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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I Feb 03. 2021

슬리퍼

입퇴사 유무를 알 수 있는 척도

슬리퍼 뭐 아무거나 신으면 어때.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새로운 일터에 갈 때 꼭 개인 슬리퍼를 챙겨간다. 신고 온 외출용 신발 그대로 신고 일을 하면 발이 나를 욕하는 것 같다. 너 아직도 밖에 있는 거냐고. 오후가 되면서 발에 부종이 심해지면 더욱 그렇다. 갑갑해 죽겠다 나 좀 꺼내다오  회사에 들어가면 꼭 내 슬리퍼를 챙겨가고, 사무실에 있는 손님용 슬리퍼는 절대 신지 않는다. 이놈발 저놈발 온갖 발들이 다 모여있는 것 같다. 거기다 내 발까지 보태긴 싫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나의 이 습성을 알고는 내가 슬리퍼를 챙겨오거나 챙겨가는 걸 보며 나의 입퇴사 유무를 확인하곤 했다. 한군데서 정착을 잘 못하는 내 성격상 그런 일이 몇년에 한 번씩은 꼭 있었는데 최근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젠 입퇴사 유무와 상관없이 슬리퍼를 갖고 오기도 한다. 온갖 귀찮음을 감수하고 쇼핑백에 슬리퍼를 갖고 다닌다는 건, 내가 이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슬리퍼를 챙겨왔으니 나는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됐다. 뭐 그런거지.

우리 엄마가 그리 말했다. 회사에 짐 많이 갖다놓지 말라고. 집에 있는 살림살이 회사 책상에 다 갖다놓는 사람 치고 오래 다니는 사람 못봤다고. 언젠가 그리 말한 게 가슴에 콕 박혀서. 아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곤 그 뒤부턴 회사에 슬리퍼만 갖고 가서 일한다. 달력이나 다이어리는 그냥 거기 있는거 좀 쓰다가 버리고 개인 짐은 갖다놓지 않는다. 그게 나에겐 꽤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난 책상에 이런저런 개인 소지품 늘어놓는 걸 좋아하거든. 달력도 그냥 달력 말고 이쁜 달력, 민음사 일력도 좋고, 볼펜도 여러가지 얇은 거 두꺼운거 등등 색색별로 다이어리에 핸드크림에 펜슬케이스에 마우스 패드도 그렇고 뭐 쓰잘데기없는 것들을 정리해놓곤 꽤나 만족해한다. 그걸 다 참아내고선 오로지 슬리퍼 하나만 갖고 출퇴근을 한다는게 나도 내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 요즘에 또다시 출퇴근할 때 슬리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는 걸 의미한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모양이지? 엄마에게 슬리퍼 가방을 들키는 순간 또다시 잔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다! 너 또 왜 슬리퍼 갖고 다니냐? 응 그냥.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왜그래 묻지마. 아무일도 없어. 아닌데 이상한데. 구질구질 뒷굽 다 낡은 내 슬리퍼가 요동을 친다. 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거냐? 꼬질꼬질 밑창 다 낡은 내 운동화가 묻는다. 너 아직도 밖에 있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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