보단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었다. 아침을 시작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무기력해서 툭하면 멍하니 있는데 그러느라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짜증이 났다. 뭘 하든 머리가 복잡하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별일 아닌 것에도 크게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내며 혼을 냈다. 그게 속이 상해서 또 짜증이 났다. 이렇게 한 번 짜증이 나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요즘 이렇다고 얘기할 사람도 없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굳이 얘기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내심 과거 남편에게 우울하다고 말했다가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우울해?'라는 짜증섞인 말을 들었던 기억 때문에 우울하고 힘들다는 말을 또 꺼내기가 힘들기도 했다.


그냥 그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수시로 우울함을 느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아주 괜찮은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난 참 우울했던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슬퍼졌다. 내가 이렇게 우울함을 느끼는데 나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서러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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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게 남편의 "애들 데리고 수산시장 다녀올게"라는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 말에는 단순히 시장에 다녀오겠다는 의미 외에도 '평소에 애들 밥 챙겨주느라 바빠서 먹고 싶어도 못 먹는 회 사 올게', '기왕 먹을 거 좋은 것 먹어'와 '매일 애들이랑 하루 종일 고생하니까 잠깐이라도 좀 쉬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나는 종종 남편이 본인이 힘든 것만 알지 내가 힘든 건 모른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집에 있는 건 노는 것으로만 생각한다고 느낀 날들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자존감은 땅 끝으로 곤두박질쳤고, 분노가 쌓였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이러려고 애를 낳았나'라는 생각을 수차례 반복한 것도 사실이다. 우울증 자가 진단 결과는 그런 날들이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 역시 아빠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며 "엄마. 우리 아빠 말씀 잘 듣고 다녀올게요. 혼자 잘 쉬고 있어요~"라고 내게 인사를 했었다. 본인들도 평소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안다는 것처럼.


그날 남편의 말과 행동은 그동안 쌓였던,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인 듯했다. 비록 기대했던 것보다 짧은 두 시간에 불과한 자유였지만 그 안에 깃든 남편의 마음과 집을 나서며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마음만은 내게 따뜻하게 와닿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남편이 그동안 말을 하지 않을 뿐 쉬는 날에 음식을 곧잘 해주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때다. '나만 힘들다'라는 생각보다 '상대도 나처럼 힘들다'라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상대가 배우자든, 아이든.


물질적으로 대단한 무언가를 주지 않아도 된다. 쉬는 날 쉬고 싶어 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 피곤해도 집안일을 함께 하려는 배려, 날 선 말 대신 따뜻한 말을 건네려는 노력, 놀고만 싶은 아이 마음에 대한 공감, 부모가 힘들지 않게 하려 애쓰는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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