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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Oct 16.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12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12. 노숙과 베를린 공연



공항 노숙 Airport Sleeping

우리가 베를린행 아침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노숙하기 위해 개트윅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 즈음이었다. 노숙이 시작되었다.


노숙할 장소를 골라 자리 잡은 뒤 팀장님이 우리가 버스킹으로 번 돈 일부를 용돈으로 나눠주셨다. 그 돈으로 우리는 영국의 수퍼마켓 체인인 세인스베리에 가서 사고 싶은 음식과 음료를 샀다. 나는 영국에 있는 동안 세인스버리와 사랑에 빠졌다. 거기서 더 많은 것을 사먹었어야 했는데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세인스베리에는 정말 다양한 인스턴트가 있다. 한국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들은 대부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익히거나 데워 먹어야 하는 음식들인데 반해 세인스베리에는 차게 먹어도 되는 샐러드 류가 많았다. 각종 샌드위치, 샐러드 파스타, 새우 샐러드, 초밥, 쿠스쿠스 등등. 


둘 씩 번갈아가며 거기서 맥주와 야참을 사서 우리 자리에 돌아와 정착했다. 운 좋게도 전기를 쓸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해 휴대폰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팀장님과 멤버들은 하나둘씩 어딘가에 눕거나 앉아 잠이 들었고 나는 홀로 밤을 새웠다. 누군가는 뜬 눈으로 짐을 지켜야 했고 이럴 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밤은 길지 않았다. 공항이 서서히 분주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체크인이 시작되었고, 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비행기 좌석에 앉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베를린에 도착한 것 같았다. 



베를린


우리는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고작 세 시간짜리 비행이어서 비행 자체가 고될 리도 없었지만 애초에 자느라 정신이 없어서 비행기가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고, 앉은 자세로 하는 수면 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몽롱한 상태로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베를린의 풍경을 보곤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은 영국과 달랐다. 내가 가본 적 있는 뮌헨과도 달랐다. 한 도시를 폐허 같다고 하면 실례일까. 하지만 베를린은 그런 느낌이었다. 폐허에 생명이 깃들어 살고 있는 느낌. 그래서 어떤 제약이나 거리낌 없이 아무렇게나 자라나고 모여드는 온갖 색깔의 풀들, 꽃들, 새들, 동물들, 사람들이 있는 장소 같았다. 독일 사람들이 딱딱하다고 하는 세계적인 클리셰를 뮌헨에서는 여러 번 상기했지만 베를린에서는 아니었다. 이 곳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영국과 달리 대륙의 날씨는 내내 화창하고 안정적이었다. 




해바라기 호스텔 Sunflower Hostel

공항에서부터 지하철을 갈아타고 내리며 해바라기 호스텔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리고 공연 기획 측에서 잡아준 숙소라 어떤 수준일지 몰라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본 썬플라워 호스텔은 이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사방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양지바른 곳에 있는 예쁘고 예술적인 숙소였다. 큰 길가까지 100미터 정도 거리였고, 그 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를린의 클럽들이 있는 거리였다. 


우리가 묵을 방은 킵 호텔처럼 현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마음에 쏙 들었다. 밝고 예뻤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수많은 계단들을 악기와 짐들과 함께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지만 그래도 방을 보니 마음이 좋았다. 어떻게 더운물을 트는 줄 몰라서 찬물로 샤워해야 하는 불상사도 발생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다들 배가 고프다고 짐을 풀고 밥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나는 숙소에 남아 눈을 붙였다. 오래 잘 시간은 없었지만 공연하기 전에 잠을 보충하지 않으면 컨디션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햇빛이 잘 드는 눈부신 방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팀장님과 멤버들이 내 팔뚝만 한 케밥을 사다 두었다.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맛도 있었다. 나는 절반 정도 먹으니 배가 불렀다. 




애큐드 쿤스트하우스 Acud Kunsthaus


우리가 공연하는 애큐드 쿤스트하우스는 일종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공연, 전시, 파티 등이 열리는 공간에 바가 함께 있었다. 공연장은 쾌적하게도 1층에 있었고, 2층은 디제잉이 함께하는 클럽 파티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라이브 클럽이든 댄스 클럽이든 기본적으로 지하에 있는 한국과 달랐다. 지하를 무척 꺼려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공간이 무척 좋았다. 


우리가 베를린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밴드 웨이스티드 쟈니스의 안지 씨가 무척 부러워하면서 베를린에 가서 본인 대신 웨쟈 스티커를 남기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열심히 지켰다. 언젠가 웨쟈가 베를린에 오게 되면 이 먼 이국 땅에서 우정의 표시를 확인할 수 있길. 우리가 다시 돌아와 이 흔적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길. 






리허설 Rehearsal

소비엣 소비엣 쪽이 먼저 리허설을 끝내면 우리가 리허설을 하기로 했는데, 장비에 문제가 생겨 소비엣소비엣의 리허설이 지연됐다. 하지만 아무도 딱히 괴로워하거나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 아니라 신기했다. 시간은 충분했고, 그들은 이미 꽤 오랜 기간 투어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어떤 상황에도 크게 다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장비를 챙겨 왔기 때문에 우리는 장비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엔지니어도 프로페셔널했고 사운드도 훌륭했다. 역시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쯤 되어야 뭐든 제대로 되는 것 같다. 



이 공연은 잔다리 페스타를 통해 연결되었다. 프로모터를 통해 소비엣 소비엣 측이 베를린 공연 서포트 밴드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고, 잔다리 측은 같은 시기에 유럽으로 투어를 가는 한국 밴드 몇 팀의 음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음악들을 들어본 멤버들이 스위머스를 지목했고 우리도 일정이 맞아 함께 공연하게 되었다. 소비엣 소비엣은 뉴 웨이브, 혹은 포스트 펑크를 하는 팀이라 엄밀히 말하면 우리 음악과는 장르가 조금 다르다. 훨씬 댄서블하고 무게감 있다. 나는 조이 디비전과 해피 먼데이와 같은 팀들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소비엣 소비엣의 음악을 듣고도 매력을 느꼈지만 정작 이 팀은 왜 우리가 오프닝 서기를 원했는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 선웅이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내게 물어보라고 시켰다. 그들은 그냥 우리 음악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뭐, 그걸로 충분했다.



소비엣 소비엣은 두 명의 알렉산드로와 한 명의 안드레아로 이루어진 3인조 포스트 펑크 밴드다. 이탈리아 출신. 우리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이들을 알게 되었지만 이들은 유럽 쪽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밴드였던 것 같다. 아니면 베를린 사람들이 공연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하거나. 이 날 공연은 매진이었다. 공연장이 미어질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다. 




스위머스 Swiimers 

이 날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우리 앞에 오프닝으로 홀로 기타 치며 노래하는 뮤지션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소비엣 소비엣 멤버들의 지인이었는데, 밴드의 투어를 돕는 스탭 역할을 하면서 매 공연마다 오프닝으로 15분 정도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받는 것 같았다. 그의 무대가 끝나고 우리 차례가 되었다. 


유럽 투어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공연이었다. 가장 긴 셋 리스트를 연주하는 공연이기도 했다. 공간이 실내인데 꽉 차 있으니 리버풀 사운드 시티 때 야외에 운집했던 관객들보다도 더 많게 느껴졌다. 사운드 시티 공연을 끝내고 긴장이 조금 풀려서 그런 걸까. 우리는 투어 이후 가장 만족스러운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공연을 하는 내내 두근거리는 전율과 차분하고 침착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무대에서 보이는 빽빽한 사람들 절반 가까이가 무언가를 피우고 있었다. 마치 밤 비행기나 등대의 불빛처럼 빨간 불이 불규칙하게 켜졌다 꺼지곤 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향기에는 담배와 담배 아닌 것이 섞여 있었다. 공연장에서 흡연이 허용되는 경우가 전무한 한국과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환경이 이 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품고 굳건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자유가 느껴졌다. 


첫 곡 연주가 끝났을 때, 기타 이펙터의 잔향이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관객들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마침내 우리 악기들에서 나던 모든 소리가 끊겼을 때 비로소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후 모든 노래들에서 그랬다. 이런 것 때문에 독일 사람들이 정확하고 절도 있다는 얘기를 듣는 걸까, 잠깐 생각했다. 음악의 모든 부분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관객들의 태도에 나도 연주와 노래에 더 예민하게 신경을 쏟게 되었다. 다른 무대에서 그러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유난히 에너지를 쏟아부은 기억으로 남은 것이 신기하다. 



공연이 끝난 뒤, 베를린 기반의 음악 블로그 Diproton의 사진작가 Tanja Krokos가 아래의 공연 실황 사진을 몇 장 보내주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 했다. 곡마다 연주가 끝난 직후에 보내는 박수나 환호를 제외하곤 관객들이 너무나 조용히 우리 무대를 감상해서 우리가 제대로 한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대 전환을 위해 아래로 내려왔을 때 혼잡한 틈을 뚫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좋았다는 말을 전했다. 한 남자분은 자기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첫 번째 곡부터 눈물을 쏟기 시작해선 끝날 때까지 울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소소하게 음악 매니지먼트 쪽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 한국에 간 뒤에도 간간히 소식을 교환하고 싶다고 하곤 이메일 주소를 받아갔다. 


이번 공연의 프로모터인 마이클이 우리에게 보통 오프닝 밴드의 공연은 사람들이 몇 곡 보다가 밖으로 나와서 쉬거나 술을 마시는데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며 정말 좋았다는 말로 쐐기를 박아 주었다. 나는 그제야 공연을 잘 마쳤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Golden Roots of Your Tree + Woodstock



테니스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영원을 믿지 않아도




Soviet Soviet

우리가 대기실로 악기들을 옮기고 정리하는 사이 소비엣 소비엣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말 공연장이 미어질 지경이어서 무대 쪽으로 헤집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기둥 뒤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 올려 망원경처럼 사용해 가까스로 그들의 무대를 약간 보았다. 



유튜브로 듣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역시 락은 라이브를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멤버들과 맥주도 좀 마시며 왔다갔다 하는데 몇몇 관객들이 나를 알아보곤 안쪽에서 보라며 길을 터선 무대 정면 중간쯤으로 갈 수 있게 해줬다. 나는 황송해하며 호의를 받아들여 서너 곡쯤 보다가 빠져나왔다. 독일 사람들은 내가 맨 앞 줄이 아닌 곳에서 공연을 오래 즐기기엔 키가 너무 컸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 팀장님과 이날 공연한 사람들. 내 옆에 선 사람이 오프닝을 맡았던 싱어송라이터 페르난도. 그는 본인 무대가 끝난 뒤부터 술을 굉장히 많이 마셔서 이 사진을 찍을 때쯤에는 완전히 만취한 상태였다. 



이날 공연을 기획한 프로모터 마이클과. 처음에 마이클은 굉장히 크고 우락부락하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척 섬세하고 쿨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택시를 불러 여자친구와 함께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래 영상들에서 우리는 엔지니어를 만나 인사하고, 평강이는 국가기밀을 털어놓고, 팀장님은 우리를 간략하게 인터뷰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 함께 파이팅을 외친다. 특히 두번째 영상은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걸 보면 그 날의 기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나는 내가 나오는 영상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영상은 가끔 꺼내보게 된다. 




이것으로 큰 공연들이 모두 끝났다.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있을 작은 클럽 공연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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