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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Dec 08.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14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14. 지옥의 구간

이번 엔트리에는 사진이 없다. 베를린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찍은 짤막한 영상과 사진이 전부다. 그 이후로 사진을 찍을 겨를도 정신도 없는 일들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비행기 연착과 수하물 분실

Arrival Delayed and Luggage Lost

비행기가 심하게 연착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떠나 개트윅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두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도착 시각은 10시 40분이었고, 우리는 11시 45분에 런던 시내로 가는 이지버스를 예약했었다. 또 버스를 놓친 것이다. 이제는 그냥 기차 타면 되지 뭐, 하는 초연한 마음가짐과 함께 지치고 고단한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짐 찾는 곳에 가서 수하물을 하나둘씩 건져냈는데 모든 가방이 다 내려지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이 모두 떠나갈 때까지 우리 가방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다. 평강이의 캐리어였다. 그 안에는 기타 이펙터 페달 보드가 들어있었다. 


평강이는 우리들 중 가장 걱정이 많은 멤버다. 가장 겁이 많기도 하다. 그래서 짐을 부칠 때마다 행여 짐이 오지 않을까봐 매번 걱정을 했다. 저가항공은 짐이 분실되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설마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겠어, 하며 웃어넘겼다. 달리 방법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리는 혹시 큰 짐이 따로 오는 곳에 섞였나 해서 공항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한 사람은 그 자리에 남아 다음 비행기의 짐이 내려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우리 가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직원 말고는 어떤 책임자도 그 장소에 없었다. 우리는 짐 찾는 곳 귀퉁이에 있는 분실물 센터에 갔다. 


그곳에는 이미 짐을 잃어버린 한 가족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여자 직원 한 명이 항상 일어나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우리에게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시켰다. 우리는 짐이 어디서 사라진 건지, 베를린에 남겨진 것인지 다른 비행기에 실린 것인지만이라도 당장 알아낼 수는 없냐고 재차 물었지만 별다른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직원은 우리에게 신청서를 작성하고 가면 연락이 갈 거라는 말만 해주었다. 게다가 시간이 늦어 아침 6시가 되어야 베를린 공항 측 직원들이 일을 시작하고 시스템이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황망해져서 일단은 신청서를 접수하고 돌아섰다. 고작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평강이는 미련을 못 버리고 짐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계속 서 있었다. 혹시라도 다음 비행기에 실렸을까 하는 미약한 희망 때문이었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뒤로 서너 편 정도의 비행기 짐들이 내려오고 수거되도록 우리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우선 숙소로 가자고 평강이를 다독여서 기차를 타러 갔다. 




여권은 북쪽으로

사고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상 밤도 아닌 새벽이 되어 런던 시내에 도착했을 때, 막 떠나가는 기차를 배경으로 선 평강이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여권을 두고 내린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어제부터 이어지는 이 이상한 불운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정신까지 놓치지는 않으려고 마음을 추스르며 평강이에게 역무원에게 가보라고 했다. 평강이가 영어가 짧아 팀장님이 함께 가셨고 선웅이와 내가 짐을 지켰다. 여권 분실은 캐리어 분실의 여파 같았다. 평강이는 공항에서 기차 타고 오는 내내 넋이 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심정을 너무 잘 알겠다 보니 책망할 생각도 안 들고 화도 나지 않았다. 이미 짐 분실이라는 큰일이 발생한 이후라 그런지 신기하게도 꽤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만했다.


두 사람이 해결책을 찾으러 간 사이 나와 선웅이는 같은 길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천천히 짐을 위층으로 옮겼다. 짐을 다 옮기고 나니 문득 내가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웅이에게 짐을 맡기고 역무실을 향해 길을 나서는데 마침 평강이가 황급히 내게 오는 것이 보였다. 역무원이 너무 불친절하고 못되게 군다며 내가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역무실에 도착하자 건장한 흑인 직원이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마음이 급했던 평강이가 좀 무례하게 군 모양이었고, 대화가 안 된다고 느끼자 도움을 청하러, 즉 나를 부르러 가겠다고 했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말이 고깝게 느껴진 직원이 평강이에게 자기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라며 다른 사람을 불러오지 말고 네가 직접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요구했던 것 같았다. 평강이는 어이없어하며 그를 무시하고 역무실을 나와 나를 데려간 것이다. 


나는 일단은 그 직원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지했고 평강이에게 사과를 시켰다. 사실 평강이는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우선은 미안하다고 했고, 그 직원은 우리 눈을 똑바로 보며 이곳에서는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자기가 yes라고 하면 yes인 것이고 no라고 하면 no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주 진부하게도 "내가 너희를 도울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달라"는 말을 했고, 우리가 그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하자 침착하게 일처리를 시작했다. 




여권은 햇필드에

기차는 각 역에 3분씩 정차하고 절대 개인용무를 위해 일정을 어그러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1) 우리가 탔던 기차를 파악하고, 2) 우리가 있던 자리를 알아내고, 3) 기차가 서는 역의 역무원들이 각 역에서 3분씩 그 기차를 수색할 수 있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한 역의 역무원이 찾아내지 못하면 그다음 역의 역무원이 수색해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차가 가는 경로를 따라 시간 순으로, 어쩌면 종착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거쳐가는 거의 모든 역의 역무원들과 통신을 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칸 어느 좌석에 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가 그걸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해 몹시 당황했다. 지정좌석이 있는 기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칸을 알지 못하면 역무원들이 수색해야 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그러면 여권을 찾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머리를 짜내다가, 팀장님과 평강이가 사람들이 없는 플랫폼 끄트머리에서 담배를 태우고 기차가 들어올 때 빠르게 뛰어들었던 것이 기억나, 우리가 탔던 칸이 꼬리칸 아니면 꼬리에서 한 칸 앞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냈다. 그리고 짐들 때문에 그 칸의 가장 뒷자리에 듬성듬성 앉아있었고, 평강이가 앉은 좌석은 기차가 움직이는 방향이고 그 기준으로 왼쪽 좌석이었다는 것까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역무원은 침착하게 우리가 탔던 기차가 곧 도착할 역의 역무원과 통신을 했고, 그 과정을 두 번 거친 뒤 여권이 발견되었다. 여권은 런던으로부터 약 40km,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햇필드 Hatfield 역에 가 있었다. 어떻게 벌써 거기까지 가 있을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지만 찾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역무원은 우리가 거기까지 갈 수 있도록 특별 패스를 출력해서 우리의 이름을 적고 서명하고 도장 찍어 주었다. 우리를 런던에서 햇필드까지, 햇필드에서 런던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원데이 프리패스 같은 양해 문서였다. 우리는 마치 암행어사가 마패를 받아 드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 특별한 종이를 받아 들었다. 평강이는 아까의 갈등은 모두 잊었는지 그 직원에게 몹시 고마워했다. 그리곤 우리에게 먼저 숙소에 가라고,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평강이 혼자 가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고, 팀장님은 나는 공연 준비가 더 중요하니 숙소에 가서 컨디션 관리를 위해 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잠깐 실랑이를 벌였는데, 결국 팀장님과 평강이가 여권을 찾으러 가고 나와 선웅이는 짐을 챙겨서 숙소로 가기로 했다. 




아침에 체크인하고 아침에 체크아웃하다

나와 선웅이가 빅토리아 역 인근의 숙소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5시. 둘이서 네 명 분의 짐을 밀고 끌고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며 숙소까지 가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도 머리 아픈 회의를 거쳤다. 날이 밝으면 숙소를 바로 옮겨야 했고, 숙소를 옮기기 전에 런던 시내에 있는 소호에서 우리가 맡겨둔 짐을 먼저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미 밤이 다 물러간 지금 가서 숙소에 체크인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차라리 소호로 바로 가서 짐을 찾고 다음 숙소, 즉 오늘 저녁 숙소로 바로 이동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경로는 아닌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지만 어차피 예약된 숙소를 취소하고 환불을 받기에는 이미 늦었고, 다만 몇 시간이라도 쉬기 위해 우리는 예정된 숙소로 먼저 가기로 했다. 짐을 찾는 것은 평강이와 팀장님이 돌아온 뒤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소에 도착한 나와 선웅이는 또다시 난관에 빠졌다. 예약한 사람의 카드로 잔금을 치러야 체크인이 되는데 예약자인 팀장님의 카드는 팀장님이 들고 가신 상태였기 때문이다. 신분증을 맡기는 등 어찌어찌 사정을 해서 우리는 겨우 방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씻고 취침했다. 


팀장님과 평강이는 아침 7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그 숙소는 우리가 런던에 도착했던 첫날 머물렀던 아스터 빅토리아 호스텔이었다. 오전 11시에 체크아웃이었다. 사람들은 얼마 자지 못 하고 일어나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우리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이사를 했다. 지하철과 도보로 소호에 들러 사흘간 맡겨두었던 짐을 먼저 찾고, 우버 택시를 불러 얼스 코트 Earl's Court 에 있는 우리의 마지막 숙소로 옮겨갔다. 정말이지 두 번은 하기 힘들 강행군이었다. 


짧게 눈을 붙이던 아침 중에 공항에서 연락이 왔다. 베를린에 누락된 우리 짐을 찾았고, 오늘 오전 중으로 우리가 신청서에 적은 주소로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짐이 언제 발견되고 언제 배송될지 불확실해 고정된 주소인 민지의 집주소를 적어 제출한 상태였다. 이제 와서 주소를 우리의 숙소로 바꾸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평강이는 소호에서 짐을 찾은 뒤 런던 외곽 윔블던에 위치한 민지의 집으로 가서 캐리어를 받아 돌아오겠다고 했다. 정말 고된 일정, 고된 이동경로였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여권과 짐을 모두 찾아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집에 못 돌아갈 뻔했다고, 마음이 조금 놓인 평강이가 우스개 소리를 했다. 




얼스 코트의 바미 배저 백패커스 

Barmy Badger Backpackers at Earl's Court

런던에서의 새 숙소마저 엉망일까 봐 두려움에 떨던 나로서는 천만다행으로 새 숙소는 소호의 끔찍한 숙소보다 훨씬 나았다. 예상과 달리 반지하라는 점이 복병이었지만 그래도 훨씬 청결했고 창문도 있고 공간도 약간 더 넓었다. 우리가 하크니에서 너무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모든 숙소들이 하크니의 호텔과 비교될 수밖에 없어서 조금 괴로웠을 뿐이다. 가장 오래 머물 곳이니까 가장 좋은 곳을 잡았던 것인데 초반에 너무 좋은 숙소에 묵으니 그 이후의 숙소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더 발견되었다. 그것은 내가 전에 언급한 적 있는, 이번 투어에서 지속적으로 발각된 나의 고질적 실수들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3박 4일을 2박 3일로 예약해버린 것이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한 숙소를 새로 예약해야 했다. 바미 배저스에서 머무는 기간을 연장할 수는 있었지만 대신 4인실은 사용할 수 없고 일행들과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우리는 고민 끝에 짐도 많은데 낯선 사람들과 섞여 방을 나누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는 합의점에 도달했고 함께 있을 수 있는 다른 숙소, 가능하면 좀 더 좋은 숙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 날 저녁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새벽에 그 난리를 겪고 시내에 나가 짐을 수거하고 새 숙소에 짐을 풀고 약 30분 정도 쉬는 둥 마는 둥 하니 리허설 시간이 임박했다.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런던에서의 마지막 무대를 위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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