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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Nov 27.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13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13. 베를린 장벽

우리는 베를린에서 조금 오래 체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말 비행기 삯과 평일 삯 차이가 너무 컸고 런던 공연이 빠듯하게 잡혀있어서 베를린에서는 하루 묵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이튿날 밤비행기를 예약해 베를린을 한 바퀴 둘러볼 시간을 뺐다. 이날 오전부터 오후까지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야바위꾼 일당을 만나 불행한 일을 겪긴 했지만 대체로 그랬다.




베를린, The Impression

트램을 타러 가는 길에 본, 타고 이동하며 본 풍경들은 이렇다. 숙소에서 나와서 트램이든 지하철이든 교통수단을 타려면 100미터 이상 걸어야 했다. 그 길도 좋았다. 우리는 트램을 타고 베를린 한복판에 있는 베를린 벽 기념관에 가려는 참이었다. 내가 베를린을 사랑하게 되었던 많은 이유들에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 있다. 걷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공연 광고가 지극히 오래된 방식으로 아무렇게나 붙어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시대를 향수하게 만든다. 저 목록에서 내가 좋았던 팀은 펫샵보이즈. 우리의 베를린 체류기간 앞뒤로 정말 많은 뮤지션들의 공연이 있었고 있을 예정이었다. 조금 배가 아팠다.




베를린 벽 기념공원 Gedenkstätte Berliner Mauer

베를린 장벽을 찾아가기 위해 트램을 타고 40분 정도 갔는데 도착해보니 우리가 원했던 벽이 아니었다. 지도가 데려다준 곳은 기념공원이었다. 공원도 좋긴 했지만 생각했던 장소가 아니길래 부랴부랴 다시 알아보았더니 우리가 가려던 곳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였고 우리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었다. 시간이 빠듯했다면 허탈했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한 바퀴 돌았다고 생각하고 시내 한복판에 남겨진 벽의 잔해를 따라 조금 걸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베를린 벽은 베를린을 반으로 갈라놓던 벽이었으니 기념관은 베를린 한복판에 있었고 벽은 도시를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 숙소가 외곽 중심부에 있다면 외곽 쪽의 벽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베를린 벽을 보며 새삼 놀란 것은 벽이 정말 도시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휴전선을 중심으로 양쪽에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출입통제선까지 마련되어 남북한이 거의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통일전망대에서 어쩌다 북한 사람 한 두 명 정도 어물어물 보이면 신기해하니까. 그런데 베를린은 정말 코앞에 이웃집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군사분계선이 정해졌을 때 이웃들끼리 몰래 왕래하는 경우가 잦았던 모양이다. 벽은 그래서 세워졌다는 얘기가 있었다.   









프로필 촬영 Photo Shoot

팀장님은 날씨도 장소도 최적의 환경이라며 프로필로 쓸만한 사진들을 좀 찍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진작 생각했으면 좀 더 찍어 바르고 나왔을 텐데 하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의미 있는 장소에서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팀장님 독사진은 내가 찍어드렸다. 그리고 신이 나서 팀장님과 둘이 셀카를 찍고 있는데 멤버들이 하나씩 다가와 끼어들어선 본인들 나름의 애교를 부린 것 같다.



걸을 만큼 걷고 우리는 화장실을 찾다가 기념품샵을 발견했다. 어차피 베를린에서 뭔가 사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딜 가든 기본적으로 엽서를 산다. 내게는 충분한 기념품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도 좋고, 가격이나 선택에 부담이 별로 없는 것도 좋다. 수많은 엽서 디자인 중에서 고르는 재미도 있고, 사고 싶은 디자인이 많으면 그 정도는 다 살 수 있을 만큼의 사치도 가능하다. 여행을 다닐 때에는 엽서를 정말 많이 부치는데 이번에는 몇 개 못 부쳤다. 아무래도 일을 하러 온 것이다 보니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엽서와 사진, 자석 같은 것들을 조금 샀다. 멤버들과 이걸 살까 저걸 살까 서로 골라주고 따라 사면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스위머스 스티커 열심히 붙이고 다녔다. 베를린에 간 한국인들 중에 이것이 한국인 밴드의 스티커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가 발견할 때까지 붙어있긴 할까? 우리가 다시 가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영영 알 수 없을 사실 같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East Side Gallery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가는 길은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 가는 길과 완전히 달랐다. 베를린은 내내 그런 식이었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단조로운 곳 같다가도 고개만 돌리면 모던한 구조물들이 설치되어 있거나 공사 중이다. 수많은 나라의 언어들이 동시에 들리고, 낙후된 곳 같기도 한데 시들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그 와중에 아름답기도 하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유난히 그랬다.





한 때 전쟁을 상징하며 한 도시를 갈라놓던 벽이 예술을 입고 평화의 상징으로 바뀐 현장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다. 이 곳이 월 메모리얼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들을 모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유적지보다는 예술이 더 매력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우리도 넋을 잃고 갤러리를 따라 한참 걸었다. 이곳은 엄숙하다거나 경건하다거나 하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벽 자체가 길거리에 있어 사람들은 통행로인 인도를 따라 걸으며 벽을 볼 수밖에 없었고 인도 옆은 당연히 차도였다. 차들이 씽씽 달렸다. 인파가 워낙 많다 보니 사실 그렇게 씽씽 달리지는 않았지만. 그 곳은 약간 소란스럽고 복작거리는 시장통 같기도 했다. 오히려 이런 환경이 이 장소를 더 현대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왁자지껄한 곳에서 우리가 야바위꾼들에게 사기 미수를 당하기 전까지 그랬다.






야바위꾼들과의 싸움

야바위꾼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노렸던 것 같다. 쬐끄만 아시아인들이고, 그들이 벌이는 판에 호의적으로 구경의 시선을 보냈으니까. 동전인지 뭔지를 컵 아래에 넣고 똑같이 생긴 세 컵을 마구 돌려서 어느 컵 속에 동전이 있는지 맞히는 것이었는데, 돌리는 사람이 너무 우악스럽게 컵을 돌려서 속에 있는 동전이 다 보였다. 분명히 의도된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해놓고 팀장님에게 동전이 어디 있는 것 같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왼쪽에 있다고 너무 뻔하게 다 보였다고 알려드렸고, 팀장님이 확실해? 하시더니 그들에게 안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다가와서 돈을 내라고 했다. 팀장님은 약간의 재미를 위해 돈을 좀 쓰실 생각이 있었는지 얼마냐고 물으며 주섬주섬 지갑을 열었고, 그 개자식은 50유로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멤버들이 기겁을 하며 절대 안 한다고 하지 말라며 막아섰다. 팀장님도 멈칫하셨는데 그때 이미 그 일당 중 한 명이 열려있던 팀장님의 지갑에 자기 손을 쑥 넣어서 지폐 뭉치를 끄집어냈고, 다른 한 명은 내가 본 컵 속에 있던 동전을 요령껏 다른 컵으로 옮긴 뒤 컵을 뒤집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모두 목격했다. 그때부터 나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지만 정작 본인들이 필요한 말 이상으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그렇게 영어로 할 말을 다 쏟아내면서 악착같이 달려들 거라고도 생각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유창하게 영어를 잘 하는 아시아인들도 이런 상황에 문제를 키우기보다는 신변안전을 위해 어느 정도의 항의로 안 되면 돈을 단념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성과 함께 겁을 잃고 무모해지는 쌈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악을 쓰며 사기 치는 것 다 봤고 이거 하겠다고 동의한 적 없다 돈 돌려줘라를 미친 듯이 외쳤고 그들은 처음에는 뭐라 뭐라 소리치다가 내가 계속 말을 끊어먹고 나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니까 나중에는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며, 자기는 영어 못 한다고 독일어로 말하라고 했다. 나는 악을 쓰던 와중에 지폐 뭉치를 쥔 새끼의 손을 재빠르게 낚아채서 지폐를 그와 거의 반반 쥐고 있게 되었다. 힘으로야 내가 이길 수 없었겠지만 내가 안 놓으면 지폐는 찢어질 상황이었다. 난 찢어지나 뺏기나 그게 그거란 생각으로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치킨게임에서 이겼다. 그가 손을 놨다. 그리고 나에게 크레이지 걸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크레이지 걸 맞고 너네는 도둑이라고 말하고 씩씩대며 사람들과 함께 돌아섰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벗어나 식사를 하기로 한 레스토랑까지 가는 내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막상 사태가 종결되고 나니 나도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데 돈을 잃어버릴 뻔 한 팀장님은 오죽하실까 싶었다. 심장이 벌렁댄다고 하셨다. 나도 그랬다. 어떻게 악쓰고 난동을 부렸는지 기억이 희미할 지경이었다. 팀장님은 돌려받은 지폐가 빼앗겼던 돈의 전부인지 확신을 못 하시고 끊임없이 얼마를 환전했는지를 되새겨보며 걱정하셨다. 우리 모두가 침울해졌다.



심지어는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걸어 그곳을 벗어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아까부터 까만 티를 입은 남자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영어권 사람이었으니 역시 관광객인 것 같았다. 우리가 야바위꾼과 벌인 소동을 목격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가 쫓아온다니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이 가리키는 사람을 유심히 보았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트램 정류장까지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남자는 중간에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나는 어쨌든 큰돈을 빼앗기는 불상사는 면했고, 우리가 모르는 양의 돈을 빼앗긴 상태라고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맛있는 것 먹고 기분 풀자고도 했다. 다들 그러자고 하고 검색해서 알아놨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Zum Schusterjungen 레스토랑


어제는 케밥으로 때웠고 오늘은 토스트와 씨리얼로 아침을 때웠으니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좀 푸짐하게 먹자는 얘기가 된 상태였다. 너무 비싸지는 않아도 상당한 가격대의 그럴듯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우리는 야바위꾼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지치고 곤두서 있었고 아침부터 너무 걸어서 배가 많이 고팠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의 음식 사진은 무척 먹음직스러워서 기대치가 높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이 몹시 적었다. 감자를 다 먹었다면 배는 불렀을 것 같은데 우리는 감자에 질린 상태였다. 고기 양이 매우 부족했고, 모든 음식에 함께 나온 감자와 양파 샐러드 비슷한 음식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맛이 없었다. 소시지도 맛이 없었다. 심지어 아스파라거스도 우리가 상상한 맛이 아니고 굉장히 씁쓸한 맛이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기운이 빠졌다.


나는 사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기로 결심하고 나면 원기 회복을 빠르게 하는 편인데, 이런 중대한 시점에 내가 찾은 레스토랑이 약간 실패하고 나니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웅이가 농담처럼 누나가 동전 봤다고 팀장님 부추기는 바람에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하는 순간 너무 마음이 상했다. 그렇게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죄책감까지 밀려와서 좀 회복이 어려운 우울에 빠지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싸워 이겨서 재산을 사수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이 생각이 오만으로부터 비롯된 자기위로로 비쳐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상황도 나와 다른 사람 눈에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속상했다.



우리가 고기만 골라먹고 감자와 다른 밑반찬류 채소들을 절반 이상 남기자 사장님이 안 그래도 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우리한테 맛이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몹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니라고, 맛있었는데 빨리 가야 돼서 다 못 먹었다고 말했고 우리는 황급히 계산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여전히 배고프고 우울한 상태였다.



그래도 숙소에 짐을 챙기러 돌아가는 길은 또 나름대로 좋았다. 아래의 동영상에 내가 본 베를린의 인상이 거의 다 들어있다. 평화로운 오후, 활동적인 사람들, 밝은 날씨, 선선한 바람, 조용한 주택가, 오래된 건물들, 먼 곳에 공사장, 그라피티, 관광객들...





쇤펠트 공항 Flughafen Berlin - Schonefeld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9시 30분 비행기였다. 우리는 늦지 않기 위해 저녁 6시쯤 일찌감치 출발해 공항에 도착했다. 리버풀에서 버스 놓친 이후로 시간 여유 두는 것은 기본이었다. 베를린에는 세 개의 공항이 있었고, 그 중 쇤펠트 공항은 작고 아름다운 공항이었다. 아무리 공항이 많아도 그렇지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인데 이렇게 작은 공항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공항 입구에 펼쳐진 풀밭과 맥주를 파는 펍의 존재가 놀라웠다. 마음이 약간은 편해졌다. 영국에 돌아가는 것이 꼭 집에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머지않아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재앙이 우리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쇤펠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 사실을 몰랐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서, 우리는 날 좋은 풀밭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짐을 부친 뒤 풀밭으로 향하는데 재미있는 조형물을 보았다. 틀 뒤에 서서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있으니까 해보자며 사진을 찍었다. 꼭 트위터에는 올리지는 않았다.


위 사진을 찍을 때 뒤에 앉아있던 백인들이 우리가 찍은 여러장의 사진마다 포토 밤(photo bomb)을 시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의 사진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는지 우리를 자꾸 힐끔대며 웃어댔고, 저 당시 선웅이는 영문을 몰라 더욱 불쾌해했다. 결국 뭘 자꾸 보냐고 한 마디 했더니 그들은 조용해졌다. 우리는 영국에서부터 이미 인종차별적 시선을 느껴왔기 때문에 백인들의 무례함에 좀 날이 서 있었다.


막상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저 풀밭이 아니라 공항 건물이 나오게 하는 것이 정석 같았다. 그래서 돌아가서 다시 찍은 사진이다. 



그래도 앉아서 놀 때는 좋았다. 나는 낮에 악을 쓴 여파인지 목이 쉬어있고, 다들 뭔가 초연해진 느낌이다.




이지젯이 우리의 짐가방을 베를린에 두고 오다


밤비행기는 언제 타도 운치있다. 검은 하늘 아래 불 밝혀진 넓은 비행장에서 사람들이 하늘로 떠오른다. 모든 것이 자연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인 것 같지. 이날은 게다가 공항 건물에서 바로 비행기에 연결된 통로를 통하지 않고 비행장으로 나가 버스를 타고 비행기 바로 옆까지 가야 했다. 비행장에 직접 발을 디디니 그 곳의 적막함이 더 짙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떤 이유로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장소에는 일정량의 슬픔이 남겨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떠났다. 꼭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만 간직한 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야바위꾼과의 싸움조차도 베를린에 대한 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이후 우리에게 이어진 불운의 시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짐 하나가 분실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기가 들어있는 평강이의 캐리어였다. 도착 바로 다음날에 이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잡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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