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면서요?
수양대군은 문무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학문적으로 보면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했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석보상절>, <월인석보> 편찬에도 참여합니다. 문종도 수양대군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여 <병요>, <무경>이라는 책을 해석하여 풀이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 무예도 뛰어나서 13살에 나간 사냥에서 사슴을 향해 7발의 활을 쐈는데, 모두 목을 관통했어요. 또 하루는 세종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북한산에 올라가서 해지는 것을 관측하도록 명령했는데, 평지를 걷는 것처럼 산을 오르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문종으로서는 수양대군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겠어요.
그래서 문종은 수양대군의 괄괄한 성격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품이 넓은 옷을 입으라고 이야기했어요. 옷이 걸리적거리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기르라고요. 또한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양대군 대신 수양대군으로 바꾸어주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유정난이 왕실 보호냐, 아니면 개인적인 권력욕으로 벌어졌느냐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분명한 것은 문종 재위 시절에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던 수양대군이 단종 즉위 이후 활발한 정계 활동했고, 훗날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계유정난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수양대군은 우선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궁궐을 지키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한명회의 잠재된 능력을 알아보고는 책사로 영입해요. 한명회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수양대군을 위해 무예가 뛰어난 홍달손과 양정 등 군사를 모읍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활쏘기 대회를 명분 삼아서 수십 명의 장정을 데리고 나간 뒤, 김종서를 찾아가 사모의 뿔이 떨어졌다며 빌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영응대군 부인 탄핵과 관련하여 부탁드릴 게 있다면 편지를 건네요. 의심을 푼 김종서가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퇴로 때려죽입니다. 이 과정에서 김종서의 아들 승규마저도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습니다.
김종서가 죽었다고 생각한 수양대군은 곧장 경혜공주 집에 머물고 있던 단종을 찾아가 김종서와 황보인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몄다고 거짓말해요. 다행히 자신이 김종서를 제거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죠. 단종은 수양대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이 순간 혹시라도 김종서가 살아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수양대군은 부하를 보내 확인하라고 말해요. 정말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수양대군의 병졸들이 바로 제거해버리죠.
그 시각 한명회는 단종의 이름으로 모든 고위 관료를 불러들여요. 아무 영문도 모른 관료들이 궁궐에 들어가는 순간 성문이 닫혀요. 그리고 한명회의 손짓 하나에 생사가 결정됩니다. 살릴지 죽일지 말이요. 계유정난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죠. 입궁하지 않았어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한 달 안에 모두 처형됩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조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죠?
계유정난 당시에는 옳은 일을 했다며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관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등을 돌리는 관료들이 많아졌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연신 복위 운동을 벌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사육신이 있죠.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명나라에 계유정난이 역모였다는 사실을 알리려고요. 그러나 한명회에 의해 계획이 틀어져 실패하자, 두려워진 김질이 장인 정찬손에게 거사 준비를 털어놔요. 정찬손도 바로 세조에게 사실을 알리면서 70여 명의 관료가 처형됩니다.
백성들은 세조를 어떻게 보았나요?
국왕으로서는 정치를 매우 잘했습니다. 조선 곳곳의 백성에 중앙 행정력이 미치도록 태종 때 시행했다가 중단된 호패법을 다시 시행해요. 이를 바탕으로 필요한 만큼만 세금을 거둬들입니다. 백성을 위해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적극적으로 막아요. 또한 조선의 근간이 되는 법률을 만들어요. 이것이 훗날 경국대전이 됩니다. 또한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여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백성을 보호합니다. 방어체제도 중앙군 5위를 완성하고 지방은 진관체제로 바꿔요. 또한 여진족을 토벌하여 백성을 보호합니다. 그럼에도 세조에 대한 백성의 미움은 커서 세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어떠한 이야기가 있나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무섭게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조카를 잘 보필하겠다고 약조해놓고는 왕위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뺏었으니 나도 네 아들의 목숨을 가져가야겠다.”라며 울부짖었어요. 그런데 세조도 대단한 인물인 것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죽은 자가 이승에 와서 왕을 협박하다니, 썩 물러나거라.”라며 응수합니다. 현덕왕후는 잘못을 빌기는커녕 너무 당당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어요. 그리고는 세조의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 밖으로 나가버려요. 세조는 현덕왕후가 아들을 죽이러 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그 순간 세자가 위독하다는 내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와요.
세조는 부랴부랴 세자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의경세자는 숨이 멎어버렸죠. 이에 화가 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병졸들이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자 매우 역한 냄새가 났어요. 코를 막고 관을 끄집어내려 했으나 꿈적도 하지 않자 도끼로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관이 스스로 무덤에서 나와요. 병졸들은 두려움에 관 자체를 태우고자 했으나, 하늘에서 비가 내려 이마저도 불가능했어요. 결국 병졸들은 관을 강에 던져버렸고, 강물을 따라 흘러가던 현덕왕후의 관은 한 농부가 거둬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조도 현덕왕후의 침을 맞은 자리에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고생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앞뒤 관계가 맞지 않아요.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조선시대를 움직였던 성리학 영향이 제일 커요. 세조가 친형제와 조카를 죽였다는 점은 성리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가장 큰 죄이거든요. 예를 들어 광해군도 정치를 잘못해서 내쫓긴 것이 아니라 폐모살제, 어머니를 폐위하고 형제를 죽였다는 이유로 내쫓기거든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세조는 조선 왕 중에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다른 왕들과는 달리 부인을 2명밖에는 두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었고요.
여러분은 세조가 어떻게 평가되시나요? 역사의 재미는 다른 시선으로 다른 해석을 하는 데 있어요. 세조에 관하여 여러분만의 평가를 내려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