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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치 Dec 22. 2017

음악은 유럽을 흔들고, 유럽은 나를 흔들고 #16

밴드 스위머스 유럽 투어 일지 #16. 굿바이 런던





마지막 공연이 끝난 다음날 우리는 각자 혼자만의 정리 시간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일행 중 가장 일찍 일어나서 빨랫감을 들고 나와 코인 빨래방에 가서 빨래를 했다. 날이 맑고 찼다.

 


빨래를 마치고 나서 나는 양지바른 공터에서 한 시간 넘게 해바라기를 조금 했고, 마음을 추스른 뒤 혼자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갔다. 팀장님이 추천해주신 프랜차이즈 조각 치킨 레스토랑인 난도스(Nando's) 치킨이었다. KFC와 서브웨이를 섞은 것 같은 건강식 치킨 패스트푸드 매장이랄까.


그 사이 평강이가 일어났는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잠깐 들어왔다. 마치 자그마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웃들처럼 지나가다 아침식사를 하는 멤버를 발견하고 인사하러 들어오는 상황이 웃겼다. 잠깐 대화를 나눈 뒤 평강이는 목표한 식사 장소에 가보겠다며 나를 두고 쿨하게 자리를 벗어나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웅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묻더니 금세 나타나선 양이 많아 내가 다 못 먹은 음식까지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함께 시내에 나가 달라고 했다. 선웅이는 포트넘 앤 메이슨에 가서 차(茶)를 사고 싶어 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동행해주었는데 뜻밖의 큰 수확이 있었다.




쇼핑 Shopping


포트넘 앤 메이슨은 차 천국이다. 수년 전에 여기서 애프터눈 티를 마신 적이 있다. 나와 친구가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비가 내렸고 일어나서 나갈 시간이 될 때 즈음 비가 그쳤다. 그리고 밖에 나갔을 때에 하늘에 거짓말처럼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때의 신기하고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상점을 한 바퀴 돌았다. 나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줄 비스킷과 차 같은 것을 샀고 선웅이도 무언가를 잔뜩 샀다. 평강이는 우리가 뭘 잔뜩 사들고 들어간 것을 보고 난 후에야 같이 안 온 것을 후회하곤 다음날 혼자 이 곳에 다녀갔다.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티켓을 구하다


나는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를 보고 갈 계획을 세웠었다. 한국에서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영국에 와서 세운 계획이었다. 일하러 오는 여행이었던 만큼 영국에서 뭘 하고 싶다든지 해야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미리 해두지 못했었다. 좋아하는 락밴드들이 자주 다녔다는 카페며 펍 투어라도 계획했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우리 공연에 신경 쓰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웨스트엔드에서 해리포터 간판이 걸린 극장을 보는 순간 이번 투어에서 완전히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한 가지 한다면 저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티켓은 오래전에 이미 매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원래는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에 현장 판매 줄을 서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웅이의 조언대로 시내에 나온 김에 극장에 가서 티켓 구매가 가능한지 물어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의 경험담과는 상반되게 나는 전혀 헤매지 않고 박스 오피스를 한눈에 발견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서 내일 공연 티켓이 있냐고 물었고 직원은 매우 사무적인 태도로 마치 준비해 둔 것처럼 원하는 좌석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선 티켓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원했던 좌석을 내가 원했던 것보다 싼 가격에 너무나 손쉽게 구했다.


나는 이 일이 믿기지 않아서 티켓을 몇 번이나 쓰다듬다가 행여나 잃어버릴세라 가방 깊은 곳에 넣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선웅이는 자기 덕분이 아니냐며 같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냐 안 드냐 하며 나를 놀렸다. 나는 너무 기뻐서 장난스러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진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결국 못 보거나 막연한 가능성을 위해 몇 시간 줄을 서거나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티켓을 사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펍에서 축구 보기


사실 해리포터 티켓을 살 때부터 선웅이는 빨리 숙소가 있는 동네로 돌아가고 싶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날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고 선웅이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펍에서 축구 보는 것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원래는 혼자 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내 눈치를 자꾸 보길래 "같이 가줘?" 했더니 몹시 기뻐하며 덥석 그래 달라고 했다. 평강이는 영국에 와서 몇 번이나 "구기종목은 자기와 잘 맞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만 우리는 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평강이는 또 똑같은 대답을 했다. 구기종목은 잘 안 맞는다고...


그래도 평강이가 같이 왔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꽤 재미있었다. 한국에서도 야구 시즌이나 축구 A매치가 있을 때에는 술집이나 치킨집에 모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이 곳만큼 대낮부터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테이블이 없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서서 맥주잔을 하나씩 들고 경기를 관람했다. 마치 경기장 바로 바깥에서 야외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는 것 같은 열기였다.


우리는 처음에 자리가 없길래 당연히 서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서서 경기를 봤는데, 음식을 시켰더니 종업원이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일어나라고 하고 우리에게 자리를 내줬다. 좀 미안하고 웃겼지만 으레 있는 일 같았다. 음식을 시키는 사람들에게 테이블 우선권이 돌아가는 것 말이다.


영국에서 먹는 마지막 피시 앤 칩스였다. 선웅이가 하크니에서 먹었던 피시 앤 칩스를 못 잊어서 또 시킨 것이었는데 되게 맛없었다.





펍에서 경기를 보는데 선웅이가 응원하는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스크린 앞쪽에 몰려있고 우리 테이블 근처에는 상대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선웅이가 눈치를 살펴 그 동태를 파악하곤 경기를 조용히 보았다. 괜한 자극을 만들면 안 된다고 말하며. 나는 이 모든 것을 꽤 재미있어하며 시간을 보냈고, 경기가 끝난 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숙소에서 캔맥주를 따 마시며 나, 선웅, 평강, 팀장님 넷이서만 함께 우리끼리의 진짜 마지막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앞서 언급한 불화가 생겼고 그날 밤이 그렇게 갔다.




마지막 숙소


다음날 나, 선웅, 평강은 새 숙소로 옮겼고 팀장님은 친구분의 집으로 옮겼다. 하루를 따로 자고 출국날 재회할 예정이었다. 우리의 새 숙소는 에어 비앤비였다. 급하게 구했는데도 사진으로 본 환경과 조건이 무척 마음에 들어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역시 반지하였다. 그 점과 화장실 문이 잠기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멋진 집이었다.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


이사를 마친 뒤 나는 이른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해리포터 연극을 관람했다. 혼자 프레타 망제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하고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자니 혼자서 유럽에 와 돌아다니던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묘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그런 공간에 들어와 있는 내가 터무니없이 어리고 철없게 느껴지던 시절. 그때보다 지금 내가 딱히 더 자란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우울했다.



공연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사실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너무 실망스러워서 연극에 큰 기대를 안 했다. 그래서 오히려 연극은 역시 무대에 세워져야 비로소 완성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다섯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중간 브레이크 타임 때 민지를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영국에 온 관광객들이 찾는 레스토랑을 한 군데는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선택한 버거 앤 랍스터. 레스토랑이 붐빌까봐 미리 예약을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민지와는 이때 작별인사를 할 생각으로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민지는 우리가 출국하는 마지막 날까지 시간을 빼서 다시 나타나 나와 시간을 더 보내주었다.





마지막 날


우리의 원래 계획은 마지막 날 런던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갈무리하고 투어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녁 비행기여도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틀 전에 있었던 불화에서도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마음을 다친 채로 공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얼마나 정직한지, 이때 찍힌 사진들은 마치 이미 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폭풍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고요처럼 보여서 부끄러울 지경이다.


내가 연극을 보며 하루를 혼자 다 쓰는 대신 멤버들을 붙잡고 앉아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냈더라면 무엇인가 달라졌을까? 나는 짧게 후회했다. 그렇지만 이때 나도 아주 많이 지쳐있었다는 것을,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 알았다.




한국으로


밤과 낮을 지나 바다와 대륙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인천공항에는 3주간 서로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렇게 투어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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